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용 장부'로 전락한 학교생활기록부

[요지경 학교생활기록부 2] 자유학년제가 시급한 곳은 고등학교

등록 2018.01.07 14:15수정 2018.01.0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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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학기제가 올해부터 자유학년제로 바뀐다. 1년 동안 아이들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등 각종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 수업 방식이 기존의 강의식에서 토론과 모둠활동 등의 참여형으로 바뀌게 되고, 다양한 외부 체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이 융통성 있게 운영된다.

자유학년제는 자신의 꿈과 끼를 발굴하고 향후 진로를 설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것이다. 현재까지도 학교가 어수선하긴 해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느덧 정착되는 단계에 이르렀고,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자유학년제가 제자리를 찾아갈수록 아이들의 진로는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렇듯 자유학년제가 효과적인 진로탐색 과정이라면, 정작 자유학년제가 시급한 곳은 중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다. 자유학년제를 충실히 경험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경우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 기대하고 있지만, 지금 고등학생들에게 진로에 대해 물으면 열에 일곱 여덟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한다. '고민 중'이라는 그 흔한 대답조차 듣기 어렵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이고, 뭘 잘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물며 어떤 일을 할 때 쉽게 몰입이 되고 가슴이 뛰는지 묻는 건 요즘 아이들에게 '실례'다. 명색이 스무 살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들인데 자신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아이가 손에 꼽을 정도다. 미래에 대한 질문에 한숨으로 답하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흡사 '좀비' 같기도 하다.

오랫동안 방치돼온 나머지 자존감에 생채기가 난 하위권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최상위권 아이들조차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주저하며 머뭇거리기 일쑤다. 수십 년째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으로 이어지는 희망 직업의 '고정 상수'는 적성과 진로에 대한 아이들의 성찰이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학교생활기록부(아래 생기부)에 기록된 내용만 놓고 보면, 이러한 현실과 180도 다르다. 누구든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고, 다양한 진로탐색 과정을 거쳤으며, 대학의 전공과 희망 직업에 부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하나같이 적고 있다. 지금껏 만나온 아이와 생기부 속 아이는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생기부는 교육법상 영구 보존 장부로서, 한 사람의 학창시절을 오롯이 담은 인생의 앨범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위해 활용되는 '1회용 장부'로 전락해버렸다. 곧, 대학의 입맛에 맞도록 '재구성'되는 건 불가피하고, 진솔한 생기부일수록 되레 욕을 먹게 되는 현실이 된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건, 꼭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생기부 속 아이가 '완벽해지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물론, 대다수의 하위권 아이들의 경우에는 채워 넣을 내용도 변변치 않긴 하지만 굳이 생기부가 '완벽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진학하게 될 대학들의 경우에는 생기부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 시쳇말로, 설령 '백지 생기부'라 해도 등록금만 낼 수 있다면 오라는 데가 널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수의 상위권 아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명문대에 진학해 학교의 이름을 빛낼 가능성이 있는 인재에게는 '예우'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는 그들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꾸준히 관리하며,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생기부에 녹여낸다. 그러한 비교과 활동은 누구나 참여할 순 있지만, 실상 아무나 참여하기는 어려운 '그들만의 리그'다.

프로그램은 다양해도 아이들의 이름은 대개 중복되어 있다. 서너 개 이상 이름을 올린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에 참여하랴, 학과 공부하랴, 상설 동아리에 자율 동아리 꾸리랴, 아이들은 '홍길동'이 아니고서야 그 많은 활동을 어찌 다 감당하나 싶을 정도다. 이렇듯 숨 돌릴 시간조차 없는 그들의 학교생활은 생기부를 빼놓고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완벽한' 생기부가 그들의 다양한 진로탐색을 되레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 최상위권 아이들의 생기부를 보면, 이미 고1 때부터 진로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희망하는 대학과 학과에 따라 수강해야할 과목은 물론, 가입해야할 동아리와 신청할 진로탐색 프로그램들이 정해진다.

예컨대,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라면, 내신 성적 1등급은 기본, 병원이나 보건소 등지에서 봉사활동 경험을 쌓고, 생명과학 관련 동아리를 꾸려 활동하면 생기부에 힘이 실린다. 꾸준히 헌혈도 하고, 인문학적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생기부를 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 등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건 최상위권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그들은 성적에 따라 일찌감치 진로가 결정된 경우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아이라면 꿈이 십중팔구 의사와 변호사, 교사 중에 하나다. 한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이래 의사 외의 다른 직업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어려서부터 진로가 결정되다 보니, 공부는 곧잘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적성과 특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리둥절해 한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부모의 욕망을 욕망할 뿐, 자신의 욕망에 대해선 무지한 채 여태 살아온 셈이다. 부모가 자녀의 삶을 대신 살 수 없을진대, 그들이 꿈을 이룬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생기부는 장래 아이들의 행복한 삶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이 부모의 욕망이든 뭐든 아이들을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키기만 하면 생기부의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한 번의 대학입시로 나머지 인생이 결정된다는 인식은 기성세대인 부모와 학교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고, 아이들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생기부는 오로지 대학입시 실적으로 말한다. 적성과 흥미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진로에 따라 적성과 흥미를 끼워 맞춰야 한다. 인과관계가 뒤바뀐 셈이지만, 그래야만 좋은 생기부가 나온다. 진로에 따른 일관된 내러티브를 유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생기부를 작성하는 데도 순서와 공통의 '매뉴얼'이 있다.

먼저, 진로 희망을 적고 나서 관련된 과목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아래 세특)을 기록한다. 사학과로 진학하려는 아이의 세특은 한국사와 세계사 등은 필수고, 물리학과를 꿈꾸는 아이에게는 물리 과목의 세특이 비어있으면 안 된다. 요즘에는 세특도 인문사회계열은 문과 과목 전부를, 이공계열은 이과 과목 전부를 몇 줄이라도 기록하는, 마치 번들상품처럼 묶여가는 추세다.

내용도 가급적 진로 희망에 부합하도록 맞춰야 한다. 예를 들어, 사범대 진학을 꿈꾸는 경우라면 모든 과목의 세특 내용이 대부분 교육과 연계되어 있다. 과학 수업시간에 4차 산업혁명이 학교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발표했다거나, 영어 수업시간에는 외국과 우리의 학교교육의 차이점 등을 질문했다는 내용이 기록되면 진정성 있게 보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세부 내용들은 아이들이 '친절하게도' 스스로 적어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비교과 활동인 창의적 체험활동 특기사항을 기록할 때도 '일관성'이 유지된다. 이른바 '자동봉진'으로 불리는 창의적 체험활동도 대개 진로 희망에 따라 내용이 가감된다. 참고로 '자동봉진'은 자율활동, 동아리활동, 봉사활동, 진로탐색활동의 첫 글자를 연결한 것이다.

이미 진로가 정해진 마당에 반쪽짜리 활동이 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걸 경험하고 배우는 기회라고 여기기는커녕 이 활동이 대학입시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가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생기부에 결부되다보니 소풍과 체육대회, 학교 축제와 같은 행사도 기다려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설령 지원 가능 점수에 따라 경영학과에서 국어교육과로, 경제학과에서 철학과로 진로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아이들이라도 생기부는 충실히 봉사해야 한다. 마감되기 전까지 더욱 완벽한 내러티브를 생기부에 녹여내기 위해 온갖 '1회용 교육활동'이 명멸하기도 한다. 상위권 아이들의 생기부만 보면, 이미 우리나라 공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열에 올라섰다.

우리 사회의 강고한 학벌구조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한다 해도 결국엔 온갖 편법과 불법만 난무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자신의 생기부를 열람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일까.
#학교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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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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