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뱀론'으로 성폭력을 지지하는 당신에게

[게릴라칼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 '명시적 동의' 법안 참고해 '예스 법' 만들어야

등록 2017.11.21 17:23수정 2017.11.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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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간범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간범을 편들면서 성폭력이 지속되도록 힘을 보태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꽃뱀론'으로 대표되는, 한국형 '피해자 때리기' 집단문화가 그렇다.

이 고약한 집단 언어폭력은 단지 성폭행이라는 강력 범죄의 본질을 흐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성폭력에 대해서 말하기'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하나는 신고를 권장함으로써 '성범죄는 반드시 처벌 받는다'는 점을 사회에 각인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객관화 함으로써 피해자(생존자)의 회복을 돕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꽃뱀론'은 생존자의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성범죄를 비호하고 재생산하는 동시에, 당사자의 상처를 깊게 만드는 이중적 결과를 낳는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성폭력 생존자의 '신상'을 터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성폭력을 옹호하는 정도를 넘어서 동참하는 행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이 걸핏하면 '꽃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가짜 피해자'가 무고한 이에게 성범죄의 누명을 씌울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교통사고를 당해 실려온 사람에게 '혹시 자해공갈단 아니냐'고 묻는 것이 정상일까?

'자해 공갈단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을 지 모르지만, 2014년 기준으로 보험사기로 지급된 누수액은 5조 5천억 원에 이른다. 지급된 보험금 총액의  5.5%를 넘어서는 비율이다. 이중에서 살인, 방화, 고의충돌 같은 적극적 보험사기는 12% 정도고, 허위 진료나 입원 등은 이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과연 성폭행 허위 신고율은 이보다 높을까?

허위 신고 비율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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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그 말들. ⓒ PIXABAY


우선 한국의 강간 신고율 자체가 낮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보고서 <2013년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성희롱부터 강간에 이르기까지 6가지 유형의 성폭력을 겪은 사람들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비율은 1.1%에 불과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신고율이 높은 '심한 성추행'이 5.3% ('가벼운 성추행'은 없다), 강간 및 강간미수의가 고작 6.6%였다. 생존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은 주된 이유는 '신고를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증거가 없어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등이었다. 성범죄에 대한 공권력의 적극적 개입과 섬세한 배려, 신고 권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 그렇다면 허위 강간의 신고율은 어떨까? 한국에서 이와 관련한 통계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성폭행의 경우 신고율 자체가 낮은 만큼 허위 신고도 드물 수밖에 없다. 이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데,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허위 신고를 전체 강간 신고율의 2~4%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결국 성범죄 생존자에게 '꽃뱀' 운운하는 것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보험사기' 이야기를 꺼내거나, 응급실 환자에게 '꾀병 아니냐'고 묻는 것보다 몰상식한 짓이 된다. 통계적으로 강간을 허위로 신고할 확률은 고의로 사고를 유발할 확률의 절반 이하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꽃뱀' 운운하는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당사자가 상사의 술자리에 따라갔다거나, 카톡을 주고 받았다거나, 사건 후 뒤늦게 문제 제기를 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한국에 살면서도 사회적 위계의 억압을 경험하지 못한 희귀한 존재들일까, 아니면 그저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일까? <여혐민국> 저자 주한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거절해야 했다 하는 남자분들께는. 야근시키는 상사한테 곧바로 따지시죠? 술자리 늘 거절하시고요? 그런데 성매매도 어쩔 수 없이 분위기 맞춰야 해서 같이 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던데, 그것도 따박따박 대드셨죠? 임금 체불이면 바로 그날 문자 넣으시고 노동청에 고발하시고요? 초과 수당 안 들어와도 곧바로 인사팀장 카톡 메시지로 따지시겠죠? 

"자신은 성매매 같이 가자는 것도 거절 못하고, 야근 시키는 것도 거절 못하면서, 술 같이 먹자고 윗사람이 불러서 따라갔다는 여직원은 왜 욕하나요. 교육 담당이었던 하늘같은 선배가, 나쁜짓한 놈 처벌 도와준 사람이 이번에도 술자리에서 지켜줄 거라 믿은 건 왜 욕하는지? 왜 곧바로 고발 안 했냐고, 왜 카톡에 답했냐고 몰아세울까요."

발언에 책임지지 않는 '꽃뱀론자'

지난 6월, '호식이두마리치킨' 전 회장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한 시민이 나서서 현명하게 대처한 탓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가해자가 여직원을 호텔로 끌고갈 때, 그는 마치 피해자를 아는 사람인 듯 다가가 말을 걸며 구출해 낸 것이다.

포상을 해도 모자랄 이 시민에게, 인터넷에 똬리를 뜬 '꽃뱀론자'들은 가혹하고 몰상식한 발언으로 도배를 했다. 기막히게도, 이들은 도움을 준 시민과 생존자를 '꽃뱀 사기단'으로 몰았다. 이들은 감시카메라에 잡힌 짧은 동영상을 '증거' 삼아, 자신들의 어두운 상상력을 토대로 소설을 썼다. 성폭력을 당하고 있던 사람에게 손길을 내민 시민을 도리어 희롱의 대상을 삼은 것이다.

그 억울한 시민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법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경찰에 제출하기 위해 악성 댓글을 추렸다. 이것이 A4용지로 100장 분량이나 됐다. 하지만 경찰은 고소장을 받아주지 않았다. 누리꾼들이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고 '저 여자들'이라는 포괄적 표현을 썼기 때문에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경찰은 '꽃뱀 사기단'이 복수의 지칭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법적 조치는 둘째 치더라도, 선행을 하고도 조롱과 비난을 받는 사회에서 누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겠는가. 이렇듯 '꽃뱀론자'들의 언어폭력은 성폭력 생존자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은 그렇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뒤에도 반성하기는커녕,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기 바쁠 뿐이다. 불행히도, 이런 환경에서 한국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 이른바 '갑질 성폭력' 비율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범죄는 2012년 341건에서 2014년 449건, 2016년 545건으로 증가해 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직장 내 성폭력이 늘고 있을 뿐 아니라, '2차 가해'의 괴롭힘까지도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7년 7월에 발표한 조사를 보면, 성폭력을 당한 뒤 파면이나 해고 등 신분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따돌림, 폭행, 폭언, '꽃뱀' 꼬리표 등 정신적 학대를 겪은 비율이 절반이 넘는 57%였다. 그로 인해 10명 중 7명이 회사를 그만 두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성폭력 뿐 아니라, 2차 가해까지 철저히 책임을 묻고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2차 가해'는 직장 내부만의 문제가 아님을 최근의 여러 사건들이 보여주었다. 인터넷에서 '갑질'을 검색하면 짙은 사회적 분노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직장 성폭력 사건에는 '꽃뱀' 딱지가 붙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갑질'은 손가락질하면서도, '갑질 성범죄'는 싸고도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에서 유독 느리게 가는 시계

"여성이 남자와 술을 함께 마시거나, 함께 밤길을 걷거나, 심지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녀가 바닥에 눕혀져 성폭행을 당하고 싶다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강간은 언제 시작되는가" <타임>, 1991. 6. 3.

1991년, 즉 지난 세기에 <타임> 편집장이 말한 이 상식은 한국에서는 21세기에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헬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성관념도 조선 시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앞에서 '꽃뱀 신화'의 허구성을 통계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 본래 고정관념은 이성에 속한 것이 아니니, 합리적 설명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꽃뱀이 두려운 사람들을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안 그래도 희귀한 꽃뱀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는 획기적 대책이다.

2015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 '명시적 동의(affirmative agreement)' 법안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강간 여부를 판단할 때 '거부했는가'가 아니라 '합의했는가'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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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의 허위신고율이 매우 낮다는 것이 세계적 상식인 반면, 한국에서는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꽃뱀' 딱지를 붙이는 폭력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 법무부 공식 웹사이트의 '자주 받는 질문' 페이지. 성폭력을 허위로 신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한국의 성폭행 신고율이 미국보다 훨씬 낮고, 피해자 보호 인식도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허위 신고율은 미국보다 현저히 낮을 것이다. ⓒ 강인규


과거에는 '거부 의사'가 강간 여부를 판단하는 법적 기준이었다. 다시 말해,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표현을 하는 순간 성행위는 '성관계'가 아니라 '강간'이 되는 것이다. 이는 여러 문제를 발생시켰다. 예컨대, '거부 의사'의 해석을 놓고 시각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상대가 동의하지 않았어도 납득할 만한 거부 표명을 하지 않으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간주되기 쉬웠다.

하지만 새 법은 상대가 '성관계에 동의한다'는 분명한 언어적 표현이 있어야만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된다. 과거에는 '거부하지 않으면 합의'로 간주했으나, 이제 '동의하지 않으면 강간'으로 바뀐 것이다. 이는 모호한 해석의 영역을 제거함으로써 '꽃뱀'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이 법이 도입되면, 억울하게 가해자 누명을 쓸 일도 거의 사라지게 된다. '상대가 말로 동의했는가' 하나만 따지면 되기 때문이다. 혐의자가 상대에게 '무슨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느냐'느니, '나를 보고 웃지 않았냐'느니, '꼬리를 치지 않았냐'느니 하는 비법률적 용어로 자신을 변호해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게 된다.

나는 이 법을 한국에 도입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한국의 수준은 '명시적 동의'는커녕, (캘리포니아가 버린) '거부의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아직도 한국 법원은 '거부 의사를 표했는가'가 아니라, '적극 저항했는가'를  강간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생각이다. 마침 <뉴욕타임스>가 고등학교 성교육 시간에 이 법안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다룬 기사가 있어, 그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배울 점이 있다면 고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생에게라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성폭행 #깁질 #허위신고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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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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