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천안에서도 찾아오는 서울 낙원동 이발관

[써니's 서울놀이 20] 아버지의 자취와 체취가 느껴지는 서울 낙원동 이발관 골목

등록 2017.11.03 09:39수정 2019.06.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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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유산처럼 아려준 낙원동 이발관. ⓒ 김종성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아버지는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 종로 낙원동을 고집했다. 번듯한 인사동을 바로 옆에 두고 국밥집, 포장마차, 선술집, 낙원지하시장, 이발관까지 다양한 곳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대부분 허름하고 오래됐지만,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었구나, 처음 본 곳이 많았다.

지난 후,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전해준 남다른 유산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이 없어서 미안해했다(고 어머니는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낙원동에 올 때면, 나란히 거리를 걸으며 왠지 뿌듯해하던 아버지 옆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지난 주말 아버지가 알려준 낙원동 소재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았다. 아버지가 오래 다녔던 단골 이발소에 가면 친숙한 냄새가 난다. 낙원동에 갈 때마다 아버지의 자취와 체취를 느끼게 된다.


이발소 특유의 사인볼이 빙빙 돌아가는 가게 앞에는 하나같이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라고 쓴 가격표가 나붙어 있다. 대한민국에 이런 가격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런 이발관이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 낙원동이다. 요즘 말로 '가성비' 좋은 가격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멀리 천안이나 인천에서도 낙원동 이발관 골목을 찾아온다.

10여 개가 모여있는 낙원동 이발관 골목. ⓒ 김종성


낙원동 이발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서비스. ⓒ 김종성


소읍이나 소도시에서 종종 만나는 재밌고 정다운 간판을 단 이발관. 머리 깎을 일이 없어도 괜스레 들어가 보고 싶게 하는 이발관이 다른 곳도 아닌 대도시 서울에 이렇게 모여 있다니 참 별일이다. 그런 점이 이채로웠는지 얼마 전엔 송해 할아버지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낙원 이발관, 뉴탑골 이발관, 장수 이용원 등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업소만 해도 열 개가 넘다 보니 낙원동 이발관 골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낙원동 일대는 서울시가 '락희(樂喜)거리'로 조성한 이른바 '노인 친화 거리'이기도 하다. 주로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오다보니 이발관엔 '어르신 우선' 화장실과 '생수 제공' 팻말이 붙어 있다. 어르신 우선 화장실은 노인들이 실금·실변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변기와 세면대가 하나로 된 변기 일체형 세면대를 설치한 곳이다. 생수는 약 복용을 돕기 위해 제공한단다.

20년에서 길게는 50년 경력의 이발사 아저씨들은 대부분 이발 기계를 안 쓰고 오로지 가위로만 머리를 깎는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사각사각'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와 나도 모르게 졸음에 빠지게 된다. 거울 너머로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일렬로 얌전히 앉아있는 할아버지들 모습이 말 잘 듣는 학생들 같아,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머리를 다 깎은 후 뜨끈한 온수에 머리를 감고 나서 이발관 특유의 스킨로션 향을 맡으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다 보면, 어느 곳보다 아늑한 기분이 든다.

이발 기계를 거의 쓰지 않는 수 십 년 경력의 가위손 이발사 아저씨. ⓒ 김종성


이발사와 세월을 함께 한 이발 도구들. ⓒ 김종성


이발관엔 반은 이발 손님, 반은 염색 손님이다. 일반 미용실과 달리 염색약 색깔은 까만색 한가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흰머리를 한 노신사가 들어와 염색약을 바르고 내 옆에 앉았다.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흰머리가 떠올라 넌지시 "염색하시는 것보다 흰머리가 더 멋지신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


아파트 경비 면접 보러 오라고 해서 한살이라도 더 젊어 보이려고 염색하셨단다.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선 나이 듦 혹은 원숙함의 상징인 흰머리를 한 노인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늙음이 추하고 숨겨야 할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아버지의 단골이었던 이발관 사장님은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손님들 머리를 깎아왔다. 젊은 시절 뭐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발사가 말끔하고 뽀얀 가운을 입는 데다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뜨뜻한 직업이라 선택했단다.

당시엔 이발사, 운전사가 인기직종이었다고 한다. 이발 기술은 정년퇴직 없이 자기 건강만 허락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좋다고. 참고로 우리나라 이발의 역사는 1895년(고종 32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 단발령이 시행된 뒤, 왕실 최초의 이발사 안종호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발 가격이 싸다 보니 5천 원을 내고 거스름돈은 수고비라며 주고 가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이발을 끝낸 어느 손님은 음료수 한 병을 이발사에게 건넸다. 이발사 아저씨는 이곳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곳이 아니라 정을 나누는 곳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덧붙이는 글 ㅇ 찾아가기 : 서울 전철 종로3가역 5번 출구 앞 5분
ㅇ 지난 10/28일에 다녀왔습니다.
ㅇ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에도 송고했습니다.
#낙원동 #낙원동 이발관 #락희거리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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