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미술가들의 자화상에 숨은 은밀한 코드

[서평] 프랜시스 보르젤로가 지은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등록 2017.11.16 09:16수정 2017.11.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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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천경자의 '화관을 쓴 자화상'이나 프리다 칼로의 강렬하고 기괴한 자화상, 쉬잔 발라동의 그리 아름답지 않은 자화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왜 르노아르 그림이나 귀족 여성들처럼 복숭아빛 뺨에 화려한 보석과 의상으로 치장한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을까.

프랜시스 보르젤로가 지은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아트북스)은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라는 부제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오랫동안 귀족과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림 역시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열매와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은 삽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는 있었는데, 삽화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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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 아트북스

현존하는 최초의 여성 자화상으로 알려진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성에 대하여>에는 거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얼굴을 삽화에 넣은 그림이 들어 있다.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미술가의 자화상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화상의 기원이 항상 남성의 사례를 통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에 개인적인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바람이 필경사로 하여금 필사본에 자신의 이미지를 포함하게 만들었고, 조각가로 하여금 교회 조각을 자신과 유사한 모습으로 새기도록 이끌었다.' -27쪽.

여성의 자화상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글과 그림, 조각이 오랫동안 남성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 귀족 여성들이 교양의 일부로 음악이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전문 화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여성들은 자화상에 자신의 재능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악보를 들고 있거나 남성 권위의 상징인 벨트를 차고 있거나, 남성 화가들의 상징이던 베레모를 쓴 자화상을 그리는 식이다.


여성 자화상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표현 방식은 여성의 권리 신장, 여성의 사회 진출, 여권 신장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이 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넘어서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 미술가의 모습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소품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남기는 일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1548년 그려진 이젤 앞에 앉은 카타리나 판 헤메선의 자화상은 최초의 여성 전문 미술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 자화상으로 평가된다.

'그림의 모든 요소들은 작품 속 여성이 숙녀이긴 하지만 아마추어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판 헤메선은 아버지로부터 화가 수업을 받았고 작품의 이미지는 전문성을 암시한다. 팔받침으로 고정된 오른손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태세이고 왼손 엄지는 팔레트를 들고 있으며 여분의 붓을 손에 쥐고 있다. 붓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술가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 59쪽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여성의 미술계 진출이 이뤄지지만 교육체계는 미미한 편이었다. 여성들은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박힌 여성의 이미지와 교양 때문에 때때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데 발목이 잡히곤 한다.

'당시 여성성의 개념과 여성의 미술계 진입이 허용됨에 따라 불가피해진 여성의 기대 수준의 증가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고전적인 표현은 마리 바슈키르체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열망하는 것은 혼자 돌아다니는 자유, 오고 갈 자유, 튀일리 궁전, 특히 뤽상브르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을 자유, 아름다운 상점을 둘러볼 자유, 교회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 밤에 오래된 길을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허락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 없는 그런 자유 말입니다.' -167쪽

여성은 어디를 가든 보호자를 동반해야 하고, 마차와 여성 동반자 혹은 가족이 기다려야 했던 상황을 잘 드러낸다. 19세기가  금단의 집 문을 열기 위해 벽을 깨트리기 위해 온힘을 쏟은 시기였다면 20세기는 금기를 깨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한 시기다. 예를 들면 20세기 미술에서 모성은 임신을 통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이 유산한 고통과 아픔을 피가 흥건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출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낸 <나의 탄생>을 그리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여성 미술가들은 임신과 출산, 늙음에 대해, 성 정체성에 대해 직시하는 형태로 여성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임신과 출산, 월경처럼 은밀한 것, 부끄러운 것으로 금기시하던 영역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여성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여성 미술가들은 어떤 형태로 자신의 정체성과 전문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까. 이때의 여성 미술가들은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금기를 깨는 도전을 시작한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바비 인형 같은 몸매,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 조각 같은 미인이 아니라 주름살, 뚱뚱한 몸매, 늙어 처진 가슴 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피동체가 아니라 성적 욕구나 정체성, 개인의 취향을 포장하지 않고 드러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화상을 그리는 여자들>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의 금기와 권위에 맞서 자화상이라는 형태로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욕망을 자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저자가 미술사에서 '여성의 자화상을 독립된 장르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프랜시스 보르첼로 지음. 주은정 옮김/ 아트북스/ 25,000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아트북스, 2017


#여성의 정체성 찾기 #자화상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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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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