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사진책'으로 손꼽고 싶은 사진책

[사진책 읽기] 일흔 할머니가 들려주는 사진꽃 이야기, 서학동사진관 김지연 님 <감자꽃>

등록 2017.12.28 11:04수정 2017.12.2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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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겉그림 ⓒ 열화당

사과나무 과수원을 서성거리는데 주인이 왔다. 주인은 표정 없이 떨어진 사과를 광주리에 담았다. 새벽부터 낯선 곳에서 서성이는 나를 보더니 떨어진 사과 몇 알을 건네주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상큼한 사과 맛이 있을까? (13쪽)

요즈음 나 자신에게 되묻고 있다.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사진을 하는 동안, 세상사에 발을 담그고 살면서 세삼 '밥값'도 제대로 못 하는 사진가는 아닌지 반문해 본다. (21쪽)


사진기라는 기계는 평등하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든 나오지 않았든 이 기계를 손에 쥐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진기라는 기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값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서, 더 돈을 치르면 해상도가 더 빼어난 기계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대학교 사진학과라든지 사진밭 여러 어른 뒷줄에 서서 이름을 펴기도 합니다.

곰곰이 따진다면 사진밭뿐 아니라 어느 밭을 보든 매한가지입니다. 호미 한 자루는 누구한테나 평등합니다. 누구나 호미 한 자루로 밭을 일굴 수 있어요. 연필 한 자루는 모두한테 평등해요. 누구나 연필 한 자루로 글을 여밀 수 있지요. 그렇지만 어버이한테서 땅을 물려받지 못하면 다른 이 땅을 빌려서 부쳐야 합니다. 글밭도 글밭 여러 어른 뒷줄이 있어서, 이 뒷줄에 살그머니 서는 사람이 있어요.

나락을 거침없이 삼키고 흰 폭포처럼 위용있게 쌀을 뿜어내는 정미소는 어린 나에게 정말 대단한 존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절대로 무너지는 날이 없을 줄 알았던 그 정미소가 이제는 시골 면사무소 뒤에서 납작이 엎드린 채 길가로 난 큰 문을 걸어 잠그고 안채 마당에서 소소한 창고로 쓰이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23쪽)

"언제 또 봬요."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글씨요……." 주인은 말꼬리를 흐린다.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나 있겠어요. 정미소도 그렇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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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연작. 전북 진안. 2002 ⓒ 김지연


사진책 <감자꽃>(열화당 펴냄)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을 여민 분은 쉰 줄이라는 나이부터 사진기를 손에 쥐었고, 이 사진책을 일흔 줄 나이에 선보인다고 합니다. 아주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사진길을 걷자는 생각을 했고, 할머니라 이를 만한 나이에 새로운 사진책을 여밉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실은 글이나 사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 즈음에도 쓰거나 찍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어떤 분은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도 이 사진책에 깃든 글만큼 사진만큼 이야기를 엮을 수 있겠지요. 사진기는 평등하거든요. 그런데 사진기만큼 평등한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나이와 발걸음입니다.

삶길을 걸어온 나이에 맞추어 글 한 줄에 얹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삶길을 지핀 발자국에 맞추어 사진 한 장에 담는 이야기가 살며시 달라요.

스무 살 젊은이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은 쉰 살 아주머니가 정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눈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에 정미소를 늘 쳐다보면서 살다가 아주머니 나이를 지나 할머니가 된 분이 사진기를 손에 쥐어 담아낼 이야기를 서른 살 젊은이가 담아낼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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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연작. 전남 보성. 2002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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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연작. 전북 완주. 2004 ⓒ 김지연


나는 감자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는 감자꽃을 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나 이쁘고 곱던지,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감자꽃을 묶어서 부케처럼 만들어 할머니 손에 쥐여 주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43∼44쪽)

면내에는 물론 읍내에도 미용실이 한두 군데밖에 없던 시절인지라 여자애들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서 컸다. 예전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9쪽)

사진 찍는 김지연 님은 전북 진안에서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전북 전주에서 '서학동사진관'을 꾸립니다. 늦깎이로 사진길을 걸었다 할 만하고, 어느새 할머니 나이에 이르는데, 이즈막 할머니 나이에 감자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해요.

감자밭에서 감자꽃을 따서 버리는 시골 할매 곁에서 감자꽃을 주섬주섬 그러모아서 '감자꽃다발'을 엮습니다. 감자알처럼 투박하면서 살가운 시골 할매 손이란, 짐짓 쓸모없다고 여겨 버리는 감자꽃 고운 꽃송이처럼 따사롭고 푸진 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흙짓는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꽃다발을 안긴 일은 없지 않을까요. 흙빛을 닮은 시골 할매나 할배 손에 작은 들꽃 한 송이를 가만히 건넨 일도 없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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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 2012. 감자꽃을.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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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 2012. 달걀꽃을. ⓒ 김지연


정읍의 눈 내리는 벌판을 걷노라면 마치 꿈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바람도 없는데 하염없이 눈이 쌓이고 또 쌓인다. 행여 길을 잘못 들어도 별로 당황스러울 것이 없다. 인가가 멀리서 보이는 국도에서 버스를 내리면 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옆으로 방천길이 마을로 이어진다.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곳에 간판도 창문도 없는 오래된 이발소가 있다. (55쪽)

우연한 기회에 동네 할머니 방의 문지방 위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을 찍게 되면서 '낡은 방' 연작을 시작했다. 이 사진을 찍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 오래된 방에는 이렇게 가족의 역사가 가훈처럼 붙어 있었구나. 자식을 낳고, 그들이 자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의 돌이나 부모님의 환갑을 기념하는 사진들을 찍고, 그것을 모아서 문지방 위나 벽에 온통 걸어 두고 늙은 부모는 살아가고 있었구나.' (83쪽)

사진책 <감자꽃>은 감자꽃 같은 사진하고 글이 어우러집니다. 어쩌면 감자꽃은 덧없을는지 모릅니다. 사진책 <감자꽃>에 흐르는 사진하고 글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스쳐서 지나갈 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자알에서 뿌리가 돋고 줄기가 오르며 잎이 나기에, 이러면서 꽃이 피기에, 또 꽃이 지거나 꽃을 따기에, 시나브로 감자알이 굵습니다. 꽃내음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꽃이 피지 않는 풀이나 나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꽃이 피지 않는 삶이나 살림이란 없습니다.

비록 그늘진 자리에서 겨우 자그마한 꽃송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터뜨리더라도, 이 자그마한꽃송이를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접어야 하더라도, 모든 풀이며 나무이며 사람이며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꽃피우는 곡식이랑 열매를 먹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꽃피우는 사랑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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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발소로 간다' 연작. 전북 정읍. 2012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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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 2014 ⓒ 김지연


'자영업자' 작업을 하면서 삼산이용원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주로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술 한 잔씩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늘 같은 말로 '사진도 못 찍는 사진사'라는 인사는 빼놓지 않았다. (121쪽)

"꽃시절은 언제였어요?" "나는 존(좋은) 시절도 없었어"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아차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147쪽)

누구나 꽃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꽃길을 걸으려면 우리 삶이나 마을이나 나라는 어떤 길로 거듭나야 할까요. 우리는 꽃날을 누리지 못한 채 저무는 삶일까요. 우리한테 꽃날이 찾아오려면, 아니 우리가 꽃날을 지어서 꽃잔치를 즐기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으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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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방' 연작. 전북 진안. 2011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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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에 서다' 연작. 전북 군산. 2015 ⓒ 김지연


사진책 <감자꽃>은 일흔 할머니 나이를 걸어갈 키 작고 몸집도 작은 사진님 한 사람이 조곤조곤 일구어 온 사진밭을 차곡차곡 보따리 풀 듯이 보여줍니다. 숱한 정미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이발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지기를 보여줍니다. 숱한 시골가게를 보여줍니다. 숱한 마을이웃을 보여주고, 숱한 꽃송이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작고 여린 사진님 한 사람 눈에 뜨였기에 사진으로 깃들 수 있는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크고 단단한 이들은 쳐다보지 않거나 아랑곳하지 않던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낡은 방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빈 방을 어떤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낡은 방에 빼곡한 낡은 사진에 깃든 마음을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요? 이제 빈 방이 되어 버린 자그마한 터가 한때 숱한 아이들이 바글바글 복닥이면서 씩씩하게 자라던 보금자리인 줄 읽을 수 있을까요?

오늘 또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외로울까 봐 이쁜 새악시들 사진을 걸어논 거요?" 할아버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벽에는 '꽃시절'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나는 괜히 가슴이 뿌듯했다. '아, 꽃시절.'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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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 연작. 전북 전주. 2016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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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2016. 골목개 ⓒ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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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 할머니의 옛 사진. 1950년대 ⓒ 김지연


꽃가루가 꽃가루 아닌 모랫바람으로 온나라를 휩쓰는 오늘날입니다. 꽃비가 내려도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면 귀찮거나 성가시거나 싫다고 여기는 오늘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꽃을 멀리하지 않았을까요? 감자꽃뿐 아니라 사람꽃도 멀리하고, 삶꽃이나 사랑꽃도 멀리하지는 않았을까요?

꽃을 멀리하다 보니 어느새 꽃길하고도 멀어지고 꽃날도 잊고 말지는 않을까요? 스스로 꽃사람인 줄 잊으면서 그만 꽃벗이나 꽃이웃까지 잊지는 않을까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줄부터 일흔 줄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이 꽃길이었는지 흙길이었는지 가시밭길이었는지 구름길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진길을 걸었겠지요. 사진님 한 사람이 쉰 나이부터 일흔 나이에 이르도록 일군 사진이 꽃사진이었는지 흙사진이었는지 가시밭사진이었는지 구름사진이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저 수수히 살아온 나날을 적바림한 사진이었겠지요.

꽃가루 황사로 범벅이 되고
오월은 장미대선으로 분주하고
꽃비는 더러운 차창 위에 모로 눕고
와이퍼는 호들갑을 떠는 금요일 밤
집에 돌아와 미역국에 찬밥을 말아 먹는데
내가 오늘 생일인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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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서학동사진관 들머리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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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사진관 안모습 ⓒ 최종규


사진을 놓고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놓고 아트라 해도 됩니다. 사진을 디자인해 볼 수 있을 테고, 사진에 이런 이론이나 저런 사상이나 그런 주의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사진을 어떻게 바라보든 사진으로 이야기를 지피다 보면 어느새 꽃 한 송이가 피어나서 향긋한 바람을 일으킬 만하다고 봅니다. 바로 '사진꽃'입니다.

우리는 사진예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하지 싶어요. 우리는 사진꽃 한 송이를 자그맣게 피울 수 있어도 넉넉하지 싶어요. 대단한 사진축제라든지 엄청난 사진페스티벌이라든지 놀라운 사진박물관을 세우지 않아도 되리라 봅니다. 들꽃 같은 사진이야기를 피우고, 마을꽃 같은 사진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가볍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사진꽃이 맺는 씨앗 한 톨을 오래오래 바라보아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일흔 할머니가 앞으로 아흔 할머니로 걸어가는 길목에서 피워낸 작은 사진책 <감자꽃>을 곱다시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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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 사진전시를 하는 서학동사진관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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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사진가 손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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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이 놓인 서학동사진관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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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사진가가 쓰는 안경 ⓒ 최종규


덧붙이는 글 <감자꽃>(김지연 글·사진 / 열화당 / 2017.12.5. / 16000원)

감자꽃 - 김지연 사진 산문

김지연 지음,
열화당, 2017


#감자꽃 #김지연 #서학동사진관 #사진책 #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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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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