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 직전 보도연맹원 40명 목숨 구한 시골 지서 주임

[박만순의 기억전쟁] 충북 영동 용화면민들이 지서 주임 공덕비 세운 사연

등록 2018.01.22 12:21수정 2018.01.2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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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철 용화지서에서 살아난 보도연맹원 강학철 ⓒ 박만순


노인들과 아낙네들의 발걸음이 지서장 관사로 이어졌다. 이들의 손에는 쌀, 감, 달걀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어떤 이는 새끼돼지를 품에 안고 왔다. 관사에는 지서장이 없었고, 부인 이청자가 있었다. "이건 뭐예요?", "지서장님이 저희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작은 정성을 갖고 왔어요" 하지만 이청자는 손사래를 쳤다. "이러면 안 돼요. 지서장님이 아시면 큰일 나요" 보도연맹원 가족들이 가져온 쌀과 선물을 받았다가 남편한테 혼이 나고 다시 돌려준 이청자는 부득불 주민들한테 갖고 온 물건을 돌려주었다.

얼마 후 용화국민학교에서는 이섭진 환영대회가 열렸다. 용화면 유지들이 보도연맹원 40명을 살려준 이섭진 지서장을 환영해야 한다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유지들은 면내 마을을 다니며, 행사 취지를 설명하고, 모두 참여해 달라고 했다. 용화초등학교 개교 이래 최대 인파가 모여들었다. 시골 작은 학교에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보도연맹원과 그의 가족, 그리고 면내 주민들이 참여했다. 환영대회에서는 지서장이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 은공이 다시 회자되었고, 참석자 모두 손뼉를 치며 칭송했다.

"당신이 죽더라도 보도연맹원을 살려야 해요"

이섭진 지서장은 관사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런 후에 부인과 상의했다. "본서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는데, 아무래도 전부 처형할 것 같소. 어찌하면 좋을까요?" 부인은 펄쩍 뛰며 "절대 보도연맹원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내서는 안 돼요. 꼭 살려야 돼요" 라며 단호히 말했다. 이섭진은 "당연히 살려야 하는 데 그러면 내가 죽을 텐데"라고 말했다.

이지서장은 전쟁 직후 영동경찰서 사찰과의 전화를 받았다. 보도연맹원들을 지서에 소집해 놓으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이규필, 임광재, 이재호, 임모 순경에게 마을을 다니며 보도연맨원을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부하들이 마을을 순회한 결과 보도연맹원 40명이 지서로 왔다. 유치장이 비좁아 지서 앞마당에 앉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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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진과 박청자 전 용화지서장 이섭진과 그의 아내 이청자 ⓒ 박만순


이섭진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나서 군인과 경찰들이 후퇴하기 바쁜 상황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왜 소집했을까? 특히 이 일에 경찰서 사찰과와 CIC(특무대)가 나선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을 곱씹어 봐도 이들을 후방으로 격리시키기 위한 조치는 아닌 것 같았다.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다가, 부인에게 상의한 것이다. 부인 이청자는 "당신이 죽더라도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야 해요"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계엄령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와 특무대의 지시를 거부하고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영동경찰서에 근무했던 정시래와 권혁수도 증언한 사실이다.

정시래 증언에 의하면, 영동경찰서장 김경술이 평소 가까웠던 애기사(愛機社) 사장 노병도가 예비 검속되어 경찰서에 끌려오자 석방시켜 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무대 영동분견대장이 권총을 들이대며 "죽고 싶냐"고 협박해, 그 자리에서 달아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정시래는 이 증언을 하며 이섭진 지서장도 당시 목숨 걸고 그 행동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충북 괴산군 증평면(현재는 증평군) 증평지서장 안길룡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안길룡 지서장은 괴산경찰서의 지시를 받고 보도연맹원을 소집했다. 그중 일부를 풀어 주었는데, 헌병대에서 와 "네가 뭔데 보도연맹원을 풀어 주었냐?"며, 근처로 끌고 가 권총으로 총살시켰다. 증평지서장 사례 증언은 충북도경 경무과 보안과에 근무했던 윤태훈(6.25 당시 27세)씨의 증언에 기초한다.

면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쌀과 돈을 모아 공덕비 세워

이런 상황에서 이섭진 지서장은 자신이 죽더라도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순박한 농민들이었고, 과거 남로당에 활동했던 사람들도 모두 전향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서와 영동경찰서가 수시로 주최한 반공교육과 각종 행사에도 순순히 응했었다.

결국, 지서 유치장 마당에 집결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섭진 지서장이 "소집이 끝났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말에, 죽음의 땅에서 벗어난 줄도 몰랐던 것이다.

이섭진 지서장 환영대회가 끝난 후 용화면 유지들은 공덕비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공덕비는 보도연맹원 40명을 살려 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공덕비 설립 취지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지서장은 용화지서장 근무 시에 면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주민들의 애환과 고충을 항상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유지들은 마을을 다니며 주민들에게 쌀 한 되씩을 모았다. 보도연맹원이면서 살아난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도 흔쾌히 참여했다. 보도연맹원으로 당시에 살아난 강학철(전쟁 당시 21세. 2015년 작고)도 쌀 한 되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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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모습 청주시 성화동 역사동아리 주민들이 이섭진 영세불망비에 역사탐방하고 있는 모습 ⓒ 박만순


마침내 용화지서 앞에 '이섭진 지서 주임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支暑主任 李燮晉 永世不忘碑
剛明莅事 濟之慈仁 (강명위사 제지자인)
鎭玆一區 傍及外鄰 (진자일구 방급외린)
家家懷德 人人迎春 (가가회덕 인인영춘)
路上片石 永年不泯 (노상편석 영년불민)
-檀紀 四二八五年 一月 十一日 住民一同-

지서 주임 이섭진 영세불망비
강직하고 현명하게 일에 임하여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했네
한 고을을 잘 다스리니 그 덕이 이웃에까지 미쳤도다
모든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듯 집집마다 그의 덕을 기억하여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
-1952년 1월 11일 주민 일동-

'영원히 잊지 말자'라는 약속은 지켜지고 있는가?

영세불망비는 구박을 받았다. 영동경찰서에서는 영세불망비를 용화면 내룡리 산골짜기로 이전할 것을 명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도로확장공사로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한참 후에야 이를 발견한 주민과 후손이 경찰서와 면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해, 현재 면사무소 초입 대로변에 세워졌다.

이섭진 지서장의 처지 또한 영세불망비와 같았다. 면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이섭진은 1950년 수복 직후 영동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된다. 경찰 조사를 받은 그는 상급기관에 '문제 경찰'로 찍혀, 좌천되어 시골지서만을 맴돌았다. 결국, 1961년에 '점심에 반주를 한잔했다'는 이유로 강제퇴직 당했다. 하지만 이섭진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화병이 생겼고,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어 1989년 69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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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표지판 글씨를 식별할 수 없는 안내 표지판 ⓒ 박만순


영세불망비는 한자투성이로 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후세들이 영세불망비 설립 취지와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한글로 된 안내 표지판이 시급했다. 지역 여론에 의해 영동군에서는 안내표지판을 2010년에 세웠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안내 표지판은 비, 바람으로 인해 글씨를 알아보기가 불가능하다. 1952년 연초에 용화면민들이 맹세한 '비록 길가에 세운 조각돌일지라도 영원히 잊지 말자'는 약속을 후세들은 이행하고 잊지 못하다.
#이섭진 #영세불망비 #환영대회 #보도연맹 #이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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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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