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에 항복하자던 최명길, 강경화 장관이 떠올랐다

[주장] 영화 <남한산성>을 보며 강 장관의 발언을 이해한 까닭

등록 2017.10.17 10:32수정 2017.10.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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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은 자신의 소설 <남한산성>을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대사 중 하나는 "역적 최명길을 참하시옵소서"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청과 화친을 주장했던 이조판서로 대표적 주화파다.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모시던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청나라를 갑자기 임금의 나라로 모시라는 요구에 응한다는 것은 명분과 소신이 부족한 '역적의 발상'이었던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실린 작가 한강의 기고 글에 대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발언이 화제다. '대한민국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한강의 기고 글은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해줬다는 평을 얻었다. 반면, '과거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도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었다'는 한 문장을 두고 강 장관은 '표현과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 발언은 후폭풍을 몰고 와 강 장관을 향한 비판은 물론 장관 자질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번졌다. 고위 공직자가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 개인의 의견을 두고 공적 자리에서 '문제 있다'고 발언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가,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미국의 조야에 '전쟁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는 소리에 대해, 무슨 역사관을 들먹이는가"라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한국의 외교장관으로 이 엄중한 한반도 정세에서 평화를 지키고,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하기를 원했다. 강 장관의 저 말이 바로 그런 외교장관의 입으로 할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냈다.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공직자도 아닌 작가가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조차도 '미국 나으리들'의 비위를 거스를까 그렇게 걱정되시나"라며 "이러니 국내·외에서 일부 고위공직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이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의 공직자들이 맞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 스스로 물었다. 강 장관은 정말 그 발언이 국민에게 비판을 받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그는 '무능하다'는 비판과 역사의식이 부재하다는 항간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촛불 민심'으로 탄생한 이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정말 몰랐을까? 모르지 않았다면 왜 그랬을까? 그 답이 궁금하던 나는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답을 얻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부분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일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공유해본다.


강경화 장관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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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외교부장관이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강 장관은 미국의 외교가들과 직접 살을 맞대며 일을 한다. '6.25 전쟁의 원흉이 다름 아닌 당신 나라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글이 미국 언론에 실렸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게다가 '국수주의' 비판을 받는 미국의 현 정부가 과거 한반도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자기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국의 외교 수장으로서 어찌 됐든 그들과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장관이 민감한 문제와 관련해 한발 물러나 '당신들에게 비수를 들이댈 생각을 하면서 당신들과 협상하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을 때, 미국 외교 당사자들은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한 국가의 외교 수장으로서 소신이 꺾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많은 문제를 대화로 풀어야 하는 외교 실무자들에게 보다 우리의 국익을 도모할 스탠스를 유연하게 확보해줬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당신들과 선입견 없이 솔직히 대화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준 셈이니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국가의 리더가 역사 앞에 역적이 될지언정 드러나지 않은 실익을 위해 자기 개인의 명예나 명분 혹은 소신을 꺾음으로써 국가의 안정에 기여하는 예를 종종 보게 된다.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를 일으킨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살펴보자. 로마에 복수심이 불타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당시 전략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전투에 능했고 그의 군대는 막강했다.

초반 몇 전투에서 허무하게 한니발 군사에게 패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집정관에게 로마군의 통수권을 맡긴다. 파비우스는 용맹한 한니발 군대와 제대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싸우는 시늉만 하고 후퇴하며 매번 전투에서 패했다. 한니발 장군의 군사가 먼 길을 돌아 원정 왔다는 사실에 착안해 스스로 고립시켜 본국인 카르타고로 돌아가게 만드는 전술을 택한 것이다.

로마제국의 장군이 연이은 패배를 당하는 동안 전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로마 시민과 원로들은 그를 '겁쟁이', '느림보'라 비난했다. 더욱이 그의 지연 전략으로 인해 한니발 군사가 머문 로마지역의 백성들은 각종 횡포에 시달렸고 또 다른 지역도 오랜 전쟁으로 굶주려야 했다. 그 당시 그는 정말로 역사 앞에 역적이 될 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각종 욕을 먹으며 사실상 '역적'이 됐으나 보다 큰 실익을 얻기 위해 흔들리지 않고 지연 전략을 고수했다. 하지만 로마 시민은 장기화되는 전쟁에 지치고 제대로 된 승전보를 전하지 못하는 파비우스 장군 대신 바로 장군을 새로 내세운다. 결국 전투에서의 승리와 적극적인 공세라는 명분과 명예를 입은 바로 장군은 대규모 군대를 모아 한니발 장수와 결전을 치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칸나이 전투다.

전쟁의 달인인 한니발 장군의 군대에 바로 장군의 군대는 대참패를 당한다.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거의 전원 몰살 수준에 가까운 숫자였다. 반면 한니발 장군의 군대는 고작 6000명의 사상자가 있었을 뿐이다. 이 패배로 로마는 충격을 받고 다시 파비우스를 장군으로 임명해 전투에 임했다. 그는 다시 지연 작전을 펼쳤고 결국 한니발 장군은 장기화된 전투에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돼 결국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한니발 장군은 긴 전쟁 동안 단 한 번의 전투도 패하지 않았으나 전쟁에서는 지는 아이러니의 주인공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파비우스 장군이 자신이 역사에 역적이나 겁쟁이로 기록될 수 있었음에도 실익을 위해 지연 전략을 고수하지 않았다면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시민과 원로에게 욕을 먹은 그의 결단으로 인해 수하의 장군들과 로마 군사들은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실익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니발 장군의 본토인 카르타고를 역으로 공격해 본국에서 한니발 장군의 복귀를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이 전략은 한니발 장군이 더 오랫동안 로마에 머무를 수 없었던 직접적 요인 중 하나다.

의지만으로 미국을 상대할 순 없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주장에 문제가 많고, 여러 발언이나 정책 방침이 자국 중심적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미국이 여전히 한반도 정세에 중요한 역할을 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6.25 전쟁이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었다는 한강 작가의 역사 인식에 동의한다면, 오늘날 한반도의 문제 역시 우리의 소신 있는 주장과 발언만으로는 풀 수 없다는 현실 인식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미국 국방부는 괌에 위치했던 B-1B 폭격기를 북한 동해 해상에 비행시켰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이 폭격기가 지하 벙커도 박살 내는 폭탄이 탑재 가능해 북한이 가장 꺼리는 폭격기 중 하나라고 한다. 과거 이 폭격기가 한반도에 출격할 때는 우리 공군과 연합작전으로 출격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이번 출격은 예외적으로 미국이 대한민국에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행했을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제기한다. 물론 청와대는 반박했다.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북한은 현재 남한보다는 미국과의 협상을 원하는 눈치고,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 속에서 미국이 남한과 대화 없이 혹은 남한과 제한적으로 소통하며 북한을 도발하는 군사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반도 정세가 남한의 올바른 평화적 의지만으로 문제를 풀기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남한 정부가 북한과 대화하며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려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이 북한을 도발할 어떤 행동을 독자적으로 펼칠 경우 북한은 다시 그에 대응해 도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각종 언론과 여론이 흔들리고 남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은 더욱 제한받게 된다.

바로 코앞까지 쳐들어온 청과 남한산성에서 대규모 전투를 앞두고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 즉 오늘날로 따지면 외교부 장관이었던 그는 소신과 명분을 택했다. 당시 주권자였던 왕이 형제 관계를 맺고 있던 청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는 모양새는 죽음보다 버티기 힘들었고, 끝까지 전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김상헌의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그 소신과 명분으로 인해 정작 고통을 받은 것은 백성이었고 잃은 것은 국익이었다.

외교란 것이 항상 옳은 말과 당연한 말만 해서 국가의 복잡한 현안을 풀 수는 없다. 특히 그 나라의 외교 정세가 매우 역동적이고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 한반도는 강대국 간의 알력과 압력이 들끓고 있는 '압력밥솥' 같은 상황이다. 이 정세 속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 중 하나인 미국에는 어느 때보다도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고 글과 강 장관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타당하지 않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한강 작가와 국민은 외교부 장관이 아니다. 그들은 강 장관의 발언을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 국민은 평화를 원하고, 과거 전쟁의 책임이 당시 강대국들의 알력다툼에도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에, 이런 복잡한 위기 상황 속에서 한국의 외교부 수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는 데는 때론 국민에게 이런저런 비판을 받을 의무와 책임도 포함돼 있다고 본다.

하지만 만약 강 장관의 발언에 이런 계산이 들어있다면, 이번 일에 대한 비판이 장관의 자질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만에 하나 장관이 그런 수를 뒀다면, 어느 한 편에서는 장관의 그런 수를 읽고 비판의 수위를 넘지 않는 국민의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강경화와 한강은 각자의 일을 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한 문학 작가의 글에 한 나라의 외교부 장관이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지나친 행동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외교부 장관이 나서서 먼저 그 글에 자신의 뜻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 장관이 그 글에 대한 의견 표명을 강요받은 자리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해당 질문에 공식적으로 답해야 했다. 둘째, 한강 작가의 글이 <뉴욕타임스>에 실렸고 그것이 만일 미국 외교가들에게 회자된다면, 그것은 이미 외교 담론 속에 들어온 것 아닐까. 명확히 이 문제를 문학과 외교라는 이분법으로 분리해 나눌 수 있을까?

결과론적이지만 각자 자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국민은 그들의 임무에 충실했고 장관은 외교를 위해 비록 소신은 꺾었어도 나름의 발언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메시지 모두 미국에 동시에 전달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평화를 원하고 과거 한국 전쟁이 강대국들의 의지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메시지와, 그런 국민의 인식과 압력 속에서 협상에 임하는 한국의 외교가들은 자국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당신들과 협상에 임하려 노력한다는 메시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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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김훈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대립하려는 척화파 김상헌과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 두 선비가 서로 적대하는 양극단으로 비치길 원하지 않았다. 한 뉴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그는 이 두 선비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드냐는 앵커의 질문에 '어느 한쪽의 편도 아니며 이 둘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백성과 나라를 걱정한 충신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도 기존의 역사 영화와 달리 극단적인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는다. 서로 싸우다가도 때론 김상헌이 최명길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도 하고 최명길이 오해받는 김상헌의 뜻을 풀어주려 노력하기도 한다.

남한산성이 함락되는 것이 눈앞으로 다가온 영화 말미에 결국 청과 화친하자는 의견이 받아지고, 인조는 신하들에게 항목문서를 누가 작성할 것인지 묻는다. 그러나 역사에 역적으로 기록될 소지가 있는 항복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신하들은 머뭇거린다. 결국 최명길이 그 일을 자처하고 최명길은 그 문서를 작성하며 왕과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인조 : "이 답서를 가지고 가면 경은 전쟁이 끝나도 그 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최 : "신은 그 욕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인조 : "모두가 경을 역적이라 할 것이다."
최 : "전하. 궁으로 돌아가시더라도 예조판서 김상헌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는 이 성안에 하나밖에 없는 충신이옵니다."
인조 : "경도 나의 충신이다."
최 : "신은 이제 만고의 역적이옵니다."

강 장관이 정말로 욕을 먹더라도 외교를 위해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아니면 정말 생각 없이 한 것인지는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영화 <남한산성>과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어느 정부에서나 분명 누군가는 다수의 욕을 먹더라도 국가를 위해 실익을 얻고자 일했을 것이고, 조금은 억울하게 내쳐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므로….
#남한산성 #강경화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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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다시 페미니즘, 싱글의 철학 외 다수) / 철학상담치료사/ 희망철학연구소 연구원 /불교상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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