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이 명령하고 거지왕이 창조한 '생지옥'

[서산개척단⑫] "독재 좀 하면 어때!" JP가 설계한 서산개척단

등록 2018.01.20 20:08수정 2018.01.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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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손연복씨를 만났다. 김종필 전 총리(JP)와 서산개척단의 연관성을 찾던 끝에 만난 인물이다. 서산개척단 연대장 출신인 손씨. 설득하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렸다.

2017년 초, 손씨는 조심스레 서산개척단 탄생 과정에 입을 열었다. '거지왕' 김춘삼과 김 전 총리가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5.16 쿠데타 직후 손씨는 김춘삼과 함께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본부를 같이 방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5.16이 딱 나고 나니까 김춘삼씨가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본부를 간다고 그러더라고. 거기서 JP가 김춘삼을 만나서 '기왕에 혁명한 거 혁명정부가 수권능력을 펼칠 판을 짜자'는 거야. 그래서 사회 문제아들을 김춘삼씨에게 맡겨 가지고 5.16 정부가 통치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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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 (자료사진) ⓒ 사진공동취재단


김춘삼은 1950년대 전국 10여 곳에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합심원을 세웠다. 부랑아 구제 사업이 명분이었지 실상은 조직적 폭력 행위와 원생 착취로 악명이 높았다. 이와 동시에 원생을 이용한 개척단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1961년 5월 1일에는 '한국합심자활개척단'을 조직, 강원도에서 개척 사업을 진행했다. 그 직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김춘삼의 조직은 자연스럽게 국가재건최고회의로 흡수되게 됐다.

"JP가 전국 깡패 놈들과 거지들은 다 거지왕한테 맡기라고 해서 그놈들의 사돈의 팔촌까지 진주, 울산, 춘천, 영주, 태백 5개 지구 국토건설단에 잡아넣었어."

국토건설단이 창단 후 부랑아로 낙인찍힌 전국의 청년들이 납치돼 강제노역에 시달렸다.점차 사업은 위태로워졌다. 납치된 청년들이 현장을 계속 탈출했기 때문이다. 혁명정부는1961년 7월 7일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을 임명하고 정 장관을 통해 개척단 사업을 확대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서산개척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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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서산개척단 연대장 시절 손연복, 1991년 서산시 의원으로 출마한 손연복의 선거 공보물, 1996년 자유민주연합 중앙당 건설분과위원장 당시 김종필과 함께 찍은 사진 ⓒ 이조훈


김종필은 이제라도 응답해야 한다


손연복은 누구?
서산개척단 출신 손연복씨는, '거지왕의 아들'로 불렸다. 11살 거지들에게 붙잡혀 거지왕초 밑에서 동냥생활로 연명하다 부산에서 거지왕 김춘삼을 따르며 아버지로 부르게 됐다. 이후 서울역 앞으로 거처를 옮겨 부왕초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서울역 앞에서 잡힌 그는 서산개척단으로 끌려갔다.

민정식 개척단장은 '거지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손씨를 간부로 승진시켰고 이후 연대장까지 발탁됐다. 이후 개척단 재정 관련 업무까지 맡게 된다. 정부에서 지급받은 보금품을 직접 인수하러 다니게 된 그는 민 단장이 개척사업의 지원금을 착복하고 관료들에게 상납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전국 거지 왕초들이 서산개척단에 끌려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외부세력의 힘을 이용하게 됐고, 개척단 해산 후 그 세력을 이용해 시의원에 출마해 서산시 시의원 및 부의장까지 지내게 된다. 충청지방에서 정치력을 확대한 그는 1991년 김종필이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에서 건설분과위원장까지 맡게 된다.
"자고 나면 사람이 줄어. 군사정부 혁명과업이 달성되기도 전에 사람이 없는 거야. 자꾸 도망가 버리니까. 그래서 민간으로 넘어온 게 서산지구 개척단이야."

증거는 사진으로도 남았다. 서산개척단에서 당시 발행한 '형설촌 안내'라는 책자를 보면, 정희섭 보사부 장관이 개척단 현장을 내방한 사진이 등장한다. 개척단 사업의 민간 운영자는 민정식 단장으로 위촉된다. 그러나 실질적 운영은 중앙정보부가 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개척단 관련 공문서 중 일부 첩보 문서들은 대전 대공분실에서 발신해 충남도지사 또는 보건사회부 및 내무부로 이송됐음을 확인했다. 또한 개척단에서 일한 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상시적으로 개척단 활동을 감시하고 이를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개척단 주위로 정보부 사람들이 감시하고 다녔지. 주변에 나타나면 우리는 알지. 우리랑 옷도 다르고 모양새가 다르니까. 그렇게 사업이 잘 되는지 감시하고 다녔어."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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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이 서산개척단을 내방, 박정희 대통령이 금일봉을 하사 - 형설촌 안내 책자, 1964년 발행 ⓒ 이조훈


1961년 6월 10일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현 국가정보원의 전신 기관이다. 창설 직후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부장은 김종필 전 총리였다. 개척 사업을 초기 단계부터 설계하고 이후 관리 감독한 조직의 수장이 JP였던 셈이다. 김 전 총리가 개척단 사업에 지속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는 아래 사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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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자활개척단 발대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김종필, 1968년 5월 13일 - 뒤로 대한자활개척단 단장 김춘삼의 모습이 보인다. ⓒ 이조훈


JP와 서산개척단의 연결 고리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1961년 충남대에서 열린 김종필 연설장을 찾은 안영진 전 <중도일보> 기자는 취재 당시 김 전 총리가 개척단에 대해 보인 관심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 기자는 "JP가 고향일이라 암암리 뒤에서 (개척단 사업에) 입김을 넣어준 것은 사실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JP가 연설을 하는 도중 내뱉은 말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차마 이 대목은 기사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 그 자유 자유하는데, 지금 우리가 너무 가난하잖아? 앞으로 우리가 잘 살아야하는데, 설령 독재 좀 하면 어때!"

이렇게 설립된 개척단 사업의 자금은 미국의 원조사업 'PL-480'을 통해 가능했지만, 이 지원금은 정치자금으로 탈바꿈됐다.("지원금 빼돌려 대선자금으로"... 촘촘히 '부패 그물' 짠 박정희)

1966년 6월 서산개척단원 800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여기에는 당시 정부가 개척단 사업에 사용해야 할 비용이 어떻게 유용됐는지를 묻는 내용이 있다.

"정부당국에서 1. 지원해주신 보조금이 어느 정도며 또 어떻게 사용된 것인지? 2. 외원당국에서 지원해주는 양곡은 얼마나 되며 또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처리되는지?3. 구호물자 등은 어디서 나오며 얼마나? 그러고 어떻게 나오는지? 또 그것을 매각했다면 얼마나 되는지?"

당시 정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업에 관여한 채 지금까지 살아있는 핵심 정부관료, 김종필은 이제라도 응답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조훈 PD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5년 동안 좇아왔으며, 영화 <서산개척단> 개봉을 준비 하고 있다.
#김종필 #서산개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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