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외면할 수 없는 사각지대, 집요하게 지켜보는 작가

[김성호의 독서만세 122] 김봄 소설집 <아오리를 먹는 오후>

등록 2017.11.21 13:57수정 2020.12.2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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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리를 씹는다. 풋풋하고 상큼한 향이 입안을 휘돈다.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이는 맛 좋은 사과, 아오리를 먹는 오후는 아삭한 소리만큼 기분 좋은 시간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집어 든 김봄의 첫 소설집 <아오리를 먹는 오후>는 이 같은 상상을 시작부터 산산이 조각낸다.

소설 속 주인공은 흔하지만 아마도 자주 만나보지는 못했을 이들이다. 남겨지고 버려졌으며 잊히고 지워진 아이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른 이들의 마음 한 칸 얻지 못하는 그런 아이들이 이 단편집의 주인공이다. 소설 가운데 이들을 만난 독자는 기대했던 상큼함 대신 사과식초 같은 시큼함을, 때로는 아직 익지 않은 풋사과의 떫은 맛을 마주할 것이다.


'무정' '림보' '내 이름은 나나' '아오리를 먹는 오후' '문틈' '절대온도' '오! 해피' '맨홀'까지,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에서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위험 가운데 방치되거나 이용당하며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다.

사회가 마련해 둔 선로를 탈선한 아이들이 위태롭게 헤매는데도 주변의 어른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처연한 무엇이다.

사회뉴스에서나 만났던 십대들의 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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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리를 먹는 오후 책 표지 ⓒ 민음사

폭주족이 되어 왕복 팔차선 도로를 역주행하고 후미진 공공화장실에서 여자아이를 강간하듯 범하며 눈에 띄는 약자를 끝도 없이 두들겨 패는 아이들. 가출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살해하고 모텔방 화장실에서 몰래 아이를 낳고는 다시 어딘가로 자리를 비우는 아이들의 모습. 이는 모두 '아오리를 먹는 오후'라는 제목에서 상상한 장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이와 같은 사각지대를 독자의 눈앞에 들이밀며 방치된 치부를 목격할 것을 권한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책 끝에 실린 작품해설 '아오리의 맛, 아이러니의 맛'을 통해 '작가가 입이 없는 화자들을 자신의 서사적 공간 안에 불러들인 데' 이 소설집의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실제 소설 속 화자들은 제가 처한 억울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알릴 길이 없으니 입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봄이 이들을 소설의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풀어낸 건 외마디 외침 밖에 따로 토할 게 없는 아이들의 원과 한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어느덧 등단 7년째가 되는 작가가 집요하게 파고든 아이들의 문제는 모두가 알고 있듯 아이들만의 잘못으로 탄생한 게 아니다. 이들,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된 자들인 소설 속 아이들에겐 책 전체를 가로질러 보아도 한 차례 주변의 따뜻한 부름을 찾을 수 없다.

부모는 없거나, 있더라도 오로지 제 삶에만 관심이 있는 존재다. 아이들은 소설 안 어른들에겐 먼저 말을 건넬 수도 없고 건네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점차 세상 밖으로, 밖으로만 밀려난다.

사각지대 집요하게 지켜보는 작가, 김봄

부모의 무관심으로, 세상과의 싸움에서 지칠 대로 지쳐서 세상 밖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상황은 작가의 덤덤한 문장을 통해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소설 가운데선 몇 건의 살인과 몇 건의 강도·강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불법이 저질러지지만, 이 가운데 진실이 드러나고 처벌이 이뤄지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처벌마저도 사회의 관심으로 여겨질 만큼 이들이 사는 세상은 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판 아래 곰팡이 슨 시멘트 바닥을 대하듯 불편해서 금방 다시 덮어버리고 싶은 감정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런 풍경을 묘사하길 멈추지 않는 작가의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지진으로 일주일 미뤄진 수능시험을 둘러싸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잡음은 한국사회의 아이들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로지 대학입학을 위해 거의 모든 아이가 십이 년 동안 매달려 공부하고, 그 여정에서 수도 없이 많은 낙오자를 생산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하물며 일찌감치 탈선해버린 아이들이 기댈 곳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책장을 덮으며 표지에 적힌 제목 <아오리를 먹는 오후>가 <아오리가 먹히는 오후>로 읽힌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오리를 먹는 오후 / 민음사 / 김봄 지음 / 2016. 09. / 12,000원>

아오리를 먹는 오후

김봄 지음,
민음사, 2016


#아오리를 먹는 오후 #민음사 #김봄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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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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