평범한 것들 속에 소중한 가치가 있다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⑤]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와 청복(淸福)

등록 2017.09.29 08:16수정 2018.01.2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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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나무 열매 산에서 우연히 만난 붉은 별 모양의 꽃, 보석 같기도 하다. "이름이 뭐니?" 물어도 대답이 없다. 대신 시인 타고르의 노래가 뇌리를 스친다. “나무에게 부탁했네. 하느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그러자 나무는 꽃을 피웠네.” 나중에 알고 보니 꽃이 아니라 참회나무 열매란다. ⓒ 이명수


벌개미취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는 글귀를 생각하며 꽃을 본다. ⓒ 이명수


지난 주말, 축령산 통나무산방에서 아주 힘든 삶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암에 걸린 아내의 치료를 위해 그 마을에 전셋집을 구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나누면서 사연을 들어보니 코끝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사람 나이가 마흔다섯인데, 너무 젊잖아요!"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고,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등에 진 삶의 짐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삶도 참 파란만장하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등이 휘어버릴 것 같은 그런 혹독한 세월을 견디기도 했다. 그래도 용케 주저앉지 않고 이날까지 걸어왔다.

지금도 역시 삶의 짐은 만만치 않다. 무겁디무거운 책임감이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고,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시작될 인생 2막 준비도 막막하다. 그런데 정말 힘든 사람을 만나고 보니 내 삶의 무게는 참으로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천국에는 거대한 '슬픔의 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서는 자기가 당한 슬픔의 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남이 벗어놓은 옷을 골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자기 옷을 걸어놓고 천천히 나무 주위를 돌며 다른 옷들을 살펴본다. 그런 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옷은 하나같이 자기 옷이라고 한다.

잘 따져보면, 그나마 자기가 당한 슬픔이 자기에게 제일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슬픔의 나무를 통과하면 하나같이 온전히 감사하는 인생이 되고, 하느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대부분 문제는 정답이 없었다. 이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 기준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고, 그 일을 정답으로 만드는 삶이 아름다울 것이다.
 
산길을 천천히 오른다. 둘러보면 곳곳에 이런저런 꽃들이 제 본연의 모양과 빛깔로 피어 있다. 산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자기 할 일은 다하면서도 말이 없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은 자연에 맡겨라."


서양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이다. 숲의 치유 능력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고, 그래서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숲을 찾고 있다.

산길을 걷다 보면 기분이 편안해지고 심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몸과 마음이 맑게 하는 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나는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산에서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한다. 휴식(休息)의 쉴 휴(休) 자를 보면, 나무 옆에 사람이 있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쉬는 형국이다.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 하늘 가운데 달은 떠 있고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 바람이 물 위를 스친다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이렇게 청아한 뜻
요득소인지(料得少人知) 아는 이 적겠지.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소강절의 시이다. 너무나도 평범한 이야기인데, 이 시의 감상 포인트는 바로 이 평범함에 있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청복(淸福)과 열복(熱福)으로 나누었다. 열복은 말 그대로 세속에서 부와 명예를 얻는 화끈한 복을 말한다. 다산은 세상에서 열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청복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그만큼 하늘이 청복을 아낀다고 덧붙였다.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축령산 전망대에서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소강절의 시를 붓으로 쓰다. ⓒ 이명수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일반적인 것, 사소할 정도로 보편적인 것, 귀하지 않은 것,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 이를테면 하늘의 달, 밤하늘의 별빛, 수면 위를 불어오는 바람,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이 숲을 지나는 소리, 꽃들의 고운 자태와 향기 등이 지닌 순수한 본질적 가치...

그것을 깨닫고 내 것으로 내면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청복(淸福)한 사람이다.

평생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던 삼중고의 성녀 헬렌 켈러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서 소중한 가치를 찾아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그녀는 하늘이 몹시 아껴 잘 주려하지 않는다는 '일반청의미'를 얻은 청복한 사람이었다.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청복(淸福)과 열복(熱福) #인문학적 붓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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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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