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떼이거나 밀리는 번역가의 삶, 이러면 누가 하겠나

[서평] 박상익 교수 <번역청을 설립하라>를 읽고

등록 2018.01.22 10:23수정 2018.01.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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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청을 설립하라."

1월 8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오른 제안이다. 나 역시 번역가인지라 이 글을 보자마자 호기심이 일었다. 정부에 번역청을 설립하라고 호기롭게 요구한 이가 누군지 궁금했다. 제안자는 우석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강의하며 인문학을 번역하는 박상익 교수다.


번역청을 설립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어서, 박 교수가 쓴 <번역청을 설립하라>를 읽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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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청을 설립하라 <번역청을 설립하라> 박상익 저, 유유 ⓒ 함혜숙


박 교수는 10년이 넘도록 꾸준하게 번역청 설립을 주장했다. 번역 환경이 갈수록 더 악화되자 2006년에 <번역은 반역인가>를 출간한 후 각종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해서 <번역청을 설립하라>로 묶어 냈다.

정부에서 국외 고전번역을 지원하던 '명저번역지원사업' 예산이 절반 이상 축소된 것에 대해 기획재정부 관계자가 '학자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는데 굳이 예산을 들여 번역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해, 박 교수는 참담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과학의 기본 개념을 파악하도록 잘 가르치지도 않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느닷없이 영어로 과학을 가르친다. - 중략 - 내용만 익혀도 부족할 시간에 외국어 부담까지 겹치니 한국어로 익혔을 때와 비교하면 절반도 못 배운다." - 86쪽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번역국'을 설치해 전 세계 지식을 거의 모국어로 번역했다. 덕분에 모국어만으로 공부해도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2008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는 영어를 못했지만, 일본어만으로 관련 지식을 습득해 세계 최고의 학문적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


박 교수의 '번역은 국력'이라는 말이 진부한 표현이 아닌 것이다. '번역은 자국어의 흥망뿐 아니라 한 나라의 학문 수준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41쪽)'라는 이야기를 마음속에 새길 만하다.

인공지능 번역 시대에 번역청이 필요할까?

2016년에 구글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대국을 벌여 4대 1로 승리했다. 그 결과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암울한 예측이 사회를 지배했다. 번역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계가 번역가를 대체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냐는 걱정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청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세계 언어의 벽을 없애고자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자동번역기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박 교수의 말대로, 이 사업이 성공하려면 수많은 외국 명저를 자국어로 번역한 방대한 규모의 텍스트가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 기계가 영어를 한국어로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 번역하려면, 영어권에서 출간된 모든 문장과 다양한 표현을 기계에 넣고 방대한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 머릿속에 다양한 표현을 인풋해야 아웃풋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출판계에서 이미 많은 외국 저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번역을 출판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독서 시장이 좁다는 이유로, 출판사들이 팔릴 만한 책만을 기획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에서도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외국학 전공의 석사, 박사학위 논문 절반 이상이 번역으로 채워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대학원과는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박 교수는 번역을 도로, 항만, 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인식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번역가의 처우부터 개선해야

2015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철학자 김재인 박사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번역하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받은 번역료는 인세 350만 원으로 알려졌다고.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온전히 번역에만 집중하기 힘들다.

터무니없이 낮은 번역료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으니 다른 일을 병행하거나 결국에는 번역에서 손을 떼게 된다. 초보 번역가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최저시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입으로 간신히 버티는 경우가 태반이다.

번역료도 낮은데 번역료 지급일마저 너무 늦다. 업계 관행이라는 이유로, 책이 출간된 후에 번역료를 지급하는 출판사들이 많다. 번역 원고를 넘긴 후 책이 출간되기까지 빠르면 몇 개월, 늦으면 1년이 넘어간다. 그마저도 출간이 취소되면 번역료를 지급하지 않기도 한다.

이러니 누가 번역을 직업으로 삼으려고 하겠는가. 현재까지는 번역가들의 열정과 사명감으로 번역 시장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한다면, 번역 품질은 계속 떨어지고 양질의 한국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도 멀어진다. 그래서 번역청을 설립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번역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박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

번역을 필수 교양으로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영어 교육 열풍이 드세다. 인공지능 번역기 때문에 다들 충격을 받았다지만, 여전히 영어 교육 열기는 식지 않는다. 학생뿐만 아니라 성인도 영어 공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평생 영어 교육에 쏟아붓는 비용을 생각해 보자.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다. 더 안타까운 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도 제대로 된 결실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박 교수의 주장대로 중등학교 외국어 교육과정부터 번역 교육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게 힘들다면 대학에서라도 '번역'을 필수 교양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번역 교육은 외국어 공부와 한국어 공부, 글쓰기 공부, 인문학 공부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교육 행위다. 번역을 잘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모든 분야를 골고루 익혀야 한다. 뭐 하나라도 빠지면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없다.

"영어는 자신이 있는데, 한국어로 옮기려니 어려워요."

번역가 지망생들이 종종 이렇게 하소연한다. 그동안 영어 공부에만 집중하고 한국어 글쓰기 공부에는 소홀했던 탓이다. 반쪽짜리 공부를 한 셈이다.

"번역을 하다 보니까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이 안 돼요."

역시 자주 듣는 말이다. 탄탄한 독서량이 뒷받침되지 않아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어릴 때 독서 습관이 들면 성인이 돼서도 그 습관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면 독서 인구가 늘어날 테고, 상업성과 상관없이 양질의 외국 저서가 더 많이 한국에 소개될 수 있다.

번역 수요가 늘어나면 번역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된다. 독자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번역으로 외국 저서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다. 번역 교육 하나로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 공부를 하는 건 통역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글쓰기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는 것도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번역도 마찬가지다. 번역 공부는 번역가만 하면 된다는 발상에서 벗어나, 교양을 쌓듯 번역 공부를 해야 한다. 번역 공부는 종합적인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더불어,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키울 수 있다.

다양한 번역 분야를 아우르는 정책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제안에 하나만 더 보태고 싶다. 고전과 문학 번역 연구에만 치중하지 말고, 영상번역과 게임 번역 등 여러 분야의 번역을 학문과 교양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영화와 드라마 및 다큐를 번역하는 영상번역가 역시 인문학 소양을 갖춰야 한다. 게임 스토리에도 고전과 인문학이 녹아 들어가 있다. 각 분야별로 서로 특성이 다르지만, 번역가로서 갖춰야 할 자질은 같다. 번역을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어 고전과 인문학 번역에만 투자하면, 균형감 있는 문화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제안이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당장 번역청이 설립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사회적으로 논의가 돼야 한다. '번역청을 설립하라(https://goo.gl/CH3qsM)' 청와대 청원 마감일은 2018년 2월 7일이다.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

박상익 지음,
유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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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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