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호출에도 놓지 못한 일

[지도와 인간사 5] 600년 전 강리도가 말을 걸어온 어느 날, 내 삶이 바뀌었다

등록 2018.01.10 10:43수정 2018.03.1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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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새해 첫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뜻밖의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새해를 맞는 가운데 '지도와 인간사' 연재가 다섯 번째에 이르렀습니다. 해가 바뀌는 기회를 이용하여 '지도와 인간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호출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5년, 중국 상하이의 봄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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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명나라 대항해가 ⓒ 정화사시(鄭和史詩)


어디를 가나 길거리와 각종 행사장에서 현수막과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는데, 어김없이 동일한 사나이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나이는 시선을 저 멀리 땅끝을 향한 채 손에는 두루마리 지도를 감아쥐고 있습니다.

옷자락은 바람에 부풀어 있는 듯합니다. 정화(鄭和, Zheng He, 1371년~1434년), 환관이자 이슬람 가문의 인물로 명나라 초의 대항해가. 수백 년 동안 망각의 강 속에 깊이 잠겨 있던 그를 중국인들이 불러낸 것입니다. 그해 2005년이 정화 대항해 600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중국인들에게 화제를 일으킨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퇴역 장교 멘지스가 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1421년,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다>입니다.

나그네가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 조선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처음 만난 건 바로 이 책에서였습니다. 멘지스는 이 책에서 강리도를 일본에서 만났을 때의 놀라움과 흥분을 장황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1421년 중국의 정화 함대가 바람과 해류에 떠밀려 희망봉을 돌아 충분히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나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이 문제를 나는 몇 달 동안 골똘히 고민하였다. 그때 문득 내게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 남가주 대학 역사학 교수 존 윌스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중국학 교수 조셉이 말하길, 중국에서는 항해 관련 지도와 기록이 파괴되었지만 일본엔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조사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교토의 류코쿠 대학에 강리도라는 지도가 보존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리도는 다양한 원천 자료를 편집하여 15세기 초의 세계를 웅대하고도 광활한 시야에 담았다. 유럽의 지명은 페르시아식의 아랍어에서 유래되었고 중앙아시아 지명은 몽골인, 중국과 남아시아의 지명은 중국의 고지도에서 가져왔다. 유럽에 나타난 지명을 보면 저 멀리 북으로 독일에 이르고 있다. 스페인도 그려져 있다. 지브롤터 해협이 지중해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고 북 아프리카 해안도 나타나 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한국과 중국의 상대적 위치가 정확하다. 비록 한국이 실제보다 무척 크고 일본은 작게 그려졌지만 말이다. 한국을 이렇게 크게 그린 것은 아마도 민족적 자긍심의 표출일 것이다. 여하튼 이 지도는 몹시 탁월한 지도임이 틀림없다.

강리도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의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이처럼 정확하게 그린 것으로 보아 이 지도는 의심할 나위 없이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사람이 그린 것이 틀림없다. 그가 누구일 것인가? 중국인이 아닐 수 없다." - Gavin Menzies <1421, The Year China Discovered America> 127~128쪽

조선의 세계지도, 만나는 사람마다 선물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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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지스의 책 1421, 중국이 세계를 발견하다 ⓒ 김선흥


중국인이 1421년 세계를 일주했다는 멘지스의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울러 강리도가 정화 항해의 결과를 보여준 증거라는 관점도 선후가 뒤바뀐 것입니다. 강리도가 시기적으로 정화 항해보다 앞섰던 것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강리도 자체입니다. 강리도의 독보적인 가치를 포착하여 자세히 소개한 이 책이 인기를 누림으로써 강리도가 동시 부양한 것이지요. 하지만 나그네(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과 의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나는 금시초문이지? 이게 우리 문화재 맞나?'

그 해 중국에서 나온 <정화사시(鄭和史詩)>를 읽으면서 더욱 혼란에 빠져야 했습니다.

강리도를 소개하는 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지도는 남아프리카 국회 문서 보관국(중국인들은 당안관档案馆이라 함)의 페리 선생이 복제한 것으로 범춘가(范春歌)가 남아공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왔다. 이 지도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일본에 있다는 우리의 강리도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회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페리라는 사람이 복제본 하나를 만들어 중국인에게 건넸고(중국 측의 요청이 있었을 것임) 그 사진 본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다는 스토리가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왜, 강리도가 남아공까지 갔으며, 중국인은 남아공에서 왜 그걸 구해 왔는가? 이 물건이 우리 조상이 만든 문화재라면 명색이 외교관인 나는 왜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혹시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과 혼란이 마음속에 출몰하던 중에 중국 칭다오 총영사로 발령을 받아 이동한 것은 이듬해 2006년 여름이었습니다. 칭다오에서 강리도가 나그네의 삶과 일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리도를 유포시킬 방법이 없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연락하여 1970년대에 모사한 강리도의 이미지를 받았습니다. 동료들이 그걸로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인사들을 만날 때는 늘 그걸 들고 가서 선물로 전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그리고 우리 기업체에도 건넸습니다. 강리도 전도사가 된 겁니다. 상하이로 건너가 우리 문화원에서 설명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한중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리도 부흥회를 성황리에 치를 수 있었지요. 그때 각별히 도와주었던 하현봉 문화원장의 열정과 우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칭다오에 새로 부임한 일본 총영사가 그의 관저로 식사 초대를 해왔습니다. 선물로 강리도를 가지고 가서 건넸습니다. 그가 지도에서 일본이 어디 있냐고 물어서 짚어 주었더니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군요. 웅장한 한반도에 비해 초라한 일본의 모습(시계 방향으로 돌아가 있음)에 시선이 머문 거지요. 그는 일본인들이 강리도를 자기들 소유로 여겨 연구·홍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날더러 잠깐 기다리라 하면서 자리를 뜨더군요. 좀 후에 고지도 한 장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걸 답례로 준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받아 펼쳐 보았습니다. 17세기 서양에서 만든 세계지도였습니다. 일본은 나와 있는데 한국은... 그가 복수를 한 겁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고 말았습니다.

강리도 실물을 보러 일본으로 갔는데...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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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강리도 한중일 ⓒ 김선흥


사실 냉철히 강리도를 살펴보면 일본만 특별히 작게 그린 것이 아닙니다. 한반도를 엄청 크게 그렸을 뿐이지요. 뒤집어 말하자면, 지도 전체에서 한반도와 비교해서 작게 그려지지 않은 곳은 한 곳도 없는 셈입니다.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도 상대적 비례로 따지면 우리나라 보다 훨씬 작습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이걸 보지 못하면 이 지도에서 중국만 압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지도 하단에 쓰인 글을 보면 우리나라를 일부러 크게 그렸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큰 붓과 넓은 종이가 있다고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겠지요. 초강대국에 주눅 들지 않는 기개와 자긍심, 무엇보다도 자주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중국을 가운데에 두기는 했지만(당시엔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식적으로 한반도를 크게 그린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지도는 외세에 종속된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탈출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입니다.

그런 기개와 시야가 우리에게서 사라지면서 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전성기를 빛냈던 강리도는 같은 시대에 창제된 한글과 더불어 한국인의 자주성과 자긍심, 그리고 진취성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강리도를 되살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강리도 미션을 수행하면서 두 가지가 늘 마음에 걸려 있었습니다. 첫째는 실물을 볼 수 없다는 한계였습니다. 일본 교토의 어느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보존되어 있다는 강리도. 그 실물을 볼 수는 없을까?

가끔 몽상을 했습니다. 결국 찾아갔습니다. 일본의 지인들께 부탁하여 사전에 연락을 한 후 학교 도서관 관계자를 만났습니다. 교토의 이우경 선생, 송기태 선생, 오사카의 박양기 선생, 이마가와 선생, 아오키 선생이 동행해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습니다. 강리도 실물을 보여주면 고맙겠소."

학교 측 대답은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안 됩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공수(攻守)를 여러 차례 교환 끝에 사서가 큰 선심이나 쓰듯이 따라 오라 하더군요. 우리는 별실로 안내 되었습니다. 실물 크기 그대로의 강리도 모사본이 마룻바닥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았습니다. 조상님께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면서….

또 하나의 궁금증. 도대체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떤 기록이 담겨 있을까? 임금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죄다 기록해 놓았다는 실록에 필시 강리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들어 있을 텐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떤 대화들이 오갔을까? 그걸 보면 제작 동기와 배경이며, 지리 정보를 입수한 경위며 내용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래, 실록 전집을 구해 보자. 중국에 온 김에 북한본을 구해 보자(당시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음).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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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북한 번역본 조선왕조실록 ⓒ 김선흥


체념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소형 트럭 한 대가 나그네의 집에 머리를 들이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400권이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큰 눈을 뜨고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이 물건을 끌어 온 배후는 김도균 선생(현재 제주도 출입국관리소장)이었습니다. 이제 강리도를 실록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은 당연지사. 그 결과는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

나그네를 도와준 고마운 분들

칭다오에서 두 해를 넘기자 예상치 못한 일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제 의전 비서관으로 호출된 것. 아, 이 일을 어떡하나. 정화와 강리도, 강리도와 정화를 주제로 집필을 하려던 참인데…. 만용을 부려 집필에 착수하였습니다. 밤낮으로 눈 감을 시간이 부족하여 안구건조증에 시달렸습니다. 귀국을 며칠 앞두고 마침내 탈고를 하였습니다. 표지에 강리도를 실은 졸저 3천 부를 유포시킨 후 서울로 황망히 돌아 오니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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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및 강리도 정화 및 강리도 주제의 책 ⓒ 김선흥


칭다오에서는 동료와 친구들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총영사관의 강형식, 김도균, 박호철, 허정술, 김령, 김인숙….그리고 출판을 도와준 하얼빈 송화강 잡지의 주필 이호원 등. 모두 감사합니다!

서울로 돌아온 지 6개월 만에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다시 강리도로 돌아왔지요. 국내외 관련 자료와 서적 그리고 역사 지리서들을 구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비용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차에 회갑이 찾아 왔습니다. 자녀들이 회갑 여행비라며 거금(우리 집 기준)을 챙겨 주더군요. 모두 털어 외국 책자를 구입하는 데 소진하였습니다. 그렇게 끝났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 뒤로도 공출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지요. 자녀들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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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관련 서적 강리도를 싣고 있는 책자들 ⓒ 김선흥


외국 서적을 구한 다음에는 독해 문제가 기다리고 있지요. 중국어는 스스로 해결하기도 하지만 옛 동료였던 김령 박사(홍익대)의 도움을 종종 받습니다. 일본 교토대 스기야마 교수의 강리도 관련 논문은 광주의 지인 채윤병님이 자신의 친지에게 부탁하여 번역본을 작성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종종 활용하고 있지요. 최근에는 영어는 물론 독일어, 라틴어에 정통하고 그리스어를 아는 노성두 박사에게 도움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지도와 인간사' 연재 기사에는 이처럼 여러 사람의 값진 도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종종 중국 고량주와 희귀한 지리서를 들고 나타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면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붑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구해 주었던 김도균 선생, 강리도를 매개로 맹우(盟友)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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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서 희귀본 지리서들 ⓒ 김선흥


미야 노리코가 쓴 <몽골제국이 낳은 세계도>의 번역본인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가 나오기 전에 원서를 끝까지 번역하여 일본에서 이메일로 나그네에게 보내 주었던 홍동기군(당시 와세다 대학 유학), 역시 번역서가 나오기 전 중국의 <고지도의 비밀> 해독을 도와주었던 허정술, 집필 장소를 제공해 주는 존경하는 친구 직헌(허달재, 의재미술관 이사장), 늘 격려와 도움을 주고 있는 전남대 교수 분들도 여기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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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새해인사 ⓒ 김선흥


우인들의 도움에 조금이나마 보은하기 위해서라도 금년 한 해 열심히 이야기를 달려 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동행을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번에 예고했던 내용은 다음 호에 싣습니다. 한오공의 이야기는 분리 독립시킬 것을 고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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