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승리에 자만하지 말자" 냉정했던 민청련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21]

등록 2017.12.11 14:03수정 2017.12.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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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에도 차분했던 4차 총회

총선 직후인 3월 21일, 민청련 4차 총회가 열렸다. 4차 총회는 3차 총회와는 달리 외부에 공개된 행사로 치러지지 않았다. 2·12총선의 야당 승리로 운동권은 전반적으로 고무됐지만, 민청련은 환호보다는 부담스러운 숙제를 안게 됐다는 분위기였다.

숙제의 하나는 전두환 독재체제가 건재한 가운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은 언제든 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자중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일이었다. 또 하나의 숙제는 민청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한 탄압의 칼날이었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4차 총회에서의 조직 체계상 변화는 이명준 부의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고 그 자리를 운영위원장인 최민화가 이어받는 정도였다. 운영위위원장은 김희택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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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1일, 집회에서 연행되는 김희택 운영위원장 ⓒ 민청련동지회


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85년도 사업보고를 하면서 다가올 시기가 민청련이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그것은 총회 결의문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선거과정에서의 민중의 승리를 전면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반대하여야 한다. 따라서 민중, 민주 주체세력의 발전을 등한시하고 승리감에 젖어 치열성을 둔화시키는 운동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관념적 장기론에 빠져 준비론으로 몰락될 수도 있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 삶의 고통의 가중과 민중생활투쟁의 치열화 앞에 우리는 모두 옷깃을 여미면서 운동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부문운동 상호간의 작은 차별성을 해소시켜나가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 

총회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목동 재개발을 하면서 발생한 철거민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목동문제연대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다가올 5월 투쟁에 대비해서 최민화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단일대오 민통련의 탄생
 
한편 총선 이후 제도권의 정치 공간이 활성화되자 운동권 내부에서도 스스로를 정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총선 결과 집권 세력이 정치적 타격을 받았으므로 반사적으로 반대 세력에게 활동공간은 넓어질 것이었다. 또한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집권 측이 운동권에 대한 대탄압 공세를 펼 가능성도 있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첫걸음은 분리돼 있던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과 국민회의(민주통일국민회의)를 통합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대표자 그리고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이 참여한 가운데 통합 협상이 개시됐다. 주로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에 있는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실에서 약 1달 동안 진행됐다. 노동사목의 간사를 맡고 있던 윤순녀씨는 1960년대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시작해 평생 노동운동을 지원해왔고 재야운동에도 호의적이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협상은 잘 진전되지 않았다. 논점은 국민회의 측을 한 편으로 하고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다른 한 편으로 해서 형성됐다. 첫 쟁점은 연대운동의 수준을 협의체로 할 것인지 연합체로 할 것인지였다. 협의체로 하자는 것은 통합기구의 지도력보다는 개별 단체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던 반면 연합체로 하자는 것은 강력한 지도력을 갖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즉 이는 운동 발전의 성과를 부문운동의 강화에 둘 것인지 연대기구에 둘 것인지의 문제였다. 연대기구의 지도력을 집단지도체제로 할 것인지, 단일지도체제로할 것인지도 같은 문제였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각 부문운동의 대표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있었다. 즉 민청련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조직된 단체들이 통합기구에 대표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통합기구 자체가 이러한 조직 대표성의 원칙 아래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국민회의 측은 현실적으로 그러한 조직노선을 반영한 기존의 민민협 운동이 한계를 보였다는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선언적 의미로 부문운동을 강조하되 현실적으로는 개인 명망가들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기구를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민청련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회의를 마냥 끌 수는 없었다. 결국 조직운동 대표성을 주장하는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배제한 채 일단 통합단체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명칭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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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1985년 3월 29일, 분도빌딩에서 통합 결성대회가 열렸다. 기존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중앙위원 1백여 명이 참석한 회의는 "2·12총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여 범민주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족통일운동의 지속적 전개를 위해 두 단체가 조건 없이 통합할 것"을 결의했다.

이렇게 결성된 민통련의 정체성은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운영하는 단체"였으며 "지도적 민주 민권 운동가를 포괄하면서 전국적 지부 형성을 통해 국민적 대표성을 획득해 나갈 것"이었다. 특히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과는 구별되는 순수 재야 양심세력의 결집체"라고 규정했다.

지도체제는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와 김승훈 신부를 선출했다. 이렇게 보면 민통련은 민민협과 국민회의 중 국민회의에 보다 가까운 조직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 명망가들이 갖는 여론 파급력을 더욱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통련은 활동의 원칙을 민중노선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즉 "민중의 구체적 삶의 문제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을 조직화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통련은 출범 뒤 분규가 발생한 노동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주력했다. 당장 6월에는 인천에 있는 한일스텐레스 공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자 계훈제 부의장과 방용석 노동자복지협의회 대표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현장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구사대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민청련은 민통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실제 활동에서 서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운동 지원활동 등은 함께하는 일이 많았고, 구성원 개인 사이의 관계도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당면 정세가 단체들 사이에 균열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9월 20일 열린 민통련 2차 통합대회에서는 민청련, 기독교계 단체들, 서울노동운동연합,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 11개 단체가 가입하여 민통련은 명실상부한 통합단체가 된다.

5월 투쟁에서 '야사'를 뜬 이범영

1985년 5월은 민청련이 창립 뒤 두 번째 맞이하는 '광주항쟁기념의 달'이었다. 이번에는 총선 승리로 인한 자신감에서, 보다 과감한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집을 제작해 대중을 상대로 배포했다. 아울러 단순히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정권을 직접 공격하는 가두시위 투쟁을 민청련이 학생운동과 연대해 실행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누가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것인가를 두고 민청련 내부에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회원들 대다수가 학생운동 시절에는 '야사를 떴던' 경험이 있었다. '야사'란 야전사령관의 약자로 시위의 초기에 대중 앞에 주모자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청련은 공개된 단체이고 그 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인인 형편에서 쉽사리 구속을 각오할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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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7일 동대문운동장 앞 시위에서 살포한 민청련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제작한 5월투쟁용 전단지 ⓒ 민청련동지회


결국 책임은 집행부가 맡는 것이 원칙이라는 데 합의했고, 집행부 중에서 누가 나설 것인가를 두고 서로 고민이 깊었다. 이 과정에서 결단을 내린 이는 집행국장 이범영이었다.

5월 17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시위에서 이범영은 고가도로 위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며 '야사'를 떴다. 그는 다행히 현장 검거를 피해 구속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곧 다가온 민청련 대탄압에서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미문화원 점거투쟁의 여파

민청련이 5월투쟁을 정리할 무렵, 큰 사건이 터졌다. 5월 23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것이다. 서울 5개 대학 삼민투 소속 대학생 70여 명이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국문화원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삼민투란, 그 해 4월 전국 대학을 포괄하는 학생운동 단체로 '전국학생총연합'이 결성됐고, 이 단체의 지휘 아래 각 대학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라는 투쟁조직이 결성되는데 이를 줄여서 부른 명칭이었다. 미문화원에 들어간 함운경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80년 광주학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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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23일,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문화원을 삼민투 소속 대학생들이 점거했다. 아래는 해산하며 연행되기 직전의 점거 대학생들 모습 ⓒ 민청련동지회


이 사건은 지난 연말의 민정당사 점거 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에 대한 권한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미국이 광주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을 승인한 미국에게 책임을 묻는 미문화원 점거투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민청련은 곧바로 대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학생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 대중들에게 홍보했다. 아울러 구속된 대학생 부모들을 모아 부당한 구속과 고문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선했다.

민청련이 85년 5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정권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민청련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민청련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민청련 #민청련4차총회 #김희택 #이범영 #삼민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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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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