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최초로 커피를 마셨는가'를 두고 싸우는 이유

[서평] 커피에 대한 교양과 상식, 박영순 지음 <커피 인문학>

등록 2017.11.15 10:50수정 2017.11.1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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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보다 커피 값이 비싸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이처럼 가격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식후 커피 한 잔은 일상이 되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커피는 맛과 향뿐만 아니라 풍성한 이야기를 피워내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커피를 신이 빚어낸 음료라고도 말한다. 또한, 커피는 카페라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우리 삶에 다가와 있다.

<커피 인문학> 박영순 지음, 유사랑 그림. 인물과 사상사 출판 ⓒ 인물과 사상사

이런 커피를 인류는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을까? <커피 인문학>은 커피의 기원과 맛과 향을 따지며 커피에 대한 교양과 상식을 전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가 이야기할 때 즐거움을 더하게 하는 이야기 소재와 자신의 삶을 비추는 도구로서의 커피를 발견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커피인문학은 커피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저자 박영순은 오랜 기자 생활 끝에 커피 향미와 인문학을 접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피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한 커피 전문가다.

키케로는 인문학을 인간다움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결국 인문학이란 살아가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다. 삶의 문제를 살핀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커피인문학>은 커피를 통해 질문을 던지며 우리 삶을 살피게 한다.

박영순은 커피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추억하고,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첫날밤을 엿본다. 새벽길 상궁 복장을 하고 가마에 오르는 고종의 눈물을 떠올리고, 도쿄 교도소에서 피를 토하며 스러진 시인 이상의 영혼을 만나기도 한다. 커피를 통해 해방에서 현재까지 온갖 어려움을 겪어온 우리 겨레의 궤적을 훑는 저자의 눈길은 따뜻하면서도 사실 관계를 바로잡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커피 음용의 역사와 정통성은 커피산업에서 중요한 이야기 소재다. 이야기는 시장에서 한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브랜드 경쟁력이 된다. 누가 최초로 커피를 마셨는가 하는 기원 문제를 놓고 에티오피아와 예멘이 다투는 것도 그 이유다. 이는 아프리카냐 아라비아반도냐, 그리스도 국가냐 이슬람 국가냐의 자존심이 걸린 논쟁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커피가 가져 온 사회적 효과를 따지는 것도 브랜드 경쟁력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서구 사회는 시대적 각성, 혁명,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커피와 카페의 위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은 커피믹스 발명국으로, 일본은 캔커피 원조국임을 자랑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반도에서의 커피 역사는 왜곡되었고 이야기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프랑스에서 커피는 계몽사항을 일깨운 각성제로, 카페는 민중의 혁명 의식을 고취한 아지트로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냈다. 미국에서 커피는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각성, 혁명,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킨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통하지 못했다." -131쪽 

저자는 고종 황제가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상황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어처구니없다고 한다. 같은 겨레로서 피를 끓게 만드는 엉터리 스토리텔링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한다. 혹시 저자는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데, 한가롭게 '조선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는 식의 이야기가 맘에 들지 않아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자는 <고종실록>, <승정원 일기> 등 어떤 문헌에도 고종 황제가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단 한 줄도 없음을 짚어낸다. 또한, 문헌에 근거해서 살펴도 커피를 처음으로 마신 한국인이 고종황제가 아님을 밝힌다.

"아관파천보다 10년 앞선 1886년, 관료이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커피집)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왔다"라고 적었다." -137쪽

1885년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펴낸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 역시 1884년 1월 한강변에서 커피를 접대 받은 사연을 기록했다.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경변 언덕에 있는 '슬리핑 웨이브'라는 별장에 가서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  -137쪽

이 기록은 고종 황제가 아관파천을 겪은 것보다 12년이나 앞서 항간에 이미 커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음을 보여준다. 특이하게도 퍼시벌 로웰은 당시 커피가 조선에서 '유행'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하더라도 커피는 아관파천 이전에 한반도에서 낯선 음료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퍼시벌 로웰의 안내를 받아 미국을 다녀온 유길준도 국한문 혼용체로 쓴 '서유견문'에서 미국 상황을 전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우리네 숭늉 마시듯 하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도 커피가 음용되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대목이다. 유길준은 한반도에서도 커피를 숭늉 마시듯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살짝 웃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고종이 조선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고 하는 말은 저자의 주장처럼 이제 고칠 필요가 있겠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무능한 왕을 굳이 커피 역사의 주인공으로 불러낼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커피인문학>은 한반도에서 커피가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애환이 서려 있음도 보여준다. 주한미군이 개인별 전투식량으로 지급하던 C레이션이 미군 부대에서 불법적으로 흘러나와 암시장에서 팔리는 과정에서 커피는 인기품목이었다고 한다.

"특히 커피는 '설탕 탄 탕국'으로 불리며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검음 빛깔의 커피액이 회충약으로도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커피 대중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167쪽 

저자의 말처럼 '커피액이 회충약으로도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있었다면 '몸에 좋은 커피를 어린 아이들에게도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불법으로 미군 부대 물건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무슨 말인들 못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런 소문이 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커피 찌꺼기에 톱밥 섞은 꽁피 사건

음식 갖고 장난치는 장사꾼 이야기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커피 역사에서도 믿기 힘든 사건이 있었다. 비싼 데다 사치품이라 눈총 받던 원두커피를 확보하지 못한 다방 주인이 미제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 등을 섞은 '가짜 커피'를 팔다 적발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일명 꽁피 사건이었다.

"원두커피를 기준보다 조금 넣고 담배꽁초를 섞어 맛을 강하게 만들어서 판 이른바 '꽁피 사건'도 벌어졌다." -179쪽

한반도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던 사람들은 원두커피를 내려 마셨다. 대중화에 불이 붙기 시작할 즈음에는 다방에는 커피를 내리는 주방장이 있어야 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1970년 동서식품에서 나온 인스턴트커피의 대량 생산은 다방 주인들에게는 복음이었을 것이다. 인스턴트커피에 이어 자판기커피를 거쳐 다시 원두커피를 선호하는 시절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들은 나름대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여왕의 커피' 또는 '왕실의 커피'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품질에 대한 자랑일 수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메이카 커피는 여러 식민지 국가에서 착취한 수많은 커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메이카는 1830년대 중남미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40여 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식민지 농장에 공급한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전락했다." -277쪽

노예무역의 중심지에서 생산한 커피는 자랑이기보다 차라리 아픔이다. 그런데 어떻게 18세기 들어서야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한 짧은 역사의 자메이카가 블루마운틴이라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냈을까? 어떻게 마니아가 적지 않은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까?

일본인의 교묘하면서도 대담한 상술에서 시작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근거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스토리텔링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노예의 고통을 왕실의 고급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힘을 왜곡이라 할 수도 있지만, 중국과 인도라는 거대한 커피 시장이 열리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있는 삶이 좀 더 여유로울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커피는 회충약이니 각성제니 하는 약효로 존재감을 과시하던 시절을 지나 와인처럼 향미로 즐기며 이야기를 담아내는 소재가 되었다. 커피를 일단 마시기 시작한 국가에서 그 소비량이 줄어든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우리도 이제 커피를 이야기 도구로 삼는 노력을 좀 더 할 때가 되었다.

이효석이 낙엽을 태우며 갓 볶아 낸 커피 냄새를 떠올렸듯이 날이 쌀쌀해질 때면 군고구마 냄새도 나고, 숭늉 맛도 나는 커피 이야기가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

커피인문학 - 커피는 세상을 어떻게 유혹했는가?

박영순 지음, 유사랑 그림,
인물과사상사, 2017


#커피인문학 #블루마운틴 #스토리텔링 #자메이카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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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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