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70살인데, 딱 5년 만이라도"... '강타이모'의 바람

[2017 비포 앤 애프터 ⑦] '쉼표, 마침표, 느낌표'... 이겼으되 이기지 않은 '아현포차' 투쟁

등록 2017.12.28 15:47수정 2017.12.2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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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은 이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습니다. 촛불, 탄핵 인용, 조기 대선... 연이어 큰 사건을 경험한 2017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을까요. 내년엔 '파사'를 넘어 '현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올해 상황이 달라진 사안들, ‘보도 그 이후’가 알고 싶은 기사들, 사연 속 주인공의 현재가 궁금한 사례들을 모아 '2017 비포 앤 애프터'를 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매서운 한파는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인근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는 한산했다. 바람이 거칠게 분다. 부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텃밭. 맹추위를 탄 풀잎은 짙푸른 빛이다. 줄기는 시들었다. 지난 여름 깻잎이며 고추, 씀바귀를 길러낸 땅이다.

이곳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작은거인이모' 조용분(73)씨는 일찌감치 실내 길쭉한 의자에 누웠다. 한낮에 눈을 붙였다. 방한용 비닐을 덧댄 나무문을 살포시 밀었다. 그제야 잠에서 깼다. 조씨는 요새 입맛이 없어 하루 한 끼 먹고 만단다.

아현동 포장마차 단골들과 문화예술인 등으로 이뤄진 '아현포차지킴이'는 승리를 알렸다. "10월 13일 마포구청과 면담한 결과 건설교통과장이 도의적 사과를 표명했고, 대화와 협의를 통한 해결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기쁨을 나누는 촛불문화제가 10월 19일 굴레방로 길목, 아현역 3번 출구에서 열렸다. '쉼표, 마침표, 느낌표'의 제목을 달았다. '굴레방로 노점상'들을 둘러싼 강제 철거를 저지했고(마침표), 이겼으니 기뻐하되(느낌표), 지금은 결코 끝이 아니라 단지 '숨 고르기'를 하는 과정이므로(쉼표) 남아있는 투쟁 과제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관련 기사 : 구청이 부순 '아현포차', 시민들이 다시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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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인근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에 자리잡은 주점 '거인포차'를 운영하는 조용분(73)씨가 멸치 육수를 끓이고 있다. ⓒ 박동우


"미지근한 숭늉 마신 기분"... 산적한 과제

이겼으나, 온전히 이긴 것은 아니었다. 아현포차 이모들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1년 전 이뤄진 행정대집행(철거)을 둘러싼 사과를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불법점유'로 낙인 찍힌 경의선 공유지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조씨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냥 미지근한 숭늉 마신 기분이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곤 말던데, 그게 무슨 사과여."

'강타이모' 전영순(69)씨도 맞장구를 쳤다. 그는 "당시 건설교통과장은 우리에게 아현포차 철거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게 전부였는데, 어찌 사과로 볼 수 있겠느냐"며 "책임을 지겠다는 말 한 마디 없는 마당에, 진정성 있는 사과로 보이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두고 마포구청 관계자는 "굴레방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법에 의거해 행정대집행 절차를 준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는 등 불상사가 발생한 점을 두고 사과가 아닌 유감 표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와 조씨가 연대의 손길을 뻗친 굴레방로 노점들 역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26개 점포 가운데 현재 8곳만 남았다. 노점상 쪽은 한 평 남짓한 가게 크기를 줄여서라도 장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줄곧 당국에 요청했다. 구청은 영업 공간을 마련하는데 난색을 보이고 있다. 11월 국토정보공사의 지적 측량 작업이 진행됐음에도 의견 대립은 여전하다.

구청은 기존 2차선 도로를 정비해 차선을 폭 3미터씩 세 개 확보함과 더불어 1.5미터 폭의 인도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구의회는 구청의 도로 포장 예산 집행을 다음 해로 넘겼다. 이르면 내년 봄 굴레방로 확장 공사가 진행된다.

마포구청에 따르면, 지난 15일 노점상 8곳을 대표해 서부지역 노점상연합회(서부노련) 간부 등이 찾아와 '내년 2월28일까지 자진 퇴거하겠다'는 각서를 가져왔다. 서부노련 김두환 연대사업부장은 "일단 구청과는 철거 문제까지만 합의가 이뤄졌고, 그 이후 (노점) 상인들이 장사를 이어가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며 "구청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협상을 지속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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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인근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에서 포장마차 '코끼리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전영순(69)씨가 조리대를 정리하고 있다. ⓒ 박동우


포차는 넓어졌지만 공치는 날이 많아

빌딩이 둘러싼 땅은 짙은 어둠에 잠겼다. 오가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다. 바삐 걸음을 옮긴다. 네댓 평 비좁은 공간, '작은 거인' 포차는 두 배나 넓어졌다. 지난 가을 200만 원을 부었다. 저녁 무렵이지만, 가게는 고요했다. 여덟 평쯤 되는 '코끼리레스토랑'의 사정도 비슷하다. 작년 이맘때와 견줘보면, 매출은 당시의 30% 수준으로 줄었다는 게 전씨 설명이다.

"지난해에는 우리가 처음 공유지에 왔으니까 활동 단체들이 우리 가게에서 '후원의 밤' 행사도 열고 여러 행사를 치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올해는 행사를 (공유지) 바깥에서 치르고, 투쟁도 잠시 쉼표를 찍었으니 아무래도 찾는 손님이 적죠."

혹한기에 접어들면서 연료비 걱정이 커졌다. 한달 7만2천 원 하던 전씨 가게 가스 값은 겨울이 되자 18만 원으로 훌쩍 뛰었다. 전씨는 "가스 불도 아까워서 요새는 밥도 제대로 못 짓는다"며 "수입이 그만큼 따라주면 아깝지가 않은데 통 수입이 없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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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지하철 공덕역 인근 경의선 공유지(폐선 부지)에서 <아현포차 요리책> 출판기념회가 열린 가운데, 탁자에서 ‘작은거인이모’ 조용분(73)씨(왼쪽)와 ‘강타이모’ 전영순(69)씨(오른쪽)가 시민들이 내민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 김은석·창작집단3355


"단 '5년'만이라도 맘 편히 장사했으면"

장사를 공치는 날이 많아질수록 전씨는 아현초등학교 담장 너머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그리웠다. 포장마차 지붕 넘어 꽃잎이 흰 눈처럼 날리고, 여름에는 초록 매실마냥 주렁주렁 달린 은행 열매가 참 예뻤다. 손님들에겐 "너희들은 몇백만 원짜리 정원에서 요리를 먹는 것"이라고 뽐내며 순간의 정취를 만끽했다.

나무는 언젠가 잘렸다. 2016년 봄의 일이었다. 밑동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래된 회상은 황경하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 등 지킴이 회원들이 지난 9월 펴낸 <아현포차 요리책>에 고스란히 실렸다. 아현동에서 밀려난 포장마차 두 할머니의 삶과 요리 비결을 술술 풀었다.

책을 펴낸 덕에 간간이 사람들이 "방송을 접했다"거나 "요리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곳을 들른다. 두 이모에겐 그나마 위안이 된다. 11월 초순 일본 오사카 출신 '마리오'란 사내는 공연을 마치고 전씨 가게를 찾았다. 된장찌개 백반을 먹었다. 스마트폰 번역 앱을 쓰며, 서툰 우리말을 구사했단다. "집밥 같다"고.

현실은 엄혹해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버틴다. 두 이모는 아현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의선 공유지에서 장사를 계속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한 입을 모아 단 '5년'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장사를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전씨가 말했다.

"우리들 나이가 70대예요. 우리가 장사하면 얼마나 더 하겠어요? 우리가 완전히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마음 편하게 장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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