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박근혜의 공통점, '국정원'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이승만의 국정원 자금 전용 의혹

등록 2017.11.21 21:25수정 2017.11.2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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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이승만 전 대통령도 '국정원' 자금을 불법 전용했다는 의혹을 샀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승만·박근혜 둘 다 정보기관 자금을 눈먼 돈으로 생각했다는 말이 된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구성된 정보기관으로서, 우리 기억에 명확히 남아 있는 것은 5·16 쿠데타 직후의 중앙정보부다. 중앙정보부는 쿠데타 41일 뒤인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출범했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억으로 보면, 그 전에는 육군본부 특무부대 같은 군대 정보기관밖에 없었다. 특무부대는 지금의 기무사령부다.

하지만 1961년 이전에도 국정원 같은 민간인 정보기관이 있었다. 매우 짧은 기간 존속한 탓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뿐, 그런 기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수립 이전부터 '민간인 정보기구' 구상했던 이승만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전부터 민간인 정보기구를 만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0월 육군 제14연대 2천여 명이 제주 4·3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승만은 자신에 대한 군부의 충성심을 100% 신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대 정보기관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낼 수 없었다.

이승만은 군인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거의 미국과 미군정의 지지에 의존할 뿐이었다. 물론 지지도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해방 직후 최초의 대통령이 된 것 치고는, 또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국부로 추앙되는 것치고는 지지율이 높지 않았다는 말이다.

분명한 점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다가 피살당한 여운형·김구 만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었으니, 자기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군대 정보기관에 대해 신뢰를 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만든 전략사무국(OSS)이 1945년 10월 1일 중앙정보국(CIA)로 발전한 것도 이승만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한 이승만이 그런 정보기관을 한국에도 두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약이 있었다. 인기가 높지 않은 점도 제약이 됐지만, 문화적인 사정도 제약이 됐다. 공식적인 민간인 정보기관을 두는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전통에 없는 것이었다. 1902년 고종황제가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란 정보기관을 설치한 적은 있지만, 이것은 비밀 기구이지 공식 기구가 아니었다. 외형상으로는 언론사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이 경험한 것은 왕정통치뿐이었다. 왕정통치 하에서 군주는 하늘의 대리인이었다. 그런 신성한 대리인이 정보원들을 곳곳에 심어두고 남의 뒷조사나 하는 것은 군주의 위신을 구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군주들은 공식적 정보기관을 두기 힘들었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이승만의 민간인 정보기관 설치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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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집인 이화장의 집무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다. 대학로 혜화역 인근이다. ⓒ 김종성


그렇지만 이승만은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다. 뜻을 관철시킬 목적으로 조심스레 추진해 나갔다. 당시 주한미군 내부에 정보참모부(G-2)와 방첩대(CIC) 같은 군대 정보기관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 기구들과 협조해 민간인 정보기관 구성에 착수했다. 정부수립 이전 일이다. 

이승만이 구상한 정보기관 명칭은 대한관찰부(大韓觀察府)였다. 끝에 부(府)가 붙었다. 지금 우리는 관청 명칭 끝에 부(部)를 쓰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部보다 府의 위상이 높았다. 이승만을 포함한 당시 정치인들은 조선시대 문화에 익숙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한자 사용에는 조선시대 문화가 배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당시에 일반 행정부서 명칭에는 部가 쓰였다. 그러면서도 대한관찰부에 府자를 사용한 것은, 이 기관에 높은 위상을 부여하고자 하는 이승만의 의중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한관찰부와 사정국 사라진 자리에 남은 예산 3억

대한관찰부에는 1948·1949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2억 3천만 원이 책정했다. 또 대한관찰부 정보요원 1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시점은 1948년 7월이었다. 이들은 군인이 아닌 경찰이나 민간인 중에서 선발됐다.

대한관찰부 외에도 이승만이 준비한 공식 정보기구가 더 있다. 사정국(司正局)이 그것이다. 대한관찰부와 사정국의 관계를 놓고 학계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두 기구가 상호 별개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대한관찰부가 사정국으로 승계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두 이야기 모두 맞다. 1949년 1월 22일자 <서울신문>에 따르면, 두 기관 출범 전에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관찰부는...... 비행을 정탐해 감봉·정직·파면시켜 법의 처단을 받게 할 수 있고, 이 밖에 사정국은 미 CIC와 같은 기관으로 대통령 직속 아래 모든 정치관계 기타를 정탐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대한관찰부와 사정국은 서로 별개다.

그런데 같은 해 3월 6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사정국 직제 공포"라는 제목 하에 '관찰부를 사정국으로 개칭'이라는 부제목이 달린 기사를 내보냈다. 대통령령 제61호에 따라 사정국이 설립되면서 대한관찰부 이야기는 없었던 일이 된다는 기사였다. 이승만은 사정국이 CIC 같은 기관이라고 했지만, 이 신문에서는 CIC와는 다른 기관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승만 기자회견 이후로 사정국의 성격이 달라졌던 것이다.

위의 두 신문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관찰부 및 사정국 설립이 함께 추진되다가 대한관찰부는 무산되고 사정국으로 기능이 통합됐다. 그랬기 때문에 두 기구가 서로 별개였다는 이야기도 맞고 관찰부가 사정국으로 계승됐다는 이야기도 맞게 된다.

사정국만 설립되고 대한관찰부는 무산된 이유가 있다. 대한관찰부도 사실상의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설립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국회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의를 받지 못한 이유는 1949년 1월 16일 수원 사건 때문이다. 

이날 대한관찰부 요원들이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원들을 상대로 공권력을 행사했다. 공식 출범 전에 공권력부터 과시한 것이다. 이들은 청년단 단원들을 대통령 암살 음모자로 몰아세우며 폭행을 행사하고 고문까지 감행했다. 여성들에 대해서는 성폭력까지 자행했다. 이로 인해, 비밀리에 진행되던 대한관찰부 설립 작업이 언론에 노출되고 비판이 쏟아졌다. 이때 이승만이 해명 차원에서 기자회견을 연 게 위의 1949년 1월 22일자 <서울신문>에 실렸다.

"사정국 경비 잔액 3억 원 전용해서 쓰게 될 것"

우여곡절 끝에 대한관찰부는 무산되고 사정국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사정국은 공식 출범 3개월 뒤인 같은 해 6월 9일 폐지됐다.

대한관찰부가 사정국에 흡수됐으니, 대한관찰부 예산 역시 사정국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국도 폐지됐으니, 예산 상당부분이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이 돈에 손을 댔다는 의혹을 받았다. 공식 정보기관 설립이 무산되자 사설 정보기관을 만들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정혜천이란 인물을 내세워 TIS란 사설 정보기관을 만들었다. 이범석 국방장관이 만든 통일사란 사설 정보기관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만든 기관이었다. 한국 정보기관 역사를 정리한 정규진의 <한국정보조직>에 따르면, 정혜천이 TIS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정국 자금이 TIS로 넘어갔다는 의혹이 있었다.

이 책에서 인용한 1950년 2월 15일자 <연합신문> 보도에 따르면, 정혜천은 부하들에게 "사정국 경비 잔액 3억 원을 전용해서 쓰게 될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이승만이 사정국 경비 잔액을 국고에 환수시키지 않고 사설 정보기관 창설을 위해 전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TIS의 금전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수선사학회가 발행하는 <사림> 제36호에 실린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의 조직과 활동'에도 나타난다. 이 논문은 1950년 2월 18일자 <국도신문>을 근거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사정국이 폐지될 무렵인 1949년 5월, 퇴직 군인 신치호와 정혜천은 '대(對)이북 공작'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승만과 협의하여 통일사를 설치했다. 이 조직은 10월경 해체되었지만, 정혜천은 다시 '통일사'의 영문 이니셜 세 글자를 따서 TIS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통일사는 사정국의 후계 조직임을 주장하면서 협박과 강요, 탈취를 통해 자금을 모았고, 그 피해액이 2억여 원에 달했다."

사정국 경비 3억여 원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전용한 게 사실이라면, TIS가 불법적으로 보유한 금전은 5억을 넘게 된다. 1945년에 쌀 20kg이 0.18원 정도였다. 18원이 아니라 0.18원 정도였다. 그 후로 화폐 개혁들이 있었으므로 이 금액을 지금 쌀값과 곧바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1945년에는 0.18원으로 쌀 20kg을 살 수 있었으니 이런 시대에 돈 5억 원이 얼마나 컸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거액이 이승만의 사설 정보기관으로 불법 전용됐다는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껏 정보기관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민주적 통제는 물론이고 국회의 통제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정보기관은 직무 활동에서뿐 아니라 자금 문제에서까지 성역이 되었다. 이런 불합리가 용인되다 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원 특활비를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다른 용도로 전용했다는 의혹을 사는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정원 특활비 #이승만 #대한관찰부 #사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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