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데?' 타르트 대신 남편이 사 온 것은...

[단짠단짠 그림요리] 타르트

등록 2017.11.21 23:27수정 2017.11.2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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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원고지 열 장 내외의 짧은 글을 주로 쓴다. A4용지 한 장이 채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서른 장 안팎 분량의 글을 여러 편 써야 할 일이 생겼다. 기한은 내년 초. 갑자기 호흡이 긴 글을 쓰려니 막막했다. 컴퓨터 빈 화면만 열어 놓고 첫 문장을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세 달이 흘렀다. 글 한 편 쓰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생각해보면 분량이 늘어난 것만 문제는 아니었다. 최근 낮잠을 자는 일이 부쩍 잦다. 집에서 혼자 글을 쓰니 일을 한없이 미뤄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인터넷을 뒤져 유명 입시 학원 강사들의 공부법과 자기관리법 강의를 찾아 들었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몇 가지 미션을 정했다. 우선 오전 9시엔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두 시간 동안 글을 쓰기로 했다. 이를 지킨 날엔 달력에 스티커를 붙여 나의 노력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적절한 보상도 필요하다. 내겐 아침에 일어나는 것보다 긴 글을 한 편 완성하는 게 시급했다. 그래서 글을 한 편 쓸 때마다 평소엔 잘 하지 못하는 어떤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기로 했다.

영화를 볼까. 이건 너무 흔하다. 옷을 살까. 쇼핑은 시간도, 돈도 많이 드니 안 좋겠지. 자연스레 먹는 쪽으로 생각이 갔다. 좋아하지만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것, 비싸지 않고 아주 흔하지 않고 과하지 않으면서 보상이 되기에 충분한 것, 뭐가 있을까.

타르트 ⓒ 심혜진


얼마 전 동네 빵집에서 본 타르트가 생각났다. 아몬드와 피칸, 마카다미아 같은 견과류가 소복하게 올라간 것이었다. 시럽에 졸인 견과류에 윤기가 반드르르 도는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가격은 한 개 삼천 원.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끼니를 대신할 것도 아닌데 좀 비싸게 느껴졌다. 몇 번 들었다 놨다 망설이다가 결국 원래 사려던 식빵만 들고 빵집을 나왔다.

그 타르트 정도면 보상으로 적절한 것 같다. 단 한 번도 내 돈을 주고 사먹어 본 적 없는 타르트를 사왔다. 책상에 올려두니 고급스런 브로치처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어서 글을 쓰자, 저 사치스런 보석들을 입 안 가득 넣어보자!

생각만큼 글은 빨리 써지지 않았다. 입맛만 다신 지 3일째 되던 토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타르트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자 아래에 비닐이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타르트 부스러기 잔해들과 함께.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범인은 어젯밤 술과 함께 불금을 보내고 새벽에 들어온 남편이다. 그에겐 술에 취해 집에 오면 아무 것이나 집어 먹는 버릇이 있다. 평소 좋아하지 않던 것도 우적우적 먹어 치운다. 그러곤 기억을 못 한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내 타르트 왜 먹었어! (이 자식아!)"
"어? 안 먹었는데…"

남편은 중얼거리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 타르트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 알코올이 기억을 싹 지운 걸까. 서운한 맘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주말 내내 남편에게 타르트 타령을 했다. 어느 날 퇴근하는 남편 손에 제과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거 사왔어."

'그거'라니? 뭔가 불길했다. 상자 안에 든 건 어이없게도 앙금이 들어 있는 밤만주였다.

"이게 아니잖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뭐가 비슷해."
"사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

에휴, 이 주정뱅이를 어쩌면 좋을까.

다음 날 나는 타르트를 다시 사왔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타르트는 아직 책상 위에 있다. 곰팡이나 다른 균들에게 타르트를 빼앗기면 큰일인데. 조바심이 나지만 먹을 순 없다. 글을 쓰기 위해 타르트를 샀는데, 이제 타르트를 먹기 위해 글을 써야 할 판이다. 오늘 밤에는 타르트를 먹고야 말리라! 어제와 똑같은 다짐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단짠단짠 그림요리 #타르트 #밤만주 #요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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