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21] 아이들에겐 '냉소'보다 '분노'가 더 어울린다

등록 2017.11.05 16:15수정 2017.11.0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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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판매점 모습. ⓒ 연합뉴스


나는 지금까지 복권은커녕 로또 한 장 사본 적이 없다. 불법도 아닐 뿐더러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아닌데도, 스스로에게 마치 금기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돼지꿈까지는 아니어도 이따금 행복한 꿈을 꾼 날이면 출퇴근길 복권 가게 앞을 지날 때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다행히 그 다짐이 허물어진 적은 없다.

또, 나는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다. 팔순 노모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적에는 하다못해 달걀 반찬이라도 없으면 도시락 뚜껑을 아예 열어보지 않았을 정도로 고기 반찬에 껄떡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불판 위에서 삼겹살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를 가장 역겨워할 만큼 꺼려지는 음식이 됐다. 돌이켜보니, 육식을 끊은 지도 얼추 20년이 돼 간다.

한편, 작년부터는 S그룹과 관련된 제품을 사지도, 먹지도, 입지도, 보지도 않는다. 미약하나마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 오롯이 실천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부러 취지를 설명하는 등 주변 사람들에게도 동참을 종용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애쓰다 보니 어떤 날은 '완벽한 실천'에 스스로에게 대견해할 때도 있다.

나의 '3무 원칙'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잠깐. 위의 세 가지 다짐 중, 개인적으로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건 세 번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S그룹 제품을 피해 하루 일과를 보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언뜻 그게 별 건가 싶지만, 막상 실천하자면 아스팔트와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을 딛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족들이 경영하는 기업들로 넓혀보면, 대한민국 기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S그룹의 사업 영역은 광범위하다. 한번은 아이들과 재미삼아 내기를 한 적도 있다. 단 하루만이라도 S그룹 제품을 쓰지 않고 보낸다면, 문화상품권 한 장 기꺼이 선물하기로. 공평하게 '선생님이 이기면'이라는 전제는 애초 달지 않았다.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당장 아이들의 손에 쥔 휴대전화와 몸에 걸친 브랜드 옷, 교실에 설치된 프로젝션 TV와 컴퓨터 등에 죄다 S그룹의 로고가 찍혀있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인기 예능에서 종편까지 웬만한 TV 채널은 물론 주말에 즐겨 찾는 학교 앞 영화관과 할인점, 편의점 등도 모두 S그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만으로도 게임은 끝난 셈이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아이들이 수학여행 때마다 찾는 단골 놀이공원과 겨울방학 때 가족과 함께 가는 스키장도 그렇고, 하다못해 주전부리할 요량으로 찾는 집 앞 빵집도 S그룹의 자매 기업이 운영하는 곳이다. 내기에 지면 주기로 한 문화상품권조차 S그룹과 얽혀있을 정도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근래 들어 일부 학교의 단체 급식에까지 사업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하니 부러 굶지 않고서는 S그룹 제품을 피할 방법이 없다.

아무튼 세 가지 모두 하나같이 '튀는' 행동들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그때마다 이유를 묻곤 한다. 똑같은 질문을 수도 없이 받다 보니 마치 녹음기 틀어주듯 똑같은 답변을 건넨다. 대개는 답변을 듣고 '성인군자 납셨다'는 투로 마뜩찮게 여기지만, 요즘 들어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제법 늘었다. 솔직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온갖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세상에 복권 없는 나라는 없다는데, 로또 하나 가지고 너무 까칠하게 구는 것 아닌가요?"
"소나 돼지, 닭은 불쌍하고, 똑같은 생명체인데 생선과 조개, 달걀은 가엾지 않나요?"
"대기업들 중에 '갑질'하는 곳이 어디 S그룹뿐인가요? 우리나라 재벌들 모두 오십보백보일 텐데, 굳이 S그룹만 불매 운동하는 이유가 뭐죠?"


요즘엔 아이들조차 '질문 같은 조롱'을 퍼부어대는데 그럴수록 태연한 척 응대한다. 시작하게 된 직접적 계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언뜻 식상하리만큼 뻔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고갱이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서 잔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게 된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은 대강 이러하다.

복권은 분명 즐거움을 주는 일종의 여가 문화로 볼 수도 있지만, 사행심을 조장하는 등의 폐해가 만만치 않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광고 등을 통한 노출만으로도 적잖은 해악을 끼친다. 로또가 일주일을 견디게 해준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어릴 적부터 일확천금을 꿈꾸고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육식을 끊은 이유는 여럿 있지만, 직접적 계기라면 양계장의 비좁은 우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닭들을 보고서다. 특히 하나같이 부리가 잘린 모습이었는데, 당시 그 이유를 전해 듣고선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에 갇힌 닭들이 스트레스를 못 이겨 곁의 닭을 부리로 공격하거나 자해하기도 하는데, 이를 예방하고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것이다.

양계장에선 불과 몇 개월밖에 살지 못하는 닭의 자연 수명이 20년 가까이 된다는 사실도 그즈음 알게 됐다. 또,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가축 전염병과 매몰 처리 등 공장식 축산의 온갖 폐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서 고기를 먹어야 하나 싶어 깊은 회의감이 일었고, 나부터 실천하자는 생각에 이내 육식을 끊어 버렸다.

불매운동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냉소

위의 두 사례에 견주면, S그룹 제품 불매 운동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그다지 어렵진 않다. 몇 해 전 상영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포개지면서 S그룹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약자에는 가혹하고 권력 앞에선 굽실거리는 S그룹의 천박하고 비열한 행태는 법의 준엄한 심판을 앞두고 있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딸 앞에서 합의금조로 건넨 고작 몇 백만 원의 돈을 두고 고민하는 영화 속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펑펑 울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능력'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비선 실세의 딸에게 말 값으로 수십억 원을 건넸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론 아직 그 눈물을 닦아낼 수도 없다. 적어도 S그룹에겐 장삼이사의 목숨 값은 그렇듯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데, 공감은 쉬워도 분노와 실천은 멀기만 하다. 앞선 '질문 같은 조롱'에 되레 냉소가 더해졌다. 머리로 이해시켰을 뿐, 아이들의 가슴을 덥히기엔 역부족이었던 셈이다. 오랜 세월 각인된 열패감과 환멸까지 짙게 드리워져 있어 딱히 뭐라 대꾸하기도 곤란할 지경이다. 그때마다 10대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져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생님,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진 분노하지도 실천하지도 않겠다는 듯한 냉소에 순간 정적이 흐른다. 어차피 그래봐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렇게 팍팍하게 살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닳아진' 아이들의 충고가 잇따른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거나 '선생님 혼자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등의 조롱이 무람없이 쏟아져 내렸다.

강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 교사가 아이들을 손놓아버릴 수는 없는 법. 그것이 언젠가 깨야만 할 '바위'라면 기꺼이 '계란'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여태껏 다른 이들과 로또와 육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눠본 경험이 없고, S그룹 제품 불매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한 탓일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교육의 전제는, 어른들의 뿌리 깊은 열패감이 고스란히 전염된 것일 뿐, 아이들에겐 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세상이 변할 것 같으냐'는 냉소에 맞장구칠 게 아니라면, 먼저 아이들 앞에서 불의에 분노하고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때 한 아이가 버릇없는 말투로 기성세대를 나무랐다. 듣는 순간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겐 냉소보다 날선 분노가 필요하고, 더 어울린다.

"어른들이 이렇듯 불의한 세상을 만들어놓고선, 우리더러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건 뻔뻔한 짓 아닌가요?"

#또 하나의 약속 #로또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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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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