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아직 국민이 아니다

등록 2017.10.31 20:47수정 2017.10.3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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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년 전만 해도 박근혜 시대 속 시민들 모두는 절망 속을 살고 있었다. 박근혜는 자신과 그의 실세 최순실이 처한 위기를 스스로도 블랙홀 같다던 '개헌' 카드를 꺼내들며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저녁 '태블릿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새삼스레 헌법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었다.

박근혜와 집권세력이 세월호 참사 때 헌법상 국가의 존립 이유인 '국민의 생명ㆍ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를 내던졌고 진실을 숨기려 온갖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걸 시민들은 알게 됐다(물론 헌법재판소 판단과는 별개로). 그리고 얼마 전 공개된 박근혜의 청와대 문건들 속에서는 그들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을 구제할 특별법의 입법을 관련 정부 부처들까지 동원해 막아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건강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와 정부의 의무도 철저히 내던졌다.

미국의사협회에서는 가습기에 증류수를 넣도록 권한다. 그러나 1994년에 SK케미칼의 전신인 유공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문제의 원료 물질들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다. 오랜 시간 물이 담기는 가습기 안에 세균이 가득할 것이다. 그 세균이 깃든 수증기를 가족들이 흡입하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다. 손을 넣어 씻기도 불편한 가습기 탱크에는 물때가 끼기 시작하면서 보이지도 않는 세균을 상상하게 한다. 슬슬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런데 그저 세정을 넘어 살균에 테라피 효과까지 있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겨우내 쓰일 우리 아이 방 가습기에 가습기 살균제를 넣을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게다. 굳이 집이 아니더라도 병원, 산후조리원 등에서 이 가습기 살균제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원인 모를 폐 질환으로 임산부와 영유아들이 목숨을 잃으며 연이은 참사가 시작된다. 그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임이 밝혀진 게 2011년 8월이다. 그 제품을 만들어 판 살인기업의 관계자들과 그 제품의 독성 실험 보고서를 조작해 준 전문가들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붙여진 게 2016년 봄이다.

이제 6년이 흘렀다. 지난 10월 20일까지 정부의 공식 피해신고 접수창구인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모두 5872명이다. 이 가운데 21.5%인 1265명이 사망자다.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봄에서 여름, 그리고 20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첫 국정조사 과제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룰 때까지만 해도 당시까지 사과 한 마디 없던 살인기업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늦었지만 드디어 빛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폐가 수세미 같이 굳어가며 스러져 간 피해 신고자들 대다수가 죽어서도 살아서도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 하고 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사다 쓴 가습기 살균제가 악마와도 같은 '살인마'였다는 사실에 피해 가족들도 '내 손목을 자르고 싶다', '죽고 싶다'며 트라우마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를 강도 높게 쓰지 않은 상당수 소비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인지도 모르고 있다.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싼 크고 작은 질환들이 그저 몸이 약하거나 계절 탓에 오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잠재적 피해자들이 수십, 수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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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6월30일, 제2의옥시를막자국민서명운동 기자회견 ⓒ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정부는 적어도 1994년부터 당시에는 법제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거나 유독성을 알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줄곧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옥시와 같은 제조유통사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법인을 갈아타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문가들과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들에게 돈을 퍼부으며 독성실험 보고서 같은 증거들을 조작하기까지 했다. 이들 살인기업들과 정부 관계자들의 책임을 제대로 조사해 처벌하거나 징계해야 할 검찰ㆍ감사원ㆍ공정거래위원회 등은 미적거리고 있다.


국회와 정치권은 기업들의 탐욕이 빚어내는 참사를 화학물질 관련 법제도는 물론, 정벌적 배상제, 집단소송제를 강화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을 새로 만들라는 피해자들과 소비자들의 외침을 아직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사법부는 파렴치한 살인기업들과 양심을 판 전문가들에 면죄부를 주거나 죗값을 깎아주고 있다. 그리고 참사의 진실을 드러내고 피해를 구제하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모두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과 시민사회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보이지도 않는 세균보다 더 무서운 책임의 방기와 윤리의 파탄, 공감의 부재 위에 모래성처럼 서 있다.

아마도 던져야 할 첫번째 질문은 지난 6년 동안 정부는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2011년 역학조사로 가습기 살균제의 실체가 드러나고 제품들이 리콜된 이래, 지난 정부들은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나서 피해구제 특별법 입법까지 막아 온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시종 소비자와 기업 사이의 사안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당시 여당인 자유한국당(새누리당)의 방해로 20대 국회의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국회에서 발의된 몇 개의 특별법조차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사라졌다가 20대 국회에서야 겨우 피해구제 특별법으로 입법됐다. 그나마도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가 제대로 담기지 않은 반쪽 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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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참사 유족 김미란씨가 가습기살균제특위 연장을 바라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물론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으로만 비난하며 파렴치한 살인기업과 탐욕에 양심을 판 전문가들에게 면죄부를 줄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러나 기업들은 끊임없이 이윤 추구의 유혹에 받을 것이고, 곡학아세하는 무척추 전문가들은 필요하다면 항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들의 부도덕과 인성만을 탓하는 것은 구의역의 스크린도어가 고장이 나서 참사가 일어났다거나 강남역 어느 곳의 화장실에 문제가 있어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 가족과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이들의 도덕성에 맡길 순 없다.

우리의 국가는, 정부는 늘 가까운 곳에 있다. 내 월급에서 세금을 떼어가는 것도, 매일 아침 출근길을 통제하는 것도 다름 아닌 국가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이 칼날 같은 경각 위에 놓였던 진도 앞바다에서도, 스텔라데이지호가 사라진 망망대해에서도, 메르스 공포가 휘감던 병실에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반도체 공장에서도, 그리고 가습기 속에서도 우리의 국가는, 정부는 없었다. 진상과 책임의 규명과 처벌, 반성과 성찰이 없는 한, 제2, 제3의 참사는 국가와 정부보다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다.

피해자들이 국가와 거대기업들에 직접 맞서 싸우는 판타지 영화 같은 현실이 어느새 너무 익숙해진 건 아닌가? 우리 모두가 그 현실에 귀 닫고 눈을 감아 버린다면,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자신이 되고 만다. 국가주의자인 홉스는 모든 이웃들이 천사와도 같은 나라가 아니라, 최악의 이기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도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 줄 국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민들 스스로 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까닭은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서라 말한다. 헌법에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적 법익 보호를 위하여 적어도 적절하고 효율적인 최소한의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과소보호 금지원칙'도 담겨 있다. 우리의 국가는, 정부는 헌법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옥시 #사회적참사특별법 #진상규명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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