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만명 사로잡은 사랑의 꽃, 국화 앞에서

[화순기행 ⑧] 국화와 석탄

등록 2017.12.14 15:18수정 2017.12.1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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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군수 구충곤)이 연 '2017 국화 향연'에 약 48만 명이 다녀갔다. ⓒ 윤광영


대부분의 꽃들은 고백을 운명으로 한다. 장미는 '행복한 사랑'을 고백한다. 해바라기는 '기다림'을 고백하고, 튤립은 '사랑의 고백'을 암시한다. 수국은 여러 꽃망울이 어울려 피는 것처럼 '진심' '변덕' '냉정' 등 여러 고백으로 읽힌다.

사람들은 꽃을 선물하며 속내를 은유하거나 비유한다. 어떤 꽃을 선물하느냐에 따라 속마음은 번역될 수밖에 없다. 또 건네는 꽃의 종류에 따라 내 마음의 무늬는 상대에게 그대로 노출되어진다. 고백하는 자의 운명이고, 꽃의 운명이다.  


지난 가을, 전남 화순은 국화 천지였다. 10월 27일부터 11월 12일까지 화순 남산공원 일원에서 '국화 향연'이 펼쳐졌다. 남산공원은 각종 국화가 파도를 이룬 '국화 동산'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국화가 화순의 명물인 운주사 천불천탑이나 고인돌 모양을 하거나 국화 분재로 자태를 뽐냈다.

화순군(군수 구충곤)은 국화 향연 기간 동안 약 48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하루에만 7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날도 있었다고 한다. 48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화순을 찾자 화순의 농특산물과 향토음식 매출도 크게 늘었다. 농특산물 매출은 전년 대비 3.6배가 늘었고, 향토음식 매출은 전년 대비 9배나 늘었다. 공산품이 아닌 국화가 지역경제를 살리는 든든한 역할을 했다.

48만 명이 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국화는, '사랑의 꽃'이다. 노란색 국화는 수줍은 '짝사랑'을 의미한다. 빨간색 국화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을 지녔다. 보라색 국화는 조금 더 적극적이어서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바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흰 국화는 이 모든 지점을 초탈하여 '진실'과 '감사'를 고백한다. 사랑의 피날레다.

화순에서 만난 사랑의 꽃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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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화순군 국화 향연'이 열린 전남 화순군 남산공원 전경.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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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국화 향연에는 운주사 천불천탑 모양이나 고인돌 모양을 형상화한 국화 설치작품들이 많이 전시돼 이목을 끌었다. ⓒ 윤광영


만추(晩秋)에 고백하고자 했던 당신의 사랑은 어떤 무늬였을까. 그 가을에 내가 그대에게 건넨 노란색 국화는 어떤 의미로 번역되었을까. 사랑은 꽃과 같아서 망울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감출 수 없음을 그대도 알고 나도 안다. 결코 감출 수 없는 그대에게로의 침잠(沈潛).


그대는 다시 화순에 오겠노라 했다. 언제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가 가을에 올 것임을 알고 있다. 국화 만발한 동산에서 그대는 어떤 색깔의 국화 앞에서 설까.

노란색 국화 앞에 그대가 서면 어쩌나. 짝사랑이 얼마나 쓸쓸하고 아픈 자맥질인지 아는 까닭이다. 나는 그대가 보라색 국화를 선물 받으면 좋겠다,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 그런 사랑 안에서 그대가 행복하길 기도하는 나는, 다시 노란색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이 겨울을 지나갈 것이다.

작은 동산처럼 시커멓게 쌓인 화순탄광 석탄을 바라본다. 약 1억 년 전의 숲이 퇴적하여 석탄이 되었다. 1억 년 전 숲을 살던 나무며 꽃이며 풀 그리고 잠자리 같은 것들이 죽어 재가 되었다. 이들이 비와 바람과 눈과 서리와 함께 1억 년을 퇴적하여 석탄이 된 것이다. 수행자들의 천화(遷化)만큼 숭고한 나무들과 풀들과 꽃들의 1억 년 동안의 천화(遷化).

1억 년 전 어느 숲의 국화도 폈다 져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는 1억 년 동안 스스로를 부수고 부숴 석탄이 되었다. 1억 년 동안 퇴적한 사랑의 꽃, 국화. 1억 년 동안 잘게 더욱 잘게 스스로를 부숴 시커멓게 퇴적시킨 사랑. 모질고 모진 사랑이다.

화순탄광 앞 두개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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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다. ⓒ 이주빈


지금은 채 500명이 안 되는 직원이 일하고 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화순탄광엔 약 1500명이 일하고 있었다. 정선탄광, 도계탄광 다음으로 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화순탄광이 위치한 화순군 동면 복암리 일대는 탄광촌이 형성돼 사원 아파트 다섯 동이 즐비했고, 일대 식당가엔 교대하는 광부들로 북적거렸다.

화순탄광은 화순 출신 실업가인 박현경(1883~1949)이 1905년 4월 5일 광업권을 등록한 이후 그 역사가 시작됐다. 박현경은 김성수가 주도하는 <동아일보>와 경성방직 설립에 간여하기도 했다. 김성수와는 1910년 일본 메이지대학 유학 시절에 맺은 친분이 있었다. 해방 이후엔 혁신계 정치인이었던 서민호 전 전남지사를 후원했다.

아무튼, 화순탄광의 첫 채탄은 1908년 이뤄졌다. 1920년대엔 석탄을 채굴하여 목포에서 화물선에 실어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했는데 수익성이 낮아 경영난에 직면했다. 경영난에 빠진 화순탄광을 1934년 일본 종연방직이 인수했다. 해방 직후엔 미군정 직할로 운영하다가 1946년 5월부터 상공부가 직할 운영하였다. 1950년 11월부터는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로 재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순탄광 정문 앞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비가 마주 서있다. 정문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비는 이곳이 5.18사적지임을 알리는 비다.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화순 출신 청년들이 탄광에 있던 화약 등을 반출해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비다.

도로를 건너면 위령비가 서있다. 1949년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 잔당들에 의해 전사한 경비군인과 주민희생당한 군인과 민간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세워진 여섯 개의 비석은 모두 '용사 아무개'라고 적혀있다. '투사'와 '용사'라는 단어의 긴 간극 사이로 쓰리고 아픈 한국의 근현대사가 흐르고 있다.  

화순탄광에서 채굴한 석탄들은 광주와 전남, 전북 그리고 경남과 경북의 연탄공장으로 실려 간다. 그곳에서 석탄들은 연탄이 되어 다시 누군가의 집으로 실려 갈 것이다. 다시 재가 되길 1억 년 동안 기다려온 석탄의 오랜 행렬. 1억 년 퇴적한 꽃들의 재였던 석탄은, 마침내 연탄 불꽃으로 타올라 누군가의 방에 온기를 채우고, 밥을 짓고 다시 재가 되어 사라져 간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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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저 다리를 건너 화순탄광을 출입했다. . ⓒ 이주빈


#화순여행 #국화 #석탄 #탄광 #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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