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투사' '길 위의 신부'에게 책 한권 선물하자

[두 어른-마지막 회] 백기완 소장과 문정현 신부의 댓거리

등록 2017.10.25 10:35수정 2017.10.2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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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구매하기] '백발의 거리 투사' 백기완 선생님과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이 공동 저자로 나서서 <두 어른>이란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책 수익금은 비정규노동자들이 '꿀잠'을 잘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데 보탭니다. 사전 구매하실 분은 기사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이 기사가 마지막회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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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 허나 두 분은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서 함께 싸우길 주저하지 않는 현역의 투사다. 두 분의 대담집 <두 어른>에는 늙은 투사의 사랑과 고뇌가 담겨 있다. ⓒ 노순택



[여는 마당] 손, 칼, 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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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의 거친 손 ⓒ 김병기


내가 화가라면 신부님의 손과 칼을 그리고 싶었다.

지난 17일 미사를 끝내고 제주 해군 기지 앞에서 인간띠를 잇는 손을 잡았다. 칼은 차 트렁크에 있었다. 투명한 스카치테이프로 깨진 백미러와 미등을 고정시킨 차다. 이 차를 타고 기지 앞에서 연 길거리 미사만도 무려 3806번째다. '길 위의 신부님'이 손과 칼로 나무판에 새긴 건 강정마을에서 10년째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평화의 기도문이다.

1편 기사 : 늙은 신부의 손, 심장을 베는 칼

문정현 신부님을 뵙기 4일 전인 지난 13일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거리의 백발 투사' 백기완 소장을 만났다. 과욕이지만 그의 글과 말을 그리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 그날도 늙은 투사의 책상 위에는 거리에서 못다 말한 글이 있었다. 오는 11월 방한할 '전쟁광' 트럼프를 내치고 평화를 이루자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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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채원희


그가 원고지에 휘둘러 쓴 글자에는 항상 뜻이 있다.

"천년을 실패한 도둑." "눈물이 칼이 되어야 세상이 산다."

그에게 한 문장의 뜻풀이를 부탁하면 역사책에 없는 밑바닥 삶의 생명 이야기가 씨줄날줄로 엮여 나왔다. 버선발, 뿔로살이……. 민중미학이 담긴 이야기다. 싸움에서 돌아온 백발 투사가 지팡이를 짚던 손으로 펜을 들고 몇 날 며칠을 생각하면서 벼리고 벼린 한 문장. 곁가지를 치고 살코기만 바른 그의 글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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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채원희


말, 늙은 투사의 말에는 독재정권의 모진 고문에서 살아남은 바랄이 있다.

"바랄은 꿈이야. 그런데 꿈과 달라. 바랄은 꿈을 꾸던 놈이 포기하면 죽어. 그러니까 목숨 걸고 꿈을 일궈야 하는 게 바랄이야.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서 어기어차 지화자라니까. 영치기영차 영차차 쳐라쳐라~"   

과거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하던 거리와 광장은 그의 말길이었다. 말로 막힌 길을 뚫고, 없던 길을 냈다. 군중 앞에서 카랑카랑한 말로 박정희,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권총 개머리판에 뒤통수를 까여 끌려갔을 때에도, 감옥에 나와서도 서슬 퍼런 말은 같았다.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도 그의 말은 주어만 바뀌었을 뿐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말은 저항의 알기(주체)다.

문 신부처럼 그에게도 노래가 있다. 댓거리를 하거나 밥을 먹다가도 밥상을 두드리며 한 곡조씩 뽑는다. 옛 노래다. 백발투사가 부르는 타령조의 노래는 자기 위로와 정화다. 휘몰이 장단의 노래는 싸움터로 나가서 몰아치자는 여든 다섯 살의 다짐이다. 노래를 부르다가 마른 장작 같은 뺨을 눈물로 적신다. 그럴 때마다 주름이 더 깊다.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거리의 백발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지금도 거리에 있다. 그의 말과 글은 찬 우물에서 막 퍼 올린 차가운 정신이다.  

[첫째 마당] 두 어른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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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문정현 신부(왼쪽에서 네번째) ⓒ 노순택


두 어른을 한 자리에서 보는 건 쉽지 않다. 세상이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맨 몸으로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자리가 최전선이다. 서울에 있는 '거리의 백발 투사'에게 '길 위의 신부님'의 근황을 물었다. 

"문정현 신부님이 계신 곳이 싸움의 최전선이야. 제주 해군기지 앞에서 한반도를 군사적 분단으로 완결 짓겠다는 미국의 음모와 10년 동안 싸우고 있잖아. 일본까지 끼어들었어. 상대는 힘이 세지고 있지.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한 뒤 전쟁까지 하겠다고 트럼프가 떠들고 있어.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전초기지에 맞서는 현장에서 문 신부님은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거지."

강정마을에 있는 '길 위의 신부님'에게 '백발의 거리 투사'의 근황을 물었다.

"끝까지 남은 자야. 아직도 길 위에 남아 있잖아. 그 몸으로 지난겨울에 촛불집회에 나오는 것 좀 봐. 촛불 광장을 지키려고 집회가 열리는 하루 전날부터 물을 안 먹었다는 거 아냐. 화장실에 가지 못하니까.(옆에 있던 문규현 신부 "그 몸으로 백 선생님은 박근혜를 잡으러 가야 한다면서 항상 청와대까지 행진을 했어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두 어른은 서로를 보고 있었다.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오래된 그리움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서 하나둘씩 떠나고 있지만, 남은 자가 그리 많지 않은 그 길 위에 남아있는 오래된 인연 때문이다. 두 어른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문 신부는 진지하게 사람을 대해. 종교적 빛깔이나 자기 신념을 앞세우지 않아. 진지하고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는 건 진짜 감동적이야. 두 번째로는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 이웃이 좀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서든 부축해서 같이 가려고 해. 진지하고 따뜻하고 헌신적이고... 이 세 가지를 갖췄으니 대 인격자지.

그래서 내가 괴로울 때 자꾸 떠올려지는 분이야. 못 견디게 괴로울 때 말이야. 왜냐? 가장 험한 가시밭길을 달려가고 있잖아. 그것도 맨발로. 얼마나 괴롭겠어. 나보다 더 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분이기에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거지."(백기완)  

"백 선생님은 고문을 엄청 당하셨는데, 나랑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어. 내가 요청한 강연 때문에 서울역에서 잡혀가 고초를 당했던 사건. 그때 끌려간 이야기를 꼭 한다니까, 하-하-.(문규현 신부 "그래서 형님께서 뱀술을 갖다 주었잖아요.")

그때뿐인가. 5.18 때도 그렇고, 정말 맞아 죽을 뻔한 분이지. 그럼에도 끝까지 거리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귀한 분이야. 나는 산돼지거든. 길거리에서 놀아먹는 사람인데, 그런 분이 왜 나한테 잘하시는지 모르겠어.(문규현 신부 "서로 귀한 존재니까 그렇지요. 하-하-.)"(문정현) 

이날 길거리 미사를 함께한 뒤 옆에서 계속 추임새를 넣는 문규현 신부에게도 물었다. 형인 문정현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예수. 나는 사족이고. 하-하-."

[둘째 마당-10월 17일] '길 위의 신부'의 하루



문 신부님이 매일 집전하는 길거리 미사 시간은 오전 11시. 지난 17일 아침, 다른 취재를 마치고 차를 급하게 몰았다. 다행히 제 시간에 강정마을 성 프란체스코 평화센터에 도착했지만 신부님이 보이질 않았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해군기지 앞쪽 '골고다 언덕'으로 부르는 길거리 성당으로 서둘러 갔다.  

한두 발짝만 떼면 도로였다. 1~2미터 옆에서 차가 질주했다. 도로변 비닐 천막 안에 5명의 동네 주민이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10년 동안, 그것도 매일? 소름이 돋았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가 사도복을 입고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에 참석한 사람은 적었지만, 두 형제 신부는 엄숙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미사였다.

미사를 끝내고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문 신부는 해군기지 앞 로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정오에 시작하는 '인간띠 잇기' 시작을 알리는 노래다. 강정마을 사람과 활동가들이 모였다. 대안학교 학생들도 참석했다. 그래봐야 15명 정도다. 문규현 신부는 '끝까지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쓴 깃발을 들고 도로 한가운데로 갔다. 바람은 깃발을 세차게 쳤다. 해군기지를 둘러싸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간띠였지만 문 신부는 10년째 버티고 있다.

이날 비닐 천막으로 만든 식당에서 국수를 말아먹고 문 신부는 제주시청 앞으로 갔다. 제주 제2공항 전면 재검토를 위한 천막 단식 농성장이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는 달리는 차안에서 해치웠다. 문 신부는 농성장 사람들이 건넨 커피믹스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백발의 수염 속에서 천진난만한 흰 이가 드러났다. 그는 시청 기자실로 갔다.

이날 강정마을회 등은 '해군 제주기지의 민간인 불법감시와 인권탄압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해군이 제주기지에서 감시직 경비노동자를 고용해 민간인들을 감시하며 욕설을 하는 등 반인권적인 행위를 해왔다는 것이다. 문 신부가 왜 이 자리에 참석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시면 된다. '치욕의 동영상' 편집본이다.



회견이 끝난 뒤에 이날 기자석의 맨 앞줄에 앉았던 문 신부는 나에게 말했다.

"이거, 아주 중요한 거니까, 내일자 오마이뉴스 톱으로 올려줘야 해. 아니 기사만이라도 써줘. 꼭~"

그 자리에서 확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다음날, <오마이뉴스> 고재일 시민기자가 기사를 썼다. ☞'강정', 그곳은 지금도 국민이 '쌍욕'을 듣는다

촛불이 정권을 교체했지만 해군기지 앞은 여전히 전쟁터다. 문 신부는 강정마을에 주민등록을 옮겨놓고 10년 동안 매일 싸우고 있다. 치욕을 당하고 있다. 오전 7시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100배, 오전 11시에 길거리 미사, 정오에 인간띠 잇기를 하고, 오후에는 연대 집회에 참석하면서 문 신부는 아직도 길에 남은 자다. 

[세째 마당-10월 13일] '백발투사'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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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채원희


백 소장의 '입말 편지'를 들고 문 신부를 만나고 싶었다. 지난 13일 오전 11시 40분경,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에 들어가니 마루에 방송용 카메라가 놓여있다. 백 소장은 방문을 열어둔 채 인터뷰를 하겠다고 달려온 방송사 기자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당신들의 생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어. 박정희 때였지. 유명한 학자와 정치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어. 진행자가 방송 전에 참가자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세 가지 말했어. '전태일 분신' '와우 아파트 붕괴' '정인숙 피살' 사건이야. 다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는 그냥 방송국에서 나왔어.

근처에서 소주 한 병을 따서 먹는데, 진행자가 '백기완 출연 예고 방송을 했기에 꼭 와야 한다'고 했어. 생중계에 나가서 3가지를 다 이야기했지. 그걸 박정희와 육영수가 함께 봤나봐. 노발대발했대. 진행자가 나한테 '빨리 도망가라'고 해서 열흘 동안 숨어 지냈어. 진행자는 징계를 당했지. '앞으로 그 놈은 방송에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선에서 무마가 됐나봐. 난 방송사 블랙리스트 1호야. 하-하-. 방송사는 한 번도 나에게 사과한 적이 없어."   

촛불시위 1년을 맞아 기획 인터뷰를 추진하던 방송사 기자들은 결국 백 소장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채 빈손으로 물러났다. 낮 12시에는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일행이었다. 그 자리에서 곽 전 교육감이 국정원을 상대로 진행하는 '내놔라 내파일' 운동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국가정보기관이 그동안 만든 선생님 파일은 이만큼 두꺼울 텐데, 없애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 일부 연예인들의 파일만 몇 개 공개되고 있는데요, 민간인 사찰뿐만 아니라 노동계, 교육계, 언론계, 학계 등의 수많은 인사들이 사찰을 당했습니다. 조작된 정보지만 국가가 작성한 것이어서 '정사'로 기록되겠지요. 1만 명을 모아 '내놔라 내파일' 정보공개를 요청한 뒤에 그 파일을 파기하라고 요청하려는 운동입니다."(곽노현)

"국가 정보기관에서 두드려 맞은 것으로 치면 아마도 내가 세계 최고일거야. 놈들이 고문을 하고 내보낼 때마다 내 뒤통수를 탁 쳐. '야 인마, 이것도 쓰고 가.' 내가 어디서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각서를 내밀었어. 그때마다 썼어. 그래야 나오니까. 100년 뒤에 그게 공개되면 백기완이 타협주의자였고 굴복주의자였다고 하지 않겠어? 그 파일도 지워야지."(백기완)

백발 투사는 거리에서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문정현 신부처럼 매일 싸움이었다. 길거리 전투에서 돌아온 뒤에 책상에 앉아 싸움 글을 쓰고, 다른 싸움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곽 전 교육감 일행과 점심을 먹고 연구소로 돌아온 백 소장 앞에 작은 탁자를 펴고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백 소장의 빛나던 눈빛이 흐릿해졌다.

"우리, 한 시간 정도 쉬고 시작하면 안 될까?"  

백 소장은 이미 반쯤 누워버렸다. 노트북을 덮고 한 시간 뒤에 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 상태에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두 달 전에 서울대 출신 음악인들이 세월호 마당극을 하겠다면서 시를 9편 써 달래. 노래로 만들 거래. 서양말로는 오페라지. 그래서 써줬거든. 너무나 무섭게 느껴지도록 썼어. 난 처음부터 세월호는 박근혜의 학살극이라고 했잖아. 음악인들이 다시 와서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정서적인 시를 한두 개만 써 달래. 며칠을 고민하다가 어제 밤에 한 구절이 떠올랐어.

'아, 어쩌다가 우리가/봄동산에 진달래꽃처럼/빠알갛게 빠알갛게 피어오를 줄밖에 모르던 우리가/낮도 없고 밤도 없는 캄캄한 한길/내일도 없고 모래도 없는/캄캄한 골수로 처박혔단 말인가.'

여기까지 떠오르고 다음 구절이 생각이 안 났어. 오늘 생각났어. 하지만 마지막 남은 게 있다는 말이야. 그리움에 눈을 떴어. 그리움 하나면 모든 나를 다시 일으킬 수가 있어.

'그리움의 눈을 삿대로 삼고/우리들의 의지는 노가 되어 저어가자/어떤 태풍, 어떤 폭풍이 불어와도/영치기영차 영차차 저어가자/끝은 안보이지만/우리의 내딛는 발끝 하나하나가 끝이자 다시 시작이다/이어차 쳐라쳐라/'

아직은 완성된 게 아냐. '외로운 대지의 깃발/휘날리던 이녁의 땅/어둠살 뚫고 피어난/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여기엔 정서만 있고 내용이 없잖아. 그런데 말만 있으면 노래가 돼. 나는 버릇이 좀 나쁜 게, 자꾸 뜻을 담으려고 해. 정서만 담으면 되는데. 희망이 없는 곳에서 그리움의 눈빛 하나는 남았다는 말이야."

노트북을 올려놓은 작은 탁자 밑으로 들어오는 백 소장의 발바닥이 보였다. 그는 누운 상태에서 글을 떠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여든다섯 살 거리의 백발 투사는 아직도 외치는 자이다.   

[닫는 마당] 두 스승, 두 어른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주말에 동네 도서관에서 자판을 두드리는데, 그림 한 점과 함께 문자가 왔다. 박재동 화백이었다.

"일단 봐. 지금은 흑백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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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수염 문정현 신부(좌), 사자머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박재동


박 화백은 이어 세 문장을 보내왔다.

"이 겨레를 짓누른 온갖 폭력에 끝까지 싸우며 길을 내 준 두 어른을 둔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백기완. 꽃잎보다 고운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강철보다 강하게 싸워온 청년. 문정현. 성자라는 호칭조차 거추장스러운 길 위의 소년 어른."

그림 속의 두 어른은 웃고 있지만, '거리의 백발 투사'는 해머를 쥐었다. '길 위의 신부'는 지팡이를 짚었다. 두 어른 등 뒤에서 탱크 한대가 나뒹군다. 색칠하지 않은 미완성본이지만 한 장의 그림에 길 위에 선 두 어른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을 보자 10년 전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면서 평택 대추리에 끝까지 남아 미사를 보던 문 신부와의 우문현답이 떠올랐다.

- 신부님, 매번 지는 싸움을 해서 힘이 들지 않나요?
"지는 것 같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이기고 있어. 평화가 그리 쉽게 찾아오겠어? 호미를 만들려고 지금 탱크를 녹이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문 신부가 새김판을 시작할 때 처음 쓴 글귀는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였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쓴 글귀는 '남은 자'였다.

"바람이 불면 껍데기는 날아가고 알맹이만 남아. 무게가 있으니 씨도 뿌리지. 아픈 곳이 보이면 눈길이 가. 동정심이 일면 뭔가 해야지. 손을 내밀고 연대를 해. 그래서 내 종교는 자발적 가난이야. '아픈 곳에 남은 자' '아픈 곳에 남아있자' '남은 자'... 비슷하게 변형한 글귀를 많이 새겼어."

백 소장에게 물었다.

- 문 신부님이 새김판 작업을 하고 계신데, 백 선생님이 <두 어른> 책에 쓴 글귀 중 꼭 나무에 새겼으면 하는 문장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깎아지른 바윗돌에 딱 한 송이로 핀 바랄꽃이여. 이 문장이야. 시골에 가면 나무가 한 뿌리도 없는 바윗돌이 있어. 바윗돌에 금이 간 게 있는 데 거기에 진달래가 뿌리를 내려서 딱 한 송이를 피웠어. 그 진달래꽃이 어두운 골짜기를 아름답게 빛내준다고 해서 바랄꽃이야. 바랄이란 꿈인데 꿈을 꾸던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 꿈을 일궈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꿈을 꾸던 사람이 죽는다는 꿈이 바랄이야. 문 신부일수도 있고 강정에서 싸우는 사람을 상징하는데, 이걸 문 신부가 새겨줬으면 좋겠어."

이 글은 <두 어른> 책(오마이북 11월 초 출간) 사전 판매를 위한 마지막 글이다. 두 어른에게 책이 좀 더 많이 팔릴 수 있도록 한 마디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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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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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부님' 문정현 신부 ⓒ 노순택


"백 선생님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이야. 기상천외한 말도 많이 하시지. 글도 좋고 깊이도 있어. '천년을 실패한 도둑'. 이런 말을 누가 만들어낼까? 정말 시인이야. 내 글은 낯 뜨거워서 못 읽겠어.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길바닥에 처박혀서 매일 싸움만 생각하는 사는 사람이잖아.

하지만 비정규노동자야말로 피땀 다 빼앗겨서 사회에 나눠주는 데 인정도 못 받는 사람들이야. 시간도 땀도 다 쥐어 짜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먹이다시피하는 사람들인데 천대받고 밀려나는 살아있는 예수님이야.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책 좀 많이 사줬으면 좋겠어. 더 이상 할 말 없어. 또 가봐야 할 데가 있어. 이제 그만하고 가!"(문정현)

"문 신부님의 글은 모든 게 감동이지. 나는 그냥 곁다리로 낀 거야. 하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위해 <두 어른> 책을 사신 분들은 이 땅의 어둠을 갈라 치면서 맨 앞장서 달려가는 선구자라고 생각해. 아직도 책을 안사는 사람은 새벽이 오는 걸 알지 못한다, 이 말이야. 꿀잠은 새벽이야. 새벽을 꼭 품어주시길. 그래도 안 팔리면 할 수 없지 뭐. 하-하-. 이제 가! 원희야(채원희 활동가)~ 이제 이 놈 간단다."(백기완)

두 어른은 우리의 스승이다. 아직도 길 위에 선 <두 어른>에게, 3억 원의 채무를 지고 있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자.

*대담집 <두 어른>의 사전판매(1쇄) 전액은 꿀잠 기금에 보태 빚을 갚는 데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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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른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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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른 #백기완 #문정현 #꿀잠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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