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최고 지도자' 설문조사 1위는?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⑩] 몽양 여운형 Ⅱ

등록 2017.12.24 11:27수정 2017.12.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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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YMCA 건물에 있었던 조선건국동맹 본부에서 인사말을 하는 몽양 여운형(1945. 8.) ⓒ 눈빛출판사


해방 정국의 최고 지도자

해방 후 1945년 12월에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생존 인물 가운데 최고의 혁명가'라는 설문에서 몽양 여운형은 모두 1위로 꼽힐 만큼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몽양은 38도선 이남의 정치 세력이 좌우연합하고, 38선 이남과 이북의 정치세력이 통일하는, 그리하여 좌우연합을 한 남북통일 국가 건설을 위해 줄곧 헌신해왔다. 이 과정에서 몽양은 극좌 극우 정치세력들로부터 10여 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1947년 7월 19일, 정오 무렵 몽양의 맏딸 난구는 아버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난구냐?"
"예, 아버지."
"내 곧 집으로 갈 테니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두거라."
"예, 아버지."

하지만 그 아버지는 끝내 귀가하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얼마 전(1947년 3월), 몽양은 집이 반파되는 폭탄테러를 입은 바, 이후로는 가족들의 신변을 염려해 바깥 친지 집에서 기거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날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영국 축구팀과 한국대표팀 간 천선경기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체육회장인 몽양은 점심을 먹은 뒤 가벼운 옷차림으로 서울운동장으로 가서 축구경기를 관람할 예정이었다.


오전 몽양은 성북동 한 지인 집에서 재미동포 김용중씨와 시국대담을 나눴다. 그가 곧 출국하기에 작별인사를 나눈 뒤, <독립신문> 고경흠 주필과 함께 승용차 뒷좌석에 올랐다. 조수석에는 경호원 박승복이 탔다. 승용차가 움직이자 고경흠이 말했다.

"선생님, 요즘 선생님을 미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정보가 저희 신문사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당분간 은밀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네. 얼마 전에는 창랑(장택상)이 직접 전하기도 했네. 그건 날더러 정계에서 은퇴하라는 것으로, 그들의 음모에 놀아나는 꼴이지 뭐."
"선생님, 심지어 경찰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미소공위가 계속되는 동안만이라도 미군의 경호를 받아보시지요? 이즈음은 신변이 대단히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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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장례 행렬(1947. 8. 3.) ⓒ 눈빛출판사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고 동지. 나는 우리 인민을 사랑하네. 내 꿈은 그들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비애를 함께하면서 살아가자는 건데, 내 안위만 도모하면서 미군의 경호를 받는다면 그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겠나?"
"하지만 선생님을 미행하는 그 자들은 어떤 흉계로 테러를 감행해올지…."
"'인생자고수무사'(人生自古誰無死, 사람은 예로부터 죽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했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갈 뿐이네."

몽양과 고 주필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승용차는 혜화동 로터리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때 혜화동 파출소 앞에 정거하고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엔진소리를 크게 내면서 길 한가운데로 돌진, 여운형의 승용차를 가로막았다.

"야이, 미친놈아!"

운전수 홍순태가 고함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하고 승용차가 멈췄다. 그때 승용차 뒷범퍼에 괴청년이 잽싸게 올라타더니 승용차 안 여운형을 향해 권총을 쐈다. 승용차 유리창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순간 여운형은 풀썩 주저앉으며 '조선!' '조국!'이라는 말과 함께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자주 독립국가건설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그때가 1947년 7월 19일 낮 1시 15분 무렵이었다.

몽양이 흉탄에 쓰러진 보름 뒤인 1947년 8월 3일, 조선 최초 인민장이 성대히 치러졌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 통일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은 각각 친미·친소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단독정부 수립 이태도 지나지 않아 몽양이 우려했던 대로 비피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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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왼쪽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1936년) ⓒ 몽양기념사업회


혈농어수(血濃於水)

나는 몽양 여운형 일대기 <혈농어수>(血濃於水)를 쓴 전 몽양기념사업회 상무이사 강준식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다음은 그분의 몽양 인물론이다.

"몽양 유묵에 '혈농어수'(血濃於水)란 글이 있습니다. 이는 곧 몽양의 삶과 사상을 집약한 글이지요. 여기서 혈은 피, 곧 민족을 말함이요, 수는 물, 곧 이념을 말함입니다. 혈농어수란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고 풀이해야 합니다. 제가 공부하고 취재한 바로는 실제로 해방정국에서 통일운동을 한 사람은 몽양밖에 없습니다.

몽양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에도 '빨갱이' 또는 '준빨갱이'라고 색칠하여 그분의 참 모습을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사회주의자다, 진보주의자다'라는 어떤 틀(이데올로기)에 넣기에는 너무나 폭이 넓은 큰 인물로, 일찍이 세계화가 된 인물입니다.

1922년 고려공산당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몽양이 공산주의가 좋아서 가담한 게 아니라 나라의 독립운동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것은 오직 소련이었습니다. 그래서 몽양은 레닌을 만나 200만 루블 지원 약속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큰 인물을 경직된 눈으로 좌파에서는 친미기회주의자로, 우파에서는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그들은 몽양이라는 인물을 '숲으로 보지 않고 나무'로만 보는 오류였습니다. 몽양은 평생을 통해 한 번도 관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교유하고 만난 사람의 범위도 매우 넓었습니다.

소련의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고, 중국의 손문·장개석·모택동·왕정위 등을 만났습니다. 일본의 인사로는 쇼와(昭和) 일왕·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수상·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장관·오카와슈메이(大川周明) 육군대학 교수·우카키 이세이(宇垣一成)를 비롯한 조선총독 등... 몽양이 만난 인물은 좌나 우, 적과 우군이 따로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다와 같은 인물입니다. 이런 분을 하나의 틀에 옭아매는 것은 천만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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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군 양서면 신원리 몽양생가 전경 ⓒ 박도


'민족우선' 진보적 민족주의 사상가 몽양

"일제강점기 몽양은 일본 관헌에게 '내가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정책면일 뿐, 나는 신(하나님)을 믿기에 유물론을 믿지 않는다'라고, 유물론을 부정한 분입니다.

원래 몽양은 미국 사람을 좋아해 미국으로 유학 가려고 하다가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킨 것을 보고, 그를 배우고자 중국으로 갔습니다. 몽양은 행동가요, 사상가입니다. 그분은 누구의 세뇌를 받은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깨우친 '민족우선'의 진보적 민족주의 사상가였습니다. 해방 당시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몽양은 단연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조국분단의 단계적 진행과정은 1945년 지리적 분단, 1946년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회적 분단으로, 비로소 좌우로 갈립니다. 1948년은 정치적 분단으로, 남북정권이 들어서고, 1950년에는 마침내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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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생가 안채 ⓒ 박도


"그 공간에서 민족지도자들은 모두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초기 이승만은 자기만 떠받치면(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좌도 우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한민당 계열은 좌파 배제요, 이와는 반대로 박헌영 계열은 친일파와 자본가 배제로 곧 우파 배제였습니다.

또 중도의 안재홍은 좌우합작을 꾀하되 주도권은 우파가 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와는 달리 허헌 계열은 좌우합작을 하되 주도권은 좌파(진보세력)가 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 몽양은 어떤 생각이었나 하면, '좌도 우도 실체가 있으니,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가 주도하는 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따라서 좌우 합작은 좌우의 공통점을 확대하고, 상이점을 축소하는 것'이라 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민중의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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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사랑방에서 면도를 하는 몽양 ⓒ 박도


통일국가의 앞길을 비추는 향도등, 몽양

나는 늘그막에 몽양에 심취하면서 그제야 아버지와 시인 이기형 선생이 생전에 하신 "몽양의 노선이 옳았다"라는 말씀에 수긍이 갔다. 해방 후 몽양의 노선만이 좌우를 껴안을 수 있었고, 그의 큰 포용력으로 한반도의 제반의 갈등과 충돌을 용해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47년 7월 19일 몽양이 흉탄에 쓰러진 순간, 한반도의 통일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는 것이 바른 역사 해석일 것이다. 흉탄에 쓰러져 간 몽양의 비극은 우리 3000만 겨레의 원한이요, 불운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통일의 제단에 흘린 피는 큰 제물이요 교훈으로, 몽양이 걸어간 길은 장차 통일국가의 앞길을 비추는 '향도등'이 될 것이다. 몽양 여운형은 장차 통일시대를 열 수 있는 진정한 민족지도자의 한 전형을 보인 거대한 산맥으로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해방 공간의 사진 몇 점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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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진주하는 미군들(1945. 9.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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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24사단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아베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1945. 9.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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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이 조선총독부 광장의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1945. 9.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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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조선총독부 광장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1945. 9.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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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진주한 미군들(1945.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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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회의장에서 소련 측 스티고프 수석대표가 연설하고 있다(1946. 3.).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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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젊은이들이 김일성을 연호하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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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오른쪽)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 최고회의장를 둘러보고 있다. ⓒ NARA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연구 지음 김영사 간 <나의 아버지 여운형>, 강준식 지음 아름다운책 간 <혈농어수> 를 참고로 하여 썼습니다. * 해방 정국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박도 엮음 <미군정 3년사>에 일목요연하게 수록돼 있습니다.
#여운형 #해방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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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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