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걸음마' 수준... 그래도 동생은 변하고 있어요"

[2017 비포 앤 애프터 ⑨]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제작자 장혜영씨

등록 2017.12.29 09:24수정 2017.12.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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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부수고 사고방식을 바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은 이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았습니다. 촛불, 탄핵 인용, 조기 대선... 연이어 큰 사건을 경험한 2017년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화했을까요. 내년엔 '파사'를 넘어 '현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올해 상황이 달라진 사안들, ‘보도 그 이후’가 알고 싶은 기사들, 사연 속 주인공의 현재가 궁금한 사례들을 모아 '2017 비포 앤 애프터'를 구성했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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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어른이 되면


"제가 오늘 이 라이브 보려고 네 시간 자고 5분 전에 일어났어요."
"기대 돼요. 특별한 라이브니까."

화면 아래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지난 25일 밤 10시, 유튜버 '생각많은 둘째언니' 장혜영(31)씨의 라이브 방송 풍경이다. 장씨는 이날 약 1시간 반 분량의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1차 편집본을 공개했다. 성탄절 당일이었지만, 라이브 방송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다큐를 관람하는 사람이 100여 명 가까이 됐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간 영화이니, 여러분에게 먼저 깜짝 상영회를 하고 싶었어요." (장혜영씨)

<어른이 되면>은 장혜영씨와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30)씨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지난 6월, 혜영씨가 발달장애인 동생 장혜정씨와 시설 밖에서 함께 살기로 결정하면서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관련 기사 : "발달장애인 동생과 유튜브, 다큐... 신파 찍고 싶진 않아요")

그녀가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 마음먹은 건 우연이었다. 동생이 혜영씨가 사는 서울시의 복지서비스를 받으려면 '서울시 거주 6개월'이라는 자격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그런데 혜영씨가 아니면 혜정씨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프리랜서 영상 제작자, 기획자 등으로 활동하던 혜영씨는 일손을 놓는 대신, 동생과 함께하는 나날을 기록해보자고 결심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펀딩도 벌였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제작 지원에 참여하며 두 자매의 자립을 응원했다(관련 기사 : 발달장애인 '생존' 다큐에 5천만 원, 천 명이 응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어른이 되면>은 12월 모든 촬영을 마치고, 새해 2월 말 완성을 앞두고 있다. 뷰파인더 너머, 혜정씨와 혜영씨의 1년은 어땠을까. 지난 21일, 서울시 마포구 한 카페에서 혜영씨를 만났다.

'셀프' 복지 제도는 여전히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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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어른이 되면


"6개월 후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이렇진 않았죠."

장혜정씨에게 동생과 단 둘이 보낸 반년이 어땠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장씨는 연말이면 '서울 거주 6개월'이란 자격을 충족한 동생이 주간보호시설 이용이나 활동지원서비스 등의 제도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활동지원서비스 매칭 기관 세 곳에 연락을 돌렸는데, 딱 한 곳에서 답이 왔습니다. 그래도 활동보조인으로 지원하신 분과 인터뷰까지 훈훈하게 잘 마쳤어요. 하지만 서비스 시작 이틀을 남기고 중개 기관에서 '못하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장씨는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에 서비스 취소 통보를 받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생과의 자립 생활을 다룬 <어른이 되면>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에 활동보조인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물론 '다큐 촬영'이라는 건 특별한 변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국가가 마련한 복지 제도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는 장애 당사자들이 있다는 게 장씨의 설명이다. 활동보조인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경증 장애인이나 서비스 지역이 가까운 곳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장씨는 현재의 활동지원서비스가 "하도급 체계 같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역할은 장애 당사자에게 어느 정도의 활동지원 시간이 필요한지 책정하는 데서 끝나버리고, 이후 과정에서의 책임은 전부 수급 당사자와 매칭 기관에게 떠넘겨진다는 것. 장씨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크게 좌절스럽지는 않다"면서도 "국가의 '셀프' 복지 서비스와 제도에 있어선 여전히 벽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다큐 촬영을 모두 마무리한 내년 1월, 두 자매는 활동지원서비스에 다시 도전할 생각이다. 혜영씨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한동안 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봐야 한다"며 "지금은 계획을 세우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어찌 보면 막막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장씨는 "그래도 '진짜 최악의 경우'는 면했다"고 덧붙였다.

"혜정이 시설로 돌아가고 싶어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하지만 동생의 입장에서 자립한 이후의 생활을 평가한다면, 훨씬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된 거 같아요. 제도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는 변화가 더디고, 이제 걸음마를 떼는 수준이지만요.

혜정이라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모양을 보면 확실히 긍정적인 측면이 많아요.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감정에 무척 솔직해졌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 정도로 자기 표현도 명확히 하죠. 아침에 일어나면 좋아하는 커피 원두를 갈아놓고 저를 깨우기도 합니다. 자아가 진전하고 있어요."

훈육과 순응이 전부였던 시설을 떠난 후, 혜정씨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솔직해졌다. 이젠 여럿이 밥을 먹어도 혜영씨 옆자리를 고수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곁에 부른다. 또 '스티커 사진 찍기'라는 취미도 생겼다. 요즘엔 폴라로이드 카메라 촬영에 푹 빠져있기도 하다. 혜영씨는 자매라고 해도 그간 알 수 없었던 혜정씨의 새로운 성격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6개월의 동거는 서로 떨어져 살던 10여 년의 경험을 금세 뛰어넘었다.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여름보단 더 잘 알게 된 거 같아요. 짜증도 많고, 감정도 풍부하고, 주목받는 거 좋아하고. (웃음)"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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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어른이 되면


물론 그 과정이 늘 매끄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난 9월엔 한 장애인 야간학교에 다녀보려고 했는데, 몇몇 수업을 들어보고 나서 포기했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혜정씨가 흥미를 느낄만한 수업이 많았지만, 갑작스런 단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동생이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줘야 하는 혜영씨 입장에서도 버겁긴 마찬가지였다. 곧 '이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안을 찾았다.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지인에게 부탁해 일주일에 세 번씩 음악 과외를 받았다.

지난 10일엔 세 달 동안 연습한 결과물을 여러 사람 앞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1년간 도움을 받았던 사람 30여 명을 초청해 '새로운 마지막날들'이라는 제목을 단 송년 공연을 연 것. 이 자리에서 두 자매는 따로, 또 같이 노래를 불렀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 등의 자작곡부터 <반갑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까지. 어찌 보면 두서없는 공연이었지만, 박수를 치고 응원의 목소리를 보태며 대가없는 환대를 보내는 이들이 가득했다.

"올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동생이 저 없이 다큐멘터리 스태프들과 함께 가평 캠핑을 갔던 거예요. 막내가 언제까지나 저랑 함께 있을 순 없으니까요. 2박 3일간 저는 제주도에서, 동생은 가평에서 지내보기로 했어요.

오히려 저한테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곳에서 혜정이가 영상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다큐를 함께 만드는 친구들에게 초반에 '지금 네게 혜정이는 내 동생이야 네 친구야?'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처음엔 '네 동생이지'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친구'라고 말해요."

두 자매에게 지난 1년은, 그들이 만든 노래 가사처럼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 위해' 낯선 세상에서 더 많은 친구를 만드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네트워크가 생겼구나. '네트워크'라고 하면 무언가 거창한 거 같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란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장애 당사자의 부모나 형제, 자매 등 우리랑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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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 어른이 되면



혜영씨는 올해 이 다큐멘터리를 잘 마무리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게 하는 것이 내년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장애 당사자의 사회 진출이 막히는 현상이나, 국가 복지 체계의 문제점을 수면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단다. 장애인이 시설 밖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쉬운 언어로 설명할 계획이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기억 때문에 히딩크를 좋아하는 동생과 네덜란드 여행을 가겠다는 소소한 계획은 덤이다.

"산다는 게 뭔가, 계속 생각하고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은 한 해였어요.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았을 때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실천하는 게 진짜 중요하구나 느꼈습니다. '매일 매일 무언가를 하면, 일상이라는 게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요. 신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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