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사랑한 알래스카에서 곰에게 물려 죽은 사진가

[서평] 지구 땅끝마을 알래스카의 자연과 삶 이야기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등록 2017.12.15 21:13수정 2017.12.15 21:13
2
원고료로 응원
a

스무살 호시노(맨뒤)의 삶을 바꿔버린, 알래스카에서의 석달. ⓒ 청어람미디어


여행기를 읽다보면 꼭 만나고픈 여행가들이 있다. 책에 담겨있는 글은 물론 사진도 좋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한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겨울, 한겨울 기온이 50도까지 내려가는 동토의 땅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을 담은 책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의 저자 호시노 미치오도 꼭 보고픈 사람이었다.

제2의 고향이 된 지구의 땅끝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도 낳고 주민처럼 살아가면서 알래스카를 여행하고 기록하고 사진에 담았다. 저자가 보여주는 거대한 자연 풍경은 충분히 감탄하며 감상할 만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작가 자신이다.


일년에 절반은 야영 장비가 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혼자 극북 지역을 떠돌며 추위와 외로움과 맹수의 위협을 견뎌내게 한 힘은 대체 무엇일까? 작가를 만나게 되면 왜 알래스카였는지 물어보고 싶고, 사진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카메라나 렌즈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사진이 나온 건지 그의 경험담을 듣고 싶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호시노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됐다. 그의 나이 43세였던 1996년, 여느 날처럼 사진 촬영을 위해 들판에서 야영을 하다가 그만 곰에게 물려 죽음을 맞는다. 자신이 생애를 걸어 사랑한 대자연으로 돌아갔다.

이방인에서 이주민이 된 여행가가 담은 북극의 자연   
a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책표지. ⓒ 청어람미디어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소처럼 모닥불을 피워놓고 쉬고 있는데 호수 너머 산속에서 희미하게 꼬리를 끄는 하울링이 들려왔다. 거리가 멀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지만, 곧 늑대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하울링은 점차 늘어나 합창이 되었다. 그 밤을 시작으로 하울링은 며칠간 그치지 않고 이어져서 무리가 점차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본문 가운데 (알래스카 산악지대에서 한 달간 캠프 중)

여행을 좋아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 쉬스마레프에서 보낸 석 달은 저자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다.


현실과 공상 사이를 떠돌던 늑대와 북극의 왕 백곰(북극곰)을 만난다. 여름철엔 밤이 없다는 알래스카의 백야,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신비한 빛 오로라... 알래스카는 에스키모어로 '위대한 땅'을 의미한다고.

대학졸업 후 호시노는 운명처럼 다시 알래스카를 찾게 되고 페어뱅크스의 숲 속에 집을 짓고 여행자가 아니라 알래스카 주민으로서 이 땅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평생을 알래스카의 자연과 주민의 생활을 사진에 담는 자연사진가의 길을 가게 된다.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자연과 그가 만난 사람들, 신변의 일상과 사진작업,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보기 드문 귀한 사진과 함께 책속에 담겨있다.

알래스카 대지를 횡단하며 여행하는 카리부(북미지역에 사는 순록의 일종), 아메리카 개척사에서 학살 대상이 돼 이제 남은 삶의 터전이 알래스카뿐인 곰 그리즐리, 겉보기와 달리 감수성이 많다는 큰 고래, 전설적인 에스키모 사냥꾼 클리어런스 우드 이야기 등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호시노의 사진세계에 빠져들게 되고 함께 알래스카 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구의 땅끝마을, 알래스카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a

알래스카의 자연에 기대어 사는 주민들. ⓒ 청어람미디어


'나는 조금씩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인미답의 대자연... 그렇게만 믿어온 이 거대한 땅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조용히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추적하여 그들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게 하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풍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뭔가를 말해주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곳이라는 외경심을 품고 내려다보던 벌판이 실은 사람이 지나간 곳이었고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 본문 가운데(토템폴 흔적이 남은 퀸샬럿 섬에서) 

춥고 먼 곳에 있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알래스카에 사는 주민들 사진이 이상하게 생경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라는 멀고 먼 지역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와 너무 닮아서다. 약 1만 8천 년 전, 북미와 유라시아는 뭍으로 이어져 있었다. 알래스카 인디언의 선조인 북방 아시아인들(혹은 몽골로이드)은 뭍이었던 베링 해를 건너 처음으로 알래스카로 건너왔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려고 하던 때였다.

저자는 알래스카의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의 생각과 사진을 더욱 깊게 만들어간다. 평생 숲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온 112살의 추장 출신 월터, 전직 비행기 조종사로 알래스카의 개척기를 함께 살아온 실리아와 지니, 마지막 남은 에스키모 사냥꾼 클리어런스 우드... 가끔씩 여행을 하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지역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소통하다보면 풍경은 비로소 깊이를 띠게 된다.

a

고래뼈로 만든 알래스카 주민의 무덤. ⓒ 청어람미디어


호시노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영적 생활(토테미즘)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제는 원주민들조차 잊어버린 신화를 사진에 담기 위해 토템폴(나무에 조각한 토테미즘 상징)의 흔적이 남은 곳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19세기 말 유럽인들이 옮긴 천연두 때문에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한 원주민 클링깃족·하이다족. 그들의 영혼이 담긴 토템폴은 그렇게 호시노의 사진속에서 부활했다.

이 책은 저자의 아내가 남편이 발표한 사진과 글 중 대표작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책 말미 저자의 어머니가 쓴 아들에 대한 회고와 아내의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 애틋하고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저자의 유작이기도 한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칭했지만, 실은 인간도 스스로 그러하도록 만들어진 자연의 일부분 일뿐. 책을 다 읽고서야 책표지에 나오는 짧은 글귀에 눈길이 머물렀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생명과 자연을 따로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호시노 미치오 지음 |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7년 10월 16일 출간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17


#알래스카 #호시노미치오 #에스키모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