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심심해 보이는데..." 시댁을 변화시킨 초등학생 아들의 혼잣말

며느리인 나와 시어머니의 연대

등록 2017.10.09 15:32수정 2018.02.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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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건 싫다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 pixabay


결혼 11년차. 올 해 부득이하게 밴쿠버에 머무르는 관계로 처음으로 시댁에 안가는 추석을 맞았다. 안부 전화만 하는 그야말로 경쾌한 추석을 보낸 후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시어머니로부터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가야, 아버님이 많이 달라지셨어!"

이유인즉 이렇다.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 명절이었던 지난 설. 나는 20번의 명절을 함께 보내면서 속에 담아놓았던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의 시댁은 형제가 남편과 결혼한 시누이 둘 뿐인 데다 아버님도 여자형제분밖에 없으셔서 다른 집처럼 음식을 많이 할 필요도 없고, 사람도 많이 모이지 않는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었다. 잘 먹지도 않는 전이며, 나물, 고기, 떡 등 각종 차례 음식을 만드느라 명절 전날 나와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도록 부엌에 서 있곤 했다.

여자들이 음식을 하고 차례상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주로 아이를 돌보거나 우리가 부탁하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버님은 심심해하는 손주도 마다하고 아버님 방에서 텔레비전을 종일 보시거나 인터넷 바둑을 두시면서 하루 종일 어머님을 불러대시곤 했다.

전을 부치느라 손에 기름과 밀가루가 잔뜩 묻은 걸 아시면서도 "물 좀 가져와!" 하고 소리치셨다. 그러면 어머님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손을 씻으시고 물을 떠서 아버님께 가져다드렸다. 아침 차례상 준비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뭘 하느라 이렇게 꾸물거리냐" 며 텔레비전 리모콘을 들고 호통을 치셨다.


지난 설 전날. 여자들이 점심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산소에 가겠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던 중이라 산소에 갈 짐을 싸드리는 게 여의치 않아 조금 늦어지자 아버님의 호통이 들려왔다. "이렇게 안 챙겨주면 어떡해! 과일이랑 짐 싸줘야지. 더 늦어지면 차 막힌단 말이야!" 그러더니 또 "물 좀 줘!" 이러시는 거였다. 그때였다. 초등학생 아들이 혼잣말하는 것이 들렸다. "할머니는 엄청 바쁘고 할아버지는 엄청 심심해 보이는데 할아버지가 계속 할머니한테 일을 시키네!"

그 말에 난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어머님께 "어머니, 어머님은 지금 무지 바쁘시고, 아버님은 심심해 보이시는데 물 좀 가져다 드시라고 해보세요! 어머님 힘들지 않으세요?" 어머님께서는 잠시 멈칫하시더니 "당신이 좀 가져다 드세유~ 산소 갈 짐 싸라면서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조금 당황해하셨지만 별말 없이 직접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내 드셨다.

그날 남자들이 산소에 간 후 어머님과 나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님은 결혼해서 지금까지 아버님한테 얼마나 시달리셨는지, 치매 걸린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등 시집살이를 하면서 괴로우셨던 일들을 나에게 최초로 털어놓으셨다. 그리고 난 그 날부터 어머님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시어머님도 여자구나. 나와 똑같이 가부장제의 폐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시는 구나. 다만 어떻게 해야 하실지를 모르셨던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불만이 사라지는 듯했고, 어머니와 여자로서 동료애를 느꼈다.

그 후 난 어머님께 '코치'가 되어드렸다. 아버님께 싫은 건 싫다 말씀하시고, 심부름 시키신다고 다 해드리지 말고 아버님 스스로 하실 수 있는 건 하시게 하고, 때로는 도와달라고도 말하라고 말이다. 어머님은 그 후 몇 가지 반찬만 해 놓으시고 친구분들과 여행도 가시고 조금씩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명절. 어머님은 그 변화를 체험하셨다.

"너희가 안 와서 나 혼자 일을 해야 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번 추석 땐 이것저것 시키시지도 않고, 전 부치는 것도 도와주셨어."

어머님이 이루신 작은 성취가 무척 반가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결코 편안해질 수 없는 사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국 가부장제의 폐해를 함께 겪고 있는 동지이기도 하다. 이번 추석 어머님이 이루신 성취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를 비난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공유하고, 함께 가부장제에 대항해 나갈 때 작은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는 걸 진하게 깨닫게 했다. 가부장제의 적은 시어머니가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여성이라는 동료애를 가지고 연대할 때 뿌리 깊은 일상의 가부장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가부장제 #며느리 #시어머니 #성평등 #여성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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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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