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국립공원 맞아?' 천년 고찰 드나드는 관광버스

비자림과 애기단풍이 절경인 백양사, 아름다운 풍경에도 눈살 찌푸린 까닭

등록 2017.11.19 20:39수정 2017.11.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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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칠 남매다. 얼마 전(11월 4~5일) 우리 형제들이 친정에 모여 김장을 했다. 여러 해 친정에 모여 김장을 해왔는데, 김장 직후 설거지를 한다고 해도 누군가 남아 엄마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맙게도 그간 막내 올케가 하루 더 남아서 하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재량으로 학교를 빠져도 되는 초등학생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 막둥이네 첫째가 중학생이 되면서 막내 올케는 예전처럼 하루 이틀 더 남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시간이 되는 세 살 터울의 언니와 내가 월요일까지 남아 설거지와 남은 추수를 돕기로 했다.


"내일(일요일) 설거지 빨리 해치우고 우리 단풍놀이 갈까? 지난주에 내장산 단풍이 60% 정도라 좀 아쉬웠는데, 일주일 사이 훨씬 짙어졌을 거야. 내장사 갔다 올까?"

"내장사? 좋지! 지척인데도 여름에만 가봐서 그 좋다는 단풍 한 번 못 봤거든. 차가 얼마나 밀리던지 가다가 돌아온 적도 있어. 남들 다 본다는 내장사 단풍 내 맘에 좀 스민다는 것이 그렇게 힘드네. 그런데 누가 백양사 단풍이 더 좋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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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백양사 단풍을 마음에 둔 지 20년 만에야 만났다. (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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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애서 가장 멋있는 곳으로 손꼽히는 쌍계루 주변이다. 호수에 백학봉이 드리웠다.(2017.11.5일) ⓒ 김현자


세 살 터울 자매의 백양사 단풍놀이는 이렇게 시작됐다. 단풍놀이 생각에 형제들이 모두 떠나기 전부터 마음이 급해져 후다닥 일을 해치운 언니와 나는 오후 1시 무렵 백양사를 향해 달렸다.

전라도에는 백제 때 창건된 천년 고찰들이 여럿 있다. 백양사도 백제 시대에 창건된 절. 백제 역사를 이야기할 때 언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백제사에 중요한 인물인 무왕 33년인 632년에 창건됐다고 한다. 자그마치 14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서동설화가 전해온다. 삼국시대, 백제의 왕자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하고자 신라로 숨어들어 신라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으로 환심을 얻은 후, 자신과 선화공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지고, 서동왕자는 뜻을 이뤘다는 그런 설화다. 백양사 창건 당시의 무왕이 설화의 주인공인 그 서동왕자다.


우리의 고찰들 대부분은 여러 차례의 중건이나 중창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이 이어진 경우도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바뀐 경우도 많다. 백양사는 이름이 몇 차례 바뀐 경우. 원래 백암사로 창건됐으나, 정토사에서 백암사로 바뀌었다가 백양사가 됐다고 한다.

백암사로 창건된 이유는 백양사가 깃든 산이 백암산(白岩山)이기 때문일 것. 백양사 뒤로 우뚝 솟은 흰 봉우리는 백학봉 또는 학바위로 불리는데, 백암산이나 백학봉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나왔나? 구태여 생각조차 해볼 필요 없도록 봉우리는 하얗다. 인상 깊은 봉우리다.

"내장사보다 단풍이 아름답긴 하네. 백양사 분위기도 훨씬 고풍스러워 좋고. 내장사 보다 백양사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야. 올해 단풍놀이 제대로다. 내장사(산)란 이름이 속에 보물들을 많이 숨겨놓고 있다는 뜻이래. 그 보물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내장산 곳곳에 비자나무와 참나무 등, 정말 오래된 보물급 나무들이 많더라. 너도 꼭 봤으면 좋겠어!"

언뜻 20년 가까이 됐을 것 같다. 누군가 "내장사 단풍보다 백양사 단풍이 더 좋더라!"고 했었다. 이후 친정에 갈 때마다 백양사를 염두에 두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내장사나 백양사는 친정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 단풍철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지 엄두가 쉽지 않았다. 뭣보다 친정에 머무는 시간은 늘 짧기만 했다.

백양사의 주불전은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이다. 외에도 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과 명부전, 칠성전, 진영각, 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쌍계루, 범종각 등 보통의 절들이 갖춘 전각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9호)이 봉안된 극락보전은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400년 전인 영·정조 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1400년의 고찰인데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함이 좀 서글프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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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는 유일하게 대웅전과 칠성전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곳이다. 극락보전 앞에서 본 대웅전과 칠성전(왼쪽)이다.(칠성전과 조사전은 한 전각, 두 공간이다)(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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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애기단풍축제 중 백양사 한 풍경이다.(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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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전각(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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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에는 국화가 많다. 전각과 전각 사이 마당에 국화와 배추를 섞어 심은 것과 그 옆에 시사임당 표충도 한 장면같은 가지가 자라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여러모로 아름답고 정취 그윽한 백양사 가을이었다.(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백양사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에 칠성전이 자리한다는 것. 불과 몇 걸음 거리, 대웅전과 매우 가깝다. 칠성전(각)은 산신각(전), 독성각(전)과 함께 우리 토속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각으로,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과 같은 전각들이 있는 중심 공간에서 최대한 먼 곳에 위치하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다.

그런데 백양사는 이 상식을 과감하게 벗어나고 있다. 이처럼 대웅전 가까이,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경우는 백양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더욱이 눈여겨볼 것은 칠성전 내부다. 일반적으로 칠성은 탱화로 모신다. 그런데 백양사에는 형상화해 모셨다. 이에 대해서는 '백양사에서 칠성 신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칠성) 기도발이 좋다'와 같은 말들이 있다.

백양사에서 가장 멋있는 곳으로 꼽히는 곳은 쌍계루 주변이다. 쌍계루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어떤 지점에서 보는 가에 따라 풍경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사계절 모습이 궁금하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1337~1392)가 임금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지었다는 한시가 쌍계루에 여러 편의 한시들과 함께 걸려 있다는데, 올라가지 않아 못 봤다.

백양사로 들어갈 때는 쌍계루 앞 호수의 징검다리를 건너서 갔고, 돌아올 때는 사천왕문을 등지고 쌍계루 앞으로 나왔다. 나올 때 쌍계루 앞을 지나 조금 걷다보니 왼쪽에 백양사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53호)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문을 읽어 나가며 비자나무 숲을 여유 있게, 그리고 충분하게 느끼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이 왈칵 일었다.

안내문을 빌려 조금 설명하면, 백양사 비자나무숲은 고려 시대 각진국사(1270~1355)가 의도적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목적은 당시 유일한 구충제이자 기름을 짤 수도 있는 비자나무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목적으로. 1970년대까지 백양사 스님들이 비자나무 열매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었다고 한다.

백양사 일대에 7천여 그루가 자생한다고 한다. 국내 가장 큰 규모다. 백양사 오가는 길에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더러 자라고 있어서 비자나무를 볼 수는 있었으나 다음에는 오전에 일찍 나서서 비자나무가 군락으로 자라고 있는 비자나무 숲길을 걸으며 나무의 기운을 듬뿍 느껴보고 싶다. 나뭇잎이 비(非)자 모양이라 비목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꼭 느껴보고 싶은 숲이다.

돌꽃이 가득 피어 있어서 무수한 세월이 스쳤음이 느껴진 석종형 부도를 비롯해 많은 부도가 있는 큰 규모의 부도전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700년 수령의 갈참나무, 매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곤 한다는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와의 만남도 인상 깊다. 대웅전에서 공양간 방향으로 자리한 여러 전각들, 그 사이에 흐르던 고풍스러움과 고즈넉함도 좋은 여러모로 즐겁고 의미있는 단풍놀이였다.

백양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검색하다 보니 '가을 내장사, 봄 백양사'라는, 가을에는 내장사 풍경이 더욱 좋고 봄에는 백양사 풍경이 더욱 좋다는 구분의 표현도 보인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경이나 여정을 느끼는데 구태여 구분이 필요할까.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인다면 봄에 좋은 곳은 가을에도 좋다. 아니 사계절 내내 나름의 매력이 있다. 

참, 백양사의 그 유명한 단풍은 작은 단풍잎보다 잎이 더욱 작아 보이는 애기단풍이다. 우리가 갔던 날인 5일, 백양사 일대는 애기단풍축제 중이었고, 사람들이 정말 많다 보니 풍경 좋은 곳에서는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백양사 단풍이었다. 그런데도 선뜻 가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지레짐작이 좀 후회될 정도로 백양사 단풍은 멋있었고, 오래된 사찰에서 느끼는 정취가 좋았다. 뭣보다 단풍과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 길어서 더욱 좋았다.

그런데 동시에 씁쓸함과 아쉬움도 많은 나들이였다. 수행 공간 그 시작인 일주문을 지나서도 한참 동안 정말 많은 차가 달리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피해 길가로 붙어 서곤 하며 걸어야만 했다. 끊임없이 달려오는 차 때문에 한참을 멈춰 서곤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승용차로 그치지 않았다. 대형관광버스가 지날 때는 특히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부도전 부근까지 그렇게, 대략 40분쯤 걸은 것 같다. "차들이 계속 통행하는 시내 도로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표현하면 그 상황이 이해될까.

우리는 애초 약수초등학교에 주차하고 걸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축제 임시주차장이었다. 수많은 차 사이로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일까. 목이 아프더니 나중에는 눈도 뻑뻑, 코까지 아팠다. 언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 좋은 길을 걸어볼 생각을 왜 못할까? 단풍이나 가을을 느끼기 훨씬 좋을 것인데' 싶어 차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안타까운 동시에 불쌍하기까지 했다. 계속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나무들을 보며 저들은 또 오죽할까? 싶었다. 계속 차를 피하며 걷다 보니 짜증도 났다. 여러모로 씁쓸한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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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지난지 한참인데... 백양사 들어가는 길,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대형관광버스까지. 컴컴해져서야 내려왔는데 차들이 엉켜 한동안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길도, 사람들도 안타깝고 불쌍하고, 뭣보다 씁쓸하고 속상했다. (2017년 11월 5일) ⓒ 김현자


백양사 종무소 "보호할 가치 많은데..."
차량이 절 안으로 지나다니는 문제를 이해하고 싶어 이런저런 추측과 지레짐작을 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백양사 종무소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종무소 측의 설명.

"차 때문에 걷기 힘들었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우리도 참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현재 어쩔 수 없다. 그동안 셀 수 없이 관련 기관이나 지자체에 요청해왔음에도, 그렇게 많은 공문을 보내고 보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다. 우리 주지스님부터 차 없이 걸어 다니실 정도다. 이 좋은 길을 왜 차를 타고 올까?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차는 많이 늘었는데, 해결되지 않는 주차장 문제는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똑같다.

우리의 바람은 절 가까운 약수리에 주차장을 조성, 노약자들을 위한 셔틀버스를 운영했으면 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상 전남이지만 절이 깃들어 있는 백암산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백양사 비자나무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최고 규모다. 700년 된 국내 최고 수령의 갈참나무도 드문 경우로 천연기념물 지정이 필요하다. 여러모로 보호해야 할 가치가 많은 곳인데 지자체는 물론 관련청들이 너무 무심한 것 같다. 다행히 그간의 노력으로 올해 황톳길을 조금 열었다. 내년에는 일주문 부근 박물관까지 확대할 계획인데 주차 문제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

#장성 백양사 #백암산 백양사 #단풍놀이(가을) #고불매 #갈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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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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