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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포트만의 촌철살인 못지않았던 뉴욕타임스 광고

2018년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보여준 염원과 희망 "여성들 목소리 포기 말아야"

18.01.09 17:45최종업데이트18.01.0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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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참가자들이 '타임스 업(Times Up)'이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있다. '타임스 업'은 최근 여배우, 프로듀서, 작가 등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여성 300여 명이 영화를 넘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과 남녀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결성한 단체의 이름이다. ⓒ EPA/연합뉴스


'나도 그 일을 겪었다(#MeToo)' 그러니 '이제는 그런 시대를 끝내자(Time's up)'.

아마 2017년의 할리우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폭력 가해가 폭로된 이후 사람들은 젠더 폭력을 고발하고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탄생한 '타임스 업'은 영화 산업을 포함해 미국 전역의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영화인들이 만든 단체다.

엠마 스톤, 리즈 위더스푼, 에이미 폴러, 애슐리 쥬드 등 300명에 이르는 스타들이 이 움직임에 함께했으며 138억 원 상당의 기금이 조성되었다. 특히나 올해 열린 제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참석자들은 성폭력·성추행 피해 여성들에게 연대를 보내는 의미로 검은 옷을 입거나 '타임스 업'이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나탈리 포트만의 '돌직구'는 미국 언론 <뉴욕타임스>에서 이날 밤 나온 말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발언'으로 뽑기도 했다.

그야말로 여성주의적 의제가 주요 메시지로 등장한 유례 없는 시상식이었다. 그런 만큼 기억할 만한 순간들이 많았다.

제작자 성비불균등 공개 비판

2%. 2017년 한국에서 만든 상업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의 비율이다. 204편 중에서 단 4편이다. 다큐멘터리나 독립 영화로 범위를 넓혀도 겨우 9%다. 극장에서 열 번 영화를 관람하면 한 번 정도 여성 연출자가 만든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 같은 경향은 한국보다 사정이 낫다는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의 비율은 남성 감독의 것보다 심하게 낮은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여러 시상식의 감독상 후보에 백인 남성들만 가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카데미는 82회 시상식이 열린 2010년에서야 처음으로 여성 후보인 캐서린 비글로우에게 감독상을 주었고 이후로는 전혀 없다.

한마디로 영화 산업계 내부의 성비 불균형이 후보 선정과 수상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2017년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흥행 순위 상위권을 휩쓸 정도로 다양성이 확장된 시기였지만 연출과 제작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새다.

미국 매체 <뉴욕타임스>에서 다룬 제75회 골든글로브 '최고와 최악' 순간들.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 "(감독) 후보가 모두 남자입니다"라고 지적한 것을 '가장 날카로운 발언'으로 꼽았다. ⓒ 뉴욕타임스 갈무리


어쨌든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역시도 '남성 감독들의 잔치'였다. 이제는 너무 오래된 문제라 비판조차 하기 지겨울 정도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한 마디를 남겨야 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바로 시상자로 등장한 배우 나탈리 포트만이다. 후보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그녀는 깔끔하지만 묵직한 한 마디로 이 사태를 요약했다.

"지금부터 모든 남성 후보들을 소개하겠습니다(And here are the all-male nominees)."

변화를 이끈 주체적인 여성들

'#MeToo' 운동과 'Time's up' 프로젝트의 도화선은 하비 웨인스타인의 부정을 폭로하는 기사였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여성들의 용기 있는 발언과 이를 캠페인으로 전환한 활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운동이 만들어낸 성과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는 이런 흐름을 주체적으로 이끈 여성 운동가들이 스타들과 함께했다.

가령 배우 미셸 윌리엄스는 2006년 'Me Too' 운동을 최초로 고안했던 운동가 타라나 브룩과 함께 레드 카펫에 등장했다. 또한 엠마 스톤은 올해 자신이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에서 연기한 빌리 진 킹과 함께 참석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그녀는 현역 시절부터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해왔으며 성소수자 인권 개선에 앞장서 왔다.

▲ 제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베벌리힐튼호텔에서 열린 제75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TV 영화 및 리미티드 시리즈 부문 4관왕에 오른 '빅 리틀 라이즈'의 여배우 군단이 트로피에 입맞춤하고 있다. 왼쪽부터 여우조연상을 받은 로라 던, 여우주연상을 받은 니콜 키드먼, 조 크래비츠, 리즈 위더스푼, 셰일린 우들리 순이다. ⓒ EPA/연합뉴스


이 같은 흐름은 시상식에서도 이어졌다. 진행자인 세스 마이어스는 자신이 농담의 운을 띄우면 객석의 스타들이 펀치 라인(농담의 가장 핵심이자 재미있는 부분)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령 세스가 '골든 글로브는 올해 75해를 맞았습니다'라고 말하면 제시카 차스테인이 '그리고 남성 배우의 아내를 연기하는 배우는 여전히 32살이죠'라고 완성하는 식이었다.

유독 여성 배우에게만 가혹한 할리우드의 연령 차별을 비꼬는 훌륭한 멘트였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농담은 에이미 폴러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세스 마이어스가 운을 띄우겠다고 말하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비꼬더니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이봐 세스, 난 할리우드의 여자야. 우리가 많은 일을 함께 겪긴 했지, 하지만 내 농담을 재밌게 만들기 위해서 누가 판을 깔아줄 필요 따위는 없어."

새 시대를 희망했던 발언과 소감들

그런가 하면 발언과 소감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스타들도 있었다. '타임스 업' 프로젝트의 기금 마련에도 함께 했던 배우 케리 워싱턴은 인터뷰에서 "우리가 집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에 선 이유는, 우리가 하지 않은 부정한 행동 때문에 오늘 밤 다른 곳으로 빠져 있거나, 테이블의 우리 자리를 포기하거나, 연예계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엘리자베스 모스 역시도 <핸드메이즈 테일>로 드라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작품의 원작자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가릿 앳우드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녀는 "여성인 우리는 종이 위에 존재하지 않으며 공백이나 페이지 가장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앳우드의 말을 인용하며, 저항에 나선 여성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직접 쓸 것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또한 배우 로라 던은 드라마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회복적 정의를 위해 피해자를 지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용기 있는 목격자들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응징을 두려워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우리 문화의 새로운 북극성이 될 것이다"라는 희망을 전했다.

▲ 제 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지난 7일(현지시간), 2018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 ⓒ EPA/연합뉴스


가장 인상 깊은 소감은 오프라 윈프리로부터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고 스스로의 꿈을 좇기 위해 일터에서의 추행과 폭력을 견뎌온 여성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우리가 절대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성폭력이 보이지 않지만 매우 광범위한 문제임을 드러냈다.

오프라 윈프리는 동시에 "너무 오랜 시간, 여성은 힘 있는 남성들에게 감히 진실을 말하면 신뢰를 잃거나 무시당해 왔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습니다"라며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기도 했다. 윈프리의 수상 소감과 같은 순간이 한국에도 오기를 고대하며 아래에 오프라 윈프리의 수상 소감 마지막 부분을 남긴다.

"나는 이 방송을 보는 모든 소녀들이 새날이 밝아옴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새 시대의 동이 튼다면, 그것은 여기 모인 이들을 포함한 많은 수의 위대한 여성들과 경이로운 약간의 남성들이 부단히 싸워 더 이상 누구도 '나도 그 일을 겪었어(Me too)'와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향한 리더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해도 변화를 위한 흐름이 이어지길 희망하며

이처럼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전개된 반(反) 성폭력·성추행 운동의 성과와 연대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꼭 행사장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폭력을 최초로 폭로한 <뉴욕타임스>는 시상식 중간에 매우 감동적인 광고 한편을 방송했다. 종이처럼 하얀 화면 위로, '그가 말했다(He said)'와 '그녀가 말했다(She said)'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떠오른다. 마치 남성들의 기득권에 밀려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부차적인 취급을 받던 현실을 반영하듯 '그녀가 말했다'는 '그가 말했다'라는 문장의 뒤에 이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가 화면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말했다'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이미 묵직해 보인다. 마치 '#MeToo' 운동이 발발했을 때처럼. '이제는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되었다'고 모두가 외쳤을 때처럼(Time's up). 누군가 '#OOO_내_성폭력'을 이야기했을 때처럼.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았을 때처럼. 많은 사람이 '묻지 마 살인'이라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여성이라서 죽었고 그래서 누군가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라고 소리쳤을 때처럼. '디지털 성범죄가 이제는 퇴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처럼.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고 지목했을 때처럼. 그리고 우리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했을 때처럼.

그리고 <뉴욕타임스>의 광고는 이런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진실은 힘을 가지고 있다. 진실은 절대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진실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17년,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확인하고 드러냈다. 그리고 마주한 진실 앞에서 변화를 위해 연대했다. 절대 위협받지 않을 힘을 가진 목소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의 여러 사람들이 확신하며 말한 것처럼 말이다.

골든글로브 할리우드 여성운동 페미니즘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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