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다름'을 억압하는 말

'정치적 중립'이 당위의 차원에서 강요될 경우, 의도를 생각하게 된다

등록 2017.10.16 16:40수정 2017.10.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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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어떤 정치적 사안이나 일상의 문제에서 자기 견해를 표출했을 때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을 때가 있다. 마치 사람들은 중립을 '당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중립'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우선, '중립'은 상대적 개념이다. 예컨대 한국의 중도파와 유럽의 중도파가 지향하는 노선이 서로 같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이나 주견을 갖고 있다. 그 자체 하나의 '입장'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중립'을 당위의 차원에서 우선하게 되면, '자신만의 입장'을 가지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진다. 특히 나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중립'을 요구할 경우 그런 의도는 짙게 깔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몇 달 전 어느 날, 나는 작가, 교열부문을 모집하는 어느 업체에 지원한 바 있었다. 면접 약속이 이날 오후에 잡혀 37도에 달하는 삼복더위에 해당 업체를 찾아갔다. 업체에 들어서자 실무 담당자가 내게 우선 서약서를 쓰게 했다. 대충 읽어보니 '면접비를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그는 노트북에 저장된 한 편의 글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1시간을 줄 테니 이 글을 교열하고, 내 생각을 덧붙여 보완하라고 했다. 해당 글의 주제는 '미디어와 시민 감시'에 관한 칼럼이었고, 글의 소재는 지난 대선 기간 발생한 '국민의당 제보조작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 귀퉁이에 앉아 1시간 동안 열심히 글을 손질했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은 탓인지 허리 통증도 밀려왔다.

1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면접을 보게 됐다. 해당 업체의 실장과 대화를 나누던 중 불쑥 업체 대표가 들어와 내가 손질한 글을 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첫 문단을 읽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뭐야? 글을 왜 이렇게 거칠게 썼어요!"

내가 국민의당 제보조작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충격적 사건"이라 수정한 구절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주관이나 감정이 개입되어 있어 교열 수준을 넘어 섰다"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지적했다. 순간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마이뉴스>시민기자라는 내 경력을 문제 삼으며 "세상을 아주 한 쪽의 편향된 시선으로 삐딱하게 보고 있다. 이런 글쓰기 태도는 위험하다"라고 일갈했다. 한마디로 그는 내 '중립성'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마치 MB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을 '사이비 기자'라 몰아붙였듯이. 그 순간 나는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치적 입장'에 '중립'이란 있을 수 있는가. 지난번 교종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고통 받는 약자 앞에 중립이란 있을 수 있는가라고. 실상 '정치적 중립'이란 때로 어떤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틀어막기 위한 언어가 아니던가. 누구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입장과 개성을 갖고 있고, 그것은 민주사회에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칼럼이라는 정치적인 글을 주고서는 내 정치적인 입장을 반영해 보완했다고 해서 문제 삼는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글은 자기의 표현 수단인 만큼, 작가의 주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작가가 하는 일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돌아와서 그 업체 대표의 이력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그는 이미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인지 짐작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두고 '중립적이지 않다'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립'이 '차이'와 '다름'을 억압하고, 인정하지 않는 프레임으로 사용된 경우였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이 당위의 차원에서 강요될 경우, 우리는 그 의도에 대해 특히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칫 중립은, 민주주의라는 틀마저 무력화시킬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편향이 아니다. 중립을 강요하는 권력과 담론이 문제인 것이다.

#중립 #펀향 #정치적 중립 #당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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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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