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08 18:56최종 업데이트 17.12.15 08:51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강광보입니다. 지금 막 끝났어요. 뭐 1분도 안 걸리는 구만. 하하하"
"축하드려요."
"언제 내려옵니까? 밥이라도 먹어야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려와요."
"하하. 좋습니다. 하하하."


한바탕 웃고 난 뒤 조만간 내려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랬다. 그의 진실을 결정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지난 31년을 싸웠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친구를 잃었고, 재산을 잃었고,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2011년 겨울, 그를 처음 만난 건 제주시내의 관광버스 회사 차고지 사무실이었다. 버스가 즐비한 차고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야간근무를 한다고 했다. 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할 수 있으니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만나자고 해서 좋다고는 했지만 밤 11시는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일회용 커피 두 잔을 내어 주었다.

"야간에 근무를 하시니 불편하시겠어요."
"불편하긴요. 가족 없이 혼자 사니 상관없어요."

사실 이 시간이 조사관으로서 가장 힘들고 불편하다. 언제 끌려갔는지, 왜 끌려가게 되었는지,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그에 대해 물어야 하는 타이밍을 잡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가끔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때가 있는데 바로 그날이었다.

"'지금여기에'라는 단체가 저희같이 억울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가능하면 재판을 받게 해주면 더 좋겠지만 그거야 내 욕심이고..."

상대방이 운을 먼저 뗐다. 앞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제주에서 일본, 다시 제주로... 기구한 인생 

모슬포 해녀식당을 찾아가는 강광보 ⓒ 변상철


제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공부에 크게 흥미를 못 느꼈다. 4.3 때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들과 부친을 따라 일본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모친은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나무랐다. 하지만 끼니도 하나 해결 못하는 가난이 너무나도 싫었다. 더욱이 밀항을 통해 하나 둘 일본으로 가는 친구들을 보면 제주는 감옥 같았다. 방법만 있다면 부친이 살고 있는 일본에 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랍장에서 부친이 살고 있는 일본 주소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남편의 연락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고 떠난 남편의 소식을 자식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부친에게 편지를 썼다.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편지를.

1960년대 초, 부친이 보냈다는 재일교포가 집으로 찾아왔고,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따라 밀항선을 탔다. 밀항선을 타기 전에 물도 음식도 먹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3일 동안 대소변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목선 선실에는 20명이 넘게 탔다. 물고기를 넣어두는 곳에 사람을 밀어 넣어,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불편하고 힘들었다. 파도로 배가 출렁거릴 때마다 멀미로 인한 토사물과 소변 냄새가 진동을 했다.

3일간 지옥 같은 밀항선 바닥을 기어 나와 보니 오사카의 어느 항구였다. 부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친과 행복한 일본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집에 도착해서 곧 깨졌다. 그곳에는 그보다 어린 아이들과 일본 부인이 있었다. 일본에서 그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10대의 그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현실이었다. 얼마 후 부친의 집에서 가까운 숙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당시 숙부는 친북단체로 분류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속해 있었다.

"제가 밀항해서 일본에 왔잖아요. 1964년경인가. 하루는 가방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이 들이닥쳤어요. 내가 밀항법을 위반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사카 경찰서에 연행되었죠. 근데 숙부가 날 북송선에 태운다는 조건으로 보증을 서서 풀어준 거예요. 난 북한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서 그 길로 동경으로 도망쳤죠."

그렇게 북송을 피해 일을 하던 그는 그곳에서 제주 교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아이 2명을 낳았다. 그러나 밀항인의 신세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출생신고 할 수 없었다.

"그때 오사카의 금강학원이라는 학교가 생겼어요. 민단(재일본국대한민국민단)에서 만든 민족학교였죠. 거기에서 아이들을 받아준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곳에 입학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던 그는 1979년 5월 다시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한국으로의 강제추방이 결정되어 일본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 해 여름 제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들어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제주경찰서에서 날 붙잡아 갔어요. 그게 아마 79년도 8월인가 됐을 거예요. 숙부가 조총련이니 간첩지시를 받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북한에 가서 김일성도 만났다는 걸 인정하라고 고문을 엄청 당했어요. 정확히 65일을 갇혀서 맞았네요."

그런데 어느 날 고문이 잦아들었다. 그리고는 풀어준다고 했다. 수사관이 하는 말이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대통령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사건이 딱 완성되는 거였는데. 에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그날 그는 풀려났다.

"딸이랑 애 엄마 데려와서 똑같이 고문하겠다고..."

그리고 7년이 지난 1986년 1월, 그는 제주보안대 수사관들에게 다시 연행되었다. 조사실에 들어가니 7년 전 제주경찰서에서 수십 번 같은 내용으로 작성했던 수사기록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그 서류들을 보는 순간 그는 짐작했다. 보안대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할지를...

"그래도 며칠을 버텨봤지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를 때리고 잠 안 재우고 하는데 정말 버티기 힘들더라구요. 한번은 수사관이 나한테 물어요. 너 일본에서 초밥 많이 먹었지 하고 물어요. 그래서 네 라고 했더니 그럼 초밥 생각이 나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의자에 꽁꽁 묶더니 와사비를 잔뜩 섞은 물을 코에 들이 붓는 겁니다. 아. 정말 힘들더만요. 그래서인지 와사비가 좀처럼 싫어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근데 가장 힘든 게 뭔지 압니까?"
"전기고문 같은 거 아닌가요?"

어설픈 나의 대답에 그는 웃었다.

"차라리 총으로 쏴 죽인다면 그래도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딸자식들하고 애 엄마 끌고 와서 나랑 똑같이 옷 벗기고 고문하겠다는데 그건 정말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흑."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70세가 훌쩍 넘은 그의 세월도 그날의 상처가 진물처럼 눈물 되어 흐르는 건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새벽이 되어 퇴근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시 도련동에 있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지어진 작은 집이었다.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이었다.

"이건 누구예요?"
"아, 그거요.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 사진이에요. 배고프고 학교를 못 간다는 아이들이라서 매달 조금씩 후원하고 있어요. 우리 애들이라 생각하고 후원하면 의지도 되고...."

한 달 80만 원 벌이에 5만 원을 후원하며,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저 먼 아프리카 아이들을 대신해서 달래고 있었다.

"자녀들과는 어떻게 지내세요?"
"간첩 애비 때문에 자식들 올바로 크지도 못했는데 애들이 날 찾아오길 바라면 염치도 없는 놈이지."

그는 애꿎은 바닥만 긁고 또 긁었다.

2012년 봄, 나는 그와 함께 일본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를 포섭하고 지령을 내렸다는 '상부간첩'들이 모두 일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사카에서 어렵게 친척들의 주소를 찾아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강광보씨에게 지령을 내린 적도, 간첩행위를 한 적도, 북한을 찬양한 적도 없었다는 진술을 확인했다. 아울러 그곳에서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광보씨가 조총련 회원이라고 알고 있던 숙부를 포함한 친척들이 모두 조총련이 아니라 민단(대한민국을 지지하며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 조직) 소속이었던 것이다.

친척들은 단지 4.3의 피해자로서 자신의 가족과 형제를 죽인 한국정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쿠데타 세력의 정권을 비판했던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정권은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31년 만에 다시 찾은 해녀식당

모슬포 해녀식당에서 먹었던 갈치조림. 평소와 다르게 엄청난 식욕을 보였던 강광보 님 ⓒ 변상철


그리고 지난 2017년 11월 8일, 그는 광주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우리는 그의 무죄를 축하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 그리고 그가 한턱내겠다고 했다.

"모슬포로 갑시다. "

모슬포! 이 계절의 모슬포는 방어철이 아니던가. 방어회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모슬포를 향했다. 모슬포에 들어서서 모슬포 항 쪽에 다다르니 그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그리고는 모슬포 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차를 세우라고 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그곳에 '해녀식당'이란 간판의 식당이 있었다. 그가 식당에 들어서며 말했다.

"내가 보안대 놈들한테 끌려와서 가파도라는 섬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가파도에서 나오면서 여기 해녀식당이란 데서 그 놈들이랑 밥을 먹었는데 이 식당이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식당에 들어가자 아주머니 한 분이 오신다. 자리에 앉아 갈치조림을 시키면서 물었다.

"아주머니 이 식당 언제 생겼어요?"
"우리 식당 생긴 지는 37년 됐수다게."
"여기 다른 해녀식당은 없습니까?"
"모슬포에서 해녀식당이란 간판을 달고 장사한 건 우리 집 한 집밖에 없수다게."

그의 눈이 흔들렸다. 31년 전 이곳에서 보안대 수사관들과 밥을 먹었던 그 식당이 맞았다. 오래된 냄비에 나온 살집 두툼한 갈치조림과 국물 시원한 몸국을 먹는 내내 입과 마음이 모두 즐거웠다.

"31년 전에는 음식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알지 못했는데, 오늘은 갈치가 아주 맛있구만. 하하."
"어째 입에 잘 맞으세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교도소 있을 때 딱 두 가지 못 먹는 게 있어어요. 하나는 없어서 못 먹는 거, 그리고 또 하나는 안 줘서 못 먹는 거, 그거 두 가지만 빼고 다 먹을 줄 알아요."

우린 또 한바탕 웃었다. 그의 마음에 여유의 공간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것 같았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 그는 주인아주머니에게 그의 사연을 이야기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처럼 승리의 V자를 그리며 사진 찍는 그의 모습은 그를 고문했던 그 옛날 보안대 수사관들을 조롱하는 듯했다. 국가폭력으로부터의 생환을 그는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가족들과 다시 이 곳을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강광보님의 무죄를 축하함수다. 31년간 속았수다예."

모슬포 해녀식당 주인과 만나 반갑게 기념사진을 찍었다. ⓒ 변상철


광주고등법원 제주재판소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난 강광보 님과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지금여기에' 제주 회원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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