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땐 잘나가던 영어강사, 서울역 쪽방생활 한 이유는..."

[지원주택, 주거와 복지의 혁명적 결합⑤] 병원을 나와 지원주택에서 찾은 행복

등록 2017.12.18 14:16수정 2017.12.1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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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닥친 추위가 매섭다. 아웃리치 상담(거리에 계시는 분들을 찾아가 상담하는 일)을 하러 서울역 광장에 갔더니 비교적 덜 추웠던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드시던 분들이 보이지 않는다.

날이 추우니 다들 지하도로 내려가셨나보다 하고 지하도에 갔더니 예상했던 대로 아저씨들은 옹기종기 앉아 술을 마시고 계셨다. 지하도에는 광장에서 보이지 않던 수만큼 자리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밤이면 주무시러 오는 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추운 날 어디서 주무시는 걸까?

노숙인에게 겨울은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이다. 그 문턱을 무사히 지나야 다음해를 맞을 수 있다. '올해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은 팍팍한 일상을 사는 서민들도 마찬가지지만 노숙인에게는 더욱 남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운명하시는 분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엄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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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바라본 지원주택 행복하우스 ⓒ 행복하우스


지난 11월 초, 거리생활을 거쳐 지원주택에 입주해 살고 있는 두 분을 마포구에 있는 행복하우스에서 만났다. 이 두 분을 인터뷰한 이유는 정신질환을 앓다가 병원에 입원했었고, 지원주택이 아니었다면 다시 거리로 내몰릴 뻔했기 때문이다.

덥지도 않은 춥지도 않은 가을의 막바지,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정이 밝았다. 언제 노숙을 했었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정동식(가명) 님이 차를 대접하겠다며 지원주택 근처의 카페로 안내했다. 동그란 얼굴과 통통한 체격, 건강미가 물씬 풍기는 구릿빛 피부를 더 태우기 싫었는지 챙있는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앳돼 보이고, 밝은 표정의 그에게 기억하기 싫은 옛이야기를 물어보기가 미안했다.

"젊을 땐 영어강사, 빚 지다보니 알코올 중독자 됐다"


"저는 이곳 지원주택에 온 지 1년 됐습니다. 작년 12월에 왔으니까요. 제가 알코올하고 우울증 때문에 정신병원에 2년 6개월을 입원해 있었어요. 제 나이가 지금 50이에요. 30대에는 학원강사로 일을 했었죠. 영어를 가르쳤어요. 제법 잘나갔었죠. 그러다가 학원에 투자해서 동업을 했는데 잘 안돼서 빚을 지게 되었어요.

한번 빚을 지다 보니 갚기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빚이 늘어서 감당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술을 먹었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우울증이 왔어요.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다보니 술을 점점 더 먹게 된 거죠. 가정이 깨지고 서울역 근처에 있는 쪽방이나 여인숙에 살면서 일용직으로 15년을 일했어요. 일용직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거의 매일 술을 먹었죠. 술 먹는 데 돈을 쓰느라 고시원비를 못 내서 쫓겨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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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협 강민수 간사와 이야기 나누는 정동식 님 ⓒ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정동식님은 고시원 방세를 못 내 결국 거리로 나앉았다. 20일 정도 거리노숙을 하다 노숙인 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노숙인 쉼터에서 6개월을 보냈다. 알코올중독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쉼터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쉼터에서도 나와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술이 아니라 독한 약에 취한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의입원이라 언제든 퇴원할 수 있었지만, 다시 거리노숙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노숙인 지원센터의 과장님에게 지원주택을 소개받지 않았다면 병원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평생을 그곳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정신병원에 있었을 거예요. 쉼터에서도 생활했는데 쉼터에 가면 술을 못 먹잖아요. 술을 못 먹으니까 견디기 힘들었죠. 결국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죠. 정신병원에 입원 해보니까 밥 주고 약만 주는 거예요. 약 먹고 멍하게 앉아 있었죠. 아무런 삶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요.

운동은 하루에 30분 정도만 할 수 있어요. 외출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니었지만 돈이 없어서 외출을 못했어요. 담배는 하루에 5개피씩 배급받아 피웠고요. 밥 주면 먹고, 먹고 나면 자고를 반복하는 우리 속의 동물처럼 지내다보니 살이 15킬로가 쪘어요. 병원에서 더 우울했죠. 우울증은 거의 치료가 안 됐다고 봐야해요."

정동식님의 얘기를 듣다보니 발음이 보통사람과 다르다. 정확하지 않고 어눌하며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 원래 말이 느린 사람도 있으니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었으나, 내 짐작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정신과 약 복용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다.

"제가 발음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독한 약을 먹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병원에 있을 때, 특별히 말할 사람도 없었고 환자들끼리만 얘기하다 보니 말을 더듬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 지원주택에 와서 많이 좋아졌어요. 병원에서 나와도 마땅히 갈 데가 없으면 다시 노숙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브릿지센터의 이효선 과장님을 만나 지원주택으로 입주하게 된 거죠. 술은 이제 거의 안 먹어요. 술을 마시면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병원 가는 거 생각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지원주택에 오고부터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어요. 이제는 일반 사회인이니까 직업도 정해야 하고, 저축도 해야하고… 우선은 이곳,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아주 잘해주세요. 사소한 문제도 의논하면 용기를 주시고, 힘도 주시고.

무엇보다 독립적인 주거 공간이 생기니까, 내가 누울 자리가 있으니까 행복합니다. 입주민들끼리 함께 영화도 보고, 야유회에 가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지고, 음식도 나눠 먹고 하니까 사람 사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본인 소유의 집이 아니라도 '집'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믿었다. 집이 없어서 단체 생활을 하고,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러 가서 주는 밥만 먹고 멍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의 사생활을 온전히 보호받는 공간, 그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답게 살기도 하고 동물처럼 살기도 한다.

이창준님은 유방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간병하다가 생긴 빚으로 집을 잃었다. 집을 잃고 아내를 살렸으면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아내마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마침 인터뷰를 하러 간 날이 아내를 먼저 보낸 지 딱 3년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아내를 잃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생을 마감하려 했다. 눈을 떠보니 정신병원이었다. 퇴원하고 싶었지만 가족(아들)의 동의 없이 퇴원을 할 수 없어 2개월 동안 반강제적인 병원생활을 했다. 성실하게 병원의 프로그램을 잘 따랐지만 아들은 끝까지 퇴원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병원장의 권한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간 곳은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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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민협 강민수 간사와 이야기 나누는 이창준 님 ⓒ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 국가가 정말 미웠어요"

"제 이름은 이창준입니다. 61년생이고요, 저는 작년 12월 22일에 이곳 행복하우스에 왔습니다. 저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죄 지은 게 있다면 빚을 못 갚아 채무자가 된 것 뿐입니다. 제 이름 실명으로 해도 되고요, 제 얼굴 다 공개해도 됩니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 6개월 정도 노숙생활을 했어요. 노숙을 하기 전에는 2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요. 젊을 때는 건축업을 해서 건물 많이 짓고 남 부럽지 않게 잘 살았어요. 그런데, 아내가 유방암으로 아프기 시작해서 6년 8개월을 간호했어요. 아내가 아프니까 아이들도 제가 보살펴야 했죠. 아내 간호하고 아이들 보살피느라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일을 못 하니까 수입이 없죠. 당시만해도 암 치료비와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까지해서 한 달에 평균 5~6백은 들었어요. 그 정도의 돈이 들면 제가 아무리 잘 벌었고, 중산층으로 살았다고 해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죠.

동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내가 집이 있고, 시골에 땅이 좀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처분해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도 있는데 집을 팔면 어떻게 삽니까? 저는 외아들이라서 도움을 요청할 가족도 없었어요.

아내가 아파서 간병하다가 가정이 무너졌는데도 사회는 행정적으로만 처리하려고 했지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어요. 그때는 정말 국가가 미웠어요. 이제는 집 팔고 다 정리해서 남은 빚이 7천만 원 정도 돼요."

이창준 님은 남은 빚 7천만 원을 갚지 못해 현재 신용불량자이다. 통장을 만들면 압류가 들어와 사용할 수가 없다. 병원에서 퇴원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집과 땅을 팔아서 아이들이 살 작은 전셋집을 마련해 주고 본인은 노숙생활을 택했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딸은 이창준님이 아내를 빨리 죽게했다는 오해를 했고, 군대에서 막 제대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아 같이 살 수 없었다.

"제가 노숙할 때, 지하도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아무도 저한테 왜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냐고 묻지 않더라고요. 개가 그렇게 누워 있으면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길고양이가 있으면 밥이라도 놓고 가잖아요. 사람이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한마디 물어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사람들의 편견이 너무 심하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사람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국가에서 손을 내밀어야 되는데 그걸 안 해주니 살아갈 방법을 찾기가 힘들었죠. 내 편이 아무도 없구나,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싶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했죠. 거기서 알려준 곳이 브릿지센터예요.

그 센터에 찾아가서 이효선 과장님을 만났어요. 이 과장님이 고시텔 방 하나를 얻어주셨어요. 거기서 한 달 반 정도 살다가 일자리에 대한 상담을 했고,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니까 마침 택배회사에 자리가 있다고 해서 입사하게 됐어요.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지원주택이 있다는 정보를 주셔서 바로 들어왔어요.

고시텔에 있다가 여기 지원주택에 들어오니 완전 하늘과 땅 차이인 거예요. 고시텔은 쪽방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좁고, 방음이 안돼서 옆방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리고…. 사용료는 밥이랑 공과금 다 포함해서 25만 원을 냈는데, 여기 지원주택은 월 임대료가 12만 원이에요. 물론 공과금은 따로 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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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준 님이 지원주택을 소개 받은 노숙인 지원센터 ⓒ 브릿지종합지원센터


노숙인 지원센터의 과장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원주택에 입주하지 못했다면 이창준 님은 아직도 서울역 어딘가에서 노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정이 조금 나으면 옆방의 TV소리까지 들리는 허름한 고시텔에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창준 님이 꼭 하고 싶은 말이 두 가지가 있다면서 목에 힘주며 말했다.

"저는 이효선 과장님을 만나서 곧바로 일자리를 얻은 것도 행운이었고, 지원주택에 입주한 것도 행운이었어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장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이 과장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시고 항상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그 말에 힘입어 다시 한 번 살아 보기로 결심했죠.

여기 지원주택에 들어와서도,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너무나 따뜻하게 잘해주세요. 한 달에 한 번씩 면담도 해주시고, 무슨 일이 있냐고 먼저 물어봐주시고. 그런 관심이 저를 살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지금은 정말 행복해요. 얼마 전부터는 정신과 약도 안 먹고 있어요. 물론 직업상 운전을 해야돼서 약 먹으면 졸리니까 안 먹지만 안 먹어도 될 만큼 심리적으로 안정된 거 아니겠어요?

다른 한 가지는, 누구든 어려움에 처할 수 있고 노숙을 할 수 있어요. 위기가 닥쳤을 때 행정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왜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해요. 직접 찾아가서 그 사람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행정은 신분증 하나만 보면 모든 상황을 다 알 수 있어요. 그것만 보고 판단하는 거죠. 법이 우선이어서 법, 법, 법 하는데, 법이 우선인 나라는 싫다는 것, 이걸 강조하고 싶어요."

이창준 님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본인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공개해도 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암에 걸린 아내 병수발 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져 자살시도도 했고, 노숙을 했지만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원주택 #홈리스 #노숙인 #탈시설화 #정신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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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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