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머물렀던 주막에 가다

등록 2017.11.29 15:30수정 2017.11.2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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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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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1년 11월 23일 전남 강진 땅에 유배를 와 처음 머물렀던 주막집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4년간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이 기거하던 주막방에 붙여 두었던 마땅히 해야 할 일 네 가지가 사의제((四宜齊)다. 또한 사의제는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 중후한 행동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이 있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 하되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되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말이 많으면 곧바로 과묵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중후하게 하며 중후하지 않으면 중후하게 하라.

다산은 1805년 4년간 머물던 사의제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겨 1년을 머물며 6제자를 교육한다. 이어 1806년 가을 이학래 자택으로 옮겨 와 2년여를 교육과 연구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 이학래는 다산의 6제자 중 막내였다. 다산은 이곳에서 실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도암 귤동마을 초당에서는 1808년부터 유배가 해제되던 1818년까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다산초당은 윤단의 산정으로 윤 씨 가문의 후손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1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으며 현재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윤단의 여섯 손자를 포함해 초당 18제자를 교육했다. 또한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권의 저술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완결 지었다.

#모이 #강진군 #다산정약용 #사의제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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