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리무 다듬는 아버지 마음

[시골 아재 살림노래] 일하는 어버이한테 힘이 되는 아이들

등록 2017.10.07 17:28수정 2017.10.07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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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살림을 도맡는 아버지로서 살림노래(육아일기)를 적어 봅니다. 아이들이 처음 태어날 무렵에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보람이었다면, 아이들이 제법 큰 요즈음은 아이한테서 새롭게 배우고 아이랑 고맙게 배우는 살림이라고 느껴요. 그래서 아이와 지내는 나날은 '육아일기'보다는 '살림노래'가 어울리지 싶어요. 살림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듯이 배우고 누리는 나날이라는 마음입니다. 며칠에 한 번씩 공책에 짤막하게 적어 놓는 살림노래를 이웃님과 나누면서 '살림하며 새로 배우는 기쁨'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글쓴이 말)


아이들 목소리

아버지는 군내버스를 타고 혼자 읍내로 갑니다. 읍내에서 순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에서는 삼례로 가는 기차를 탑니다. 이날 하루 두 아이는 아버지하고 떨어진 채 시골집에서 낮이랑 저녁을 누립니다. 밥상맡에도 집에도 잠자리에도 아버지가 없는 하루입니다. 아이들은 밤이 되어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면서 전화를 겁니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아버지 언제 와요?"
"우리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걸? 아버지는 하루 자고 이튿날 집에 가요."

오늘날 우리 삶터에는 손전화라고 하는 무척 놀랍고 재미난 기계가 있어서 참으로 멀리 떨어진 데에서도 목소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나라밖에서까지 목소리를 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런 기계가 없더라도 서로 마음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숨결이 되면, 며칠 못 보더라도 한동안 멀리 떨어지더라도 마음으로 한가득 따스한 바람이 불지 싶어요. 아이들아 꿈을 꾸렴. 우리는 늘 꿈에서 하나로 만나거든. 아이들아 꿈을 꾸자. 우리는 서로 꿈으로 맺고 이어지는 노랫가락이야.

알타리무 다듬는 아버지 곁에서 함께 칼질을 하겠다는 두 아이. 보기만 해도 대견합니다. ⓒ 최종규


알타리무를 다듬으면서


마당 한쪽에서 알타리무를 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이 다듬기를 힘들어 할 까닭도 지겨워 할 까닭도 없지만, 손이 오래 많이 가는 일이니,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이 일을 못하겠네 하고 느낍니다. 알타리무뿐 아니라 그냥 무도, 배추도, 열무도, 오이도, 어떤 김치를 담근다고 하더라도 이 남새를 알뜰히 다듬어 주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흔히들 가게에서 남새를 장만하지만 지난날에는 밭에서 모두 손수 심어서 돌본 뒤에 거두었어요.

다듬기 하나만 치자면 아주 조그마한 일이요 대수롭지도 않습니다. 여러 달 살뜰히 돌보면서 키우기에 비로소 얻는 남새예요. 이 같은 김치를 손수 담그느냐, 김치를 그냥 사다가 먹느냐, 집에서 김치를 담가 주는 사람이 있어서 젓가락만 손에 쥐면 되느냐, 김치를 담글 적에 옆에서 거드느냐, 이도 저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돈으로 사서 먹느냐에 따라서 살림뿐 아니라 삶이나 사랑은 틀림없이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흥얼흥얼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알타리무를 다듬습니다. 다듬은 것들은 옥수수 둘레에 뿌려 줄 생각으로 따로 건사해 놓습니다.

밥 한 그릇 짓는 마음을 날마다 되새깁니다. ⓒ 최종규


밥을 짓는 기운

밥을 짓는 기운은 어디에서 올까요. 밥을 차리는 기운은 어떻게 끌어낼까요. 밥상을 치우는 기운은 또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밥을 먹이고 치우고 저녁에 먹을 밥을 헤아리면서 쌀을 씻어서 불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앞두고 부엌을 치우고 이모저모 하고서 숨을 살짝 돌리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지난날에 어떤 마음으로 밥을 지으셨고,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밥을 지을 만할까를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어른이자 어버이로서 밥을 짓는 마음이 되는가 하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언제나 말은 딱히 안 했지만

시골에서 살며 방송은 하나도 보거나 듣지 않기 때문에 얼마 앞서 어느 라디오에서 인터뷰 방송이 나왔어도 듣지 못합니다. 일부러 안 듣는다기보다 저녁 아홉 시에 흐르는 방송은 도무지 들을 수 없어요. 아이들을 시골집에서 재우는 때는 저녁 여덟 시 안팎이에요. 저부터 아이들을 재우면서 몹시 고단하기에 으레 같이 잠들지요. 도시에서는 저녁 여덟 시나 아홉 시는 팔팔한 때라고 할 테지만, 시골에서는 그야말로 깊은 밤으로 접어드는 어귀랍니다.

언제인가 인터넷 기사가 하나 나온 적 있는데, 전화로 나눈 이야기를 갈무리해서 나온 기사인데요, 방송국에서 요모조모 편집해서 나왔어요.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지요. 하나는 '내가 안 쓰는 말씨로 왜 이렇게 내 말을 바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내 말씨를 온통 얄궂게 바꾸었지만 줄거리는 알맞게 잘 간추렸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먹다가 놀고, 놀다가 먹고, 어느 모로 보면 아이들은 이런 삶을 누리면서 자라는구나 싶어요. ⓒ 최종규


저녁에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부엌일까지 마무리지은 뒤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저는 집밖일도 도맡지만 집안일도 도맡는 아버지입니다. 집안하고 집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혼자서 도맡아요. '그럴 만하니'까 이처럼 집 안팎 살림을 꾸리는데, 아무튼 이 같은 대목을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하기는 아직도 어렵지만 열 해 앞서를 헤아리니 그야말로 대단히 많이 나아졌구나 싶어요.

저는 제 일을 오직 '전문가'로 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어떤 일이든 누구나 전문가로 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즐겁게 해야 한다고 느껴요. 제가 한국에서 몇 사람 없는 '사전 지음이(사전 편찬자)'로 일하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몇 천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없더라도 제가 이 일만 붙잡느라 '집안일을 하나도 안 해도 된다'고 느끼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한국말사전을 짓고 엮는 일'을 더 재미나고 알차게 할 수 있다고 느끼곤 해요.

그래서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저한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말을 여쭐 적에 늘 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막상 이런 이야기가 제대로 매체를 타는 일은 아직 없더군요. '집안일 다 하면서 국어사전 엮는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림을 손수 가꾸면서 말을 살찌우는 길을 새롭게 배우는 어버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아직 기자나 피디나 방송작가 분들은 이 대목을 눈여겨보시지 못하는 듯해요.

그리고 저는 늘 한 가지를 덧붙이지요. 아버지가 집안일하고 집밖일을 몽땅 도맡는데 아이들이 참 잘 놀거든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고마운지 몰라요. 늘 새로우면서 재미나게 놀이하는 아이들이 '새로운 국어사전을 엮는 가장 큰 바탕'이 된다는 대목을 말하기는 하는데, 참말로 늘 말하지요, 그런데 이제껏 라디오나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대목이 제대로 나온 적은 없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더 커서 저희 아버지하고 얽힌 기사를 찾아보다가 부디 저희 아버지가 저희(아이들)를 함부로 빼놓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 대목을 잘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참말 그렇거든요. 저는 늘 '인터뷰에서' 이 대목을 힘주어 말해요. "우리 아이들이 언제나 재미나고 신나게 놀며 노래하고 웃기에 이 살림이 바탕이 되어 제가 하는 일도 씩씩하고 즐겁게 할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은 아직 기사로 나온 적이 없답니다.

골짝마실은 늘 시원하면서... 곧 춥지만, 즐거워요. ⓒ 최종규


골짜기로 달리는 마음은

글을 쓰고, 살림을 꾸리고, 밥을 짓고, 도서관을 갈무리하고, 풀을 베고, 자전거를 몰아 면소재지 우체국을 다녀오고, 빨래를 하고, 바야흐로 멧길을 타고 골짜기를 다녀오자면 만만하지 않은 하루입니다. 그렇지만 으레 이 모두 찬찬히 해내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골짝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당을 치우고 저녁을 짓고 아이들을 씻기고 이럭저럭 빨래를 걷어서 개면 어느새 두 팔도 두 손도 힘이 쪼옥 빠집니다.

아귀힘이 사라지고 다리힘도 없지요. 자리에 모로 누워서 한 손에 연필을 쥐고 책을 펼치려고 해도 한두 쪽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해가 떨어지고 나서 곧 곯아떨어져야겠다고 느끼지만 아이들은 낮잠도 없이 곯아떨어지지 않고 더 놀려 합니다. 참 기운 좋네, 참 씩씩하네, 참 멋지네, 하는 말도 나오지만, 얘들아 꿈을 꾸면서 몸을 쉬어 주지 않겠니, 하는 말이 잇따릅니다.

골짜기에서 온몸을 적시면서 숲바람을 함께 마십니다. ⓒ 최종규


날마다 골짝마실을 하고 싶으나 날마다 하지는 못하고 이틀이나 사흘에 한 차례 하는데, 저녁에 기운이 다하며 쓰러져도 이튿날이 되면 조금씩 되살아나서 다시금 생각해요. '자, 이 가을에는 가을대로 신나는 숲을 누리는 골짝마실을 해 볼까?' 하고요. 저도 아이들하고 함께 어린이다운 마음이 되어 골짝물놀이를 하고 싶어서 가파른 멧길을 땀흘리면서 자전거로 오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살림노래 #육아일기 #아버지 육아일기 #삶노래 #아이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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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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