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과 특수학교는 어울리지 않을까

등록 2017.10.07 17:37수정 2017.10.0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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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과대학 실습 중 장애를 지닌 아이와 함께 병원을 찾은 부모님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예비 의사'라고, 긴 흰 가운을 펄럭이며 쏘다니면 가끔 어떤 어머님들은 내게 길을 묻기도 하고, 병실에서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한 어머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많은 경우 한숨 섞인 걱정을 풀어내고는 하신다. "아이가 치료받을 마땅한 병원이 집 근처에 없어요." "장애인복지관에 재활치료 대기를 걸었는데, 1년을 기다리래요" "내년에 학교 입학인데, 적당한 학교가 없어서 큰일이에요."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가 흘러가면, 그 이면의 문제가 드러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겠어요."

아이의 장애가 진단되는 순간부터 엄마의 삶의 뿌리는 흔들린다. 겨우겨우 직장에서 휴가를 내서 아이와 함께 찾은 진료실, 아이의 발달장애를 진단받고서 충격 속에 문을 나서는 어깨 뒤로 의사가 어머니에게 던지는 한 마디 조언은 엄혹하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직장 휴직을 생각해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장애가 아이에게 선고되는 그 시작점부터 엄마가 직장휴직을 권고 받아야 하는 한국 사회. 24시간을 꼬박 '장애아이 엄마'로 살아내야만 '용서'받을 수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수많은 장애아동 어머니들이 만성적 우울감과 불면의 위험집단인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2011년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펴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발달장애인 보호자의 우울지수는 평균 19.43점으로 일반인 평균(5.03)보다 4배 가까이 높았고, 우울증 의심 기준인 16점을 한참 넘어선다. 또한 장애아동의 양육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직한 보호자는 58.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활치료실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복지관으로 점점 몸집이 커지는 아이를 데리고 동분서주하며, 때로는 지역사회재활이 전무한 한국 사회 속 '재활난민'으로 먼 타지를 떠돌며 '엄마'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 간다.

직장도, 개인의 삶도 포기한 채 아이의 장애진단서를 품고 몇 년을 달려온 어머니에게, 그나마 아이가 일과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적 체계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진정한 통합교육도, 제대로 된 장애인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지만, 장애아동과 그 가족에게 '학교'란 그나마 일생 중 존재하는 안정적 공간이자 공공성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교마저 집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엄마는 결국 아이의 하굣길까지 꼼짝없이 그 학교 근처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속 아이의 장애라는 너무도 무거운 무게. 그 주위를 뱅뱅 공전하는 어머니의 우울과 슬픔은 누구의 책임일까.

지난 5일 열린 '강서 지역 특수학교 설립 주민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성태 의원 ⓒ 미디어몽구


지난 9월 5일, 서울 강서구 탑산초 강당에서 열린 '강서지역 특수학교 설립 2차 주민토론회.' 특수학교가 들어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욕을 해도 달게 받겠다며 장애아동 엄마들이 무릎을 꿇은 바로 그 날, 강서구 김성태 의원은 특수학교 대신 국립 한방의료원이 들어와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그 근거에는 경제적 편익 이외에도 '주민들의 건강'과 (허준 생가가 있다는) '역사적 상징성'이 있었다.

"국립 한방의료원 건립은 지역발전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사업입니다. (관중의 환호소리) 경제적 편익과 의료복지 차원 그리고 역사적 의미 차원에서도 분명 국립 한방의료원이 설립될 곳은 이곳이 가장 적격지라는 사실이 보건복지부 용역결과로도 이미 나왔습니다."

아파트도 공장도 아닌, 지역민들의 아픔을 보듬는 '병원'을 세운다는 주장. 김 의원의 말대로, 지역 주민들은 한방병원에서 아픈 어깨에 침도 맞고 허리에 부황도 뜨며 '의료혜택'을 누릴 것이다. 특수학교의 대항마가 아파트나 공장이라면 차라리 더 논의가 선명했으리라. 애초에 고통을 치료하는 '병원'이란 공간을 내세운 것 자체가 어쩌면 반대자들의 목소리에 도덕적 정당화를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픔의 치료와 예방은 병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약 20년 전, WHO(세계보건기구)는 학교와 건강이라는 개념을 이어 '건강증진학교(Health Promoting School)'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학교란 단지 지식을 쌓아나가는 공간이기 이전에 (1) 학생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확보되는 공간이자 (2) 성인 이후의 삶에서의 실질적 건강증진을 연습하는 공간이며, (3) 나아가 건강한 문화를 배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밑바탕이 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학교의 설립, 특히 장애아동이 다니는 특수학교의 설립은 건강과 무관하지 않다.
집과 가까워 장애아동과 가족이 안전하게, 다른 삶을 포기하지 않고 등하교할 수 있는 학교. 비장애아동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의료적 수요를 적절히 충족시켜주는 건강한 학교. 장애아동이 성장한 뒤 병원에 찾아가 스스로의 건강상태에 대해 또렷이 말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 수많은 낙인과 혐오, 차별에 슬퍼하고 숨어들기보다는, 결국은 함께 이겨나가야 할 문제임을 알려주는 인권적 학교. 장애아동을 위한 학교가 교육의 공간임과 동시에 아동과 가족, 나아가 사회를 치유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공간임을 깨닫는 순간, 특수학교 설립의 '의료복지와 역사적 의미'가 새롭게 읽힌다.

민중의 건강을 염려하여 귀하고 비싼 약재 대신 조선 백성의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 위주로 <동의보감>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한 구암 허준. 400년 전의 허준이 살아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딴 테마거리에 '특수학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한편으로는 장애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민들과 어우러지는 건강한 지역사회를 만드는 특수학교라면 그도 기꺼이 와서 아이들을 돌봐주지는 않을까. 건강증진은 병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이, 그래서 혐오와 차별이라는 불건강 문제에 속수무책인 한국의 의료환경이, 우리가 건강과 특수학교, 허준과 특수학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접점을 못 보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추석 연휴가 지나면 강서구 특수학교 문제에 대한 재협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여전히 논의는 허준 테마거리라는 근거로 '상징성' 항목에서 만점을 받아 확고해진, 한방병원 적합도 1위의 땅의 활용성에 대한 지난한 논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김 의원님의 앞선 주장을 특수학교로 바꾸어 다시 음미해보자.

"의료복지 차원에서도, 역사적 의미 차원에서도," 특수학교는 너무나 적합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병을 치료하는 것은 병원만이 아니며,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학교가 최고의 병원이자 치유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허준의 뜻을 잇는 건강증진학교를 상상하는 것이 2017년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강서구 #특수학교 #건강증진학교 #허준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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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장애인야학 교사이자, 의학과 인류학, 법학을 공부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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