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잘못 들이면 망한다'는 저주, 민사린들이 답하다

['며느라기'가 우리에게 남긴 것①] 억눌린 여성들의 거친 목소리에 담긴 의미

등록 2018.01.27 20:52수정 2018.07.3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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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여성이 '시월드'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 웹툰 <며느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주인공 민사린이 시댁에서 부당한 일을 겪으며 끙끙 앓을 때마다 수많은 여성이 함께 울고 웃던 지난 8개월. <며느라기>가 우리에게 남긴 변화와 과제가 무엇인지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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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며느라기>의 한 장면(작가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 <며느라기>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오마이뉴스>에서 전화가 왔다. '명절과 며느리'를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것이다. 전화를 끊기 전부터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주제가 '명절', 게다가 '며느리'라면 할 말은 차고 넘쳤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아마 결혼한 여성들 중 시댁이 있는 이라면, 하룻밤을 새울 정도의 이야기보따리 몇 개쯤은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보따리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몇 년에 걸쳐 친정의 차례를 없애고, 두 번의 명절 중 한 번만 시댁에 가기로 한 경험을 글로 썼다.


명절 연휴 중 그 글이 기사화되었다. 곧바로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와 '다음'에도 올라왔다. <오마이뉴스>에 달린 댓글은 20여 개에 불과하지만, 두 군데 포털 사이트엔 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지금까지 모두 합해 5500개가 넘는다.

대체로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다는 비율이 여성보다는 남성 쪽이 훨씬 높기 때문에 험한 내용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대충 살펴봐도 그랬다. '여자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 '이기적이다' '그럴 거면 결혼을 하지 말지' '재산 줄 때만 시댁이 최고인가?'하는 내용이 다수였다. 기사가 올라온 직후 댓글 작성자의 비율은 남성이 90%에 달했다.

반응이 좀 있겠다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우리 집 차례를 없앴을 뿐이고 명절 중 한 번은 시댁 스타일에 맞추겠다는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난리들인가. 조금의 균열도 용납하지 못하는 어떤 이들의 날선 아우성으로 댓글 창은 아수라장이 됐다.

오후 시간을 보낸 후 자기 전 다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 사이 댓글 성비는 남성은 70%로 줄어들었고 여성이 30%로 늘어나 있었다. 특히, 비난 댓글에 반박하는 내용의 댓글이 많이 눈에 띄었다.

여성들은 댓글보다는 '추천(공감)'을 많이 누르는 편이었다.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을 살펴보니, 내 글에 공감한다거나 명절이 불합리하다는 호소, 비난 댓글을 재치 있게 받아친 내용이 많았다.


1월 24일 현재 추천 수가 가장 높은 댓글은 '진짜 조상 잘 만난 사람들은 지금 해외 가서 놀고 있다'(1만3267건) '잘했다. 어른들 눈치 보지 마라. 며느리도 아들도 나이 마흔이 넘었다. 서로 존중해야 한다.(8111건)' '손끝 하나 안 놀리는 사람들이 제삿밥은 두 그릇 먹냐'(7534건) 순이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성들이 누른 엄지손가락(추천)이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듯했다. 비난 댓글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신기하게도 내 글에 공감한다는 내용의 댓글과 추천에 나는 가슴이 설렜다.

물론 나를 응원하거나 글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한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욕설과 가부장적인 윽박지름에 침묵하지는 않았다. 나는 댓글을 달고 공감을 누른 그들의 행동에 고무되었고, 앞으로도 글로써 그들의 움직임을 계속 부추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본인 밥은 직접 드세요" 거친 댓글에 묘한 쾌감

얼마 전 SNS에서 인기리에 연재되던 웹툰 <며느라기>가 끝났다. 이제 막 결혼한 민사린과 무구영이 가부장적인 현실에서 겪는 갈등을 실감 나게 그린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특히 여성들)이 이 웹툰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나 역시 새 게시물이 올라올 때마다 '좋아요' 또는 '화나요' 누르고 열심히 공유도 했다.

사실 <며느라기>는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소재로 썼을 뿐, 급진적이거나 변혁적인 내용은 없었다. 같은 성씨의 남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떠드는 사이, 성씨가 다른 여성들이 앉지도 못하고 주방에서 음식을 하고, 나르고, 치우는 모습을 과장 없이 웹툰에 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며느라기> 페이스북 페이지에 새 게시글이 올라오면 곧바로 수백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까지 댓글이 달렸다. 특히, 프로필 사진으로 짐작컨대 10대나 20대 여성으로 보이는 이들은 민사린이 시댁에서 받는 처우에 대단히 분노하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민사린을 향해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아온 무구영과 '이혼하라'는 댓글이 쏟아졌고, 무구영과 시아버지에겐 거친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틀린 말이 없었다.

"저기요, 본인 드실 밥은 시켜 드시든지 직접 해먹을 때도 있어야지. '와이프=밥 차려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남편=돈 벌어다 주는 사람'으로 등식이 똑같이 가는 겁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저런 사람들이 딱히 악의가 있거나 한 게 아니고 뭐가 문제인지 모르며 너무 흔하게 많다는 데 있다. '개념남'은 그냥 복불복. 그리고 그 비율은 거의 유니콘에 가까움."

"이 집구석의 큰 문제점이 뭔지 아냐? 사람관계라는 게 노력을 하면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하는데 사린이는 시댁 식구들한테 잘 보이려고 처음부터 결혼기념일도 챙기고 생일 밥상도 챙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데 시댁 식구들은 사린이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눈곱만큼도 없음. 그냥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존재."

댓글을 읽으며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열린 공간에서 '거칠고 논리적인 언어'는 오랫동안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롱과 위트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완곡한 표현, 둘러 말하기, 친절하고 조곤조곤하게 넌지시 알려주기 등 여성들에게 '허락된' 말투에 대해 노트 한바닥은 쓸 수 있다. 직설적이고 논리적이고 때론 공격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여성들은 '드센 여자' '재수 없는 여자' 등으로 비난받고 배척되었다.

거친 것이 좋고 부드러운 것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에겐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언어들만 쓰도록 강요되었다는 점이 문제다. 권력과 (사회, 경제)자본이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선 여성은 이를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움받고 소외되고 배척당하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며느라기>에 달린 거침없는 댓글은 억눌린 것이 터져 나온 해방의 목소리이고, 그동안 온갖 억압과 폭력에 시달려온 이들이 이를 되받아치는 일종의 미러링이다.

사나운 댓글들에 심장이 벌렁벌렁하면서도 이 전사와 같은 여성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나는 부러웠다. 조만간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며느라기' 이후, 우리에게 필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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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며느라기> 한 장면 ⓒ <며느라기> 작가 수신지


하지만 쉽지 않다. 굳건한 가부장제의 벽 앞에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호소하는 댓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거 단행본으로 안 나오나요? 아빠 좀 갖다 주게요. 아빠가 고부갈등은 둘만의 문제니까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하는데 항상 느끼기에 제일 큰 가해자는 아빠거든요. 무구영보다 더 극악무도하고 뭐가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저는 1일 1비혼 다짐 중. 이 만화보다 현실이 더 심해요."

"남자들은 이거 안 본다. 불편하기 때문에 보기 싫어함. 본인들이 해오던 나름의 질서가 깨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본인이 전적으로 수발 받던 입장에서 직접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알면서도 외면하는 거..."

"진짜 무서운 건 나도 시댁살이 하기 싫고 며느라기 하기 싫은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면 나도 결국엔 이 만화 속 주인공처럼 손님으로 간 시댁에서 내가 설거지며 후식이며 다 하고 있을 것 같고 각종 집안 행사에 희생하고 있을 것 같다는 거야...ㅠㅠ"

이제 남은 것은 댓글의 에너지를 현실로 옮겨오는 일이다. 현실을 목도했고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안 이상,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불만이 쌓여 툴툴대고, 화가 나서 짜증을 내고,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는 것에서 이제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울고 외쳐도 현실은 꿈쩍하지 않는다. 바뀌지 않으려는 그들은 그냥 내버려 두자. 나의 선택이 달라지면 된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지금이 편하고 좋은 이들은 당신의 변화에 악을 쓰며 욕지거리를 해댈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차분하고 익살스러운 논리적인 목소리로, 때론 거칠고 흥분한 목소리로 나와 당신을 열렬히 응원하고 방어해 줄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휘돌아다니는 목소리를 현실로 끌어내자. 나도 하고 너도 하면 세상은 바뀐다. 온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응원하자. 세상을 변하게 할 힘은 우리에게 있다.
#며느라기 #페미니즘 #여성주의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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