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은 게 없다는 여자, 제 탓 같습니다

[초보아빠 육아일기] '엄마' 이름만 남은 아내... 하고 싶은 거 다 해!

등록 2018.02.03 14:35수정 2018.02.03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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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입니다.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날이지요. 어제 저녁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아기와 함께 미리 케이크를 자르고 노래를 부르며 생일파티를 하고, 우리 부부는 생일을 맞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며 한창 들떠서 대화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피곤한지 아기의 오전 낮잠 시간에 본인도 함께 뻗어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요즘 따라 아기가 몸이 쑤신지 새벽에 한 시간에 한 번씩 울면서 잠이 깨는 바람에 아내가 제대로 된 통잠을 자지 못하고 있거든요. 육아에 지친 아내의 생일. 아내와 함께 무엇을 해야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요?


'엄마', '딸'만 남고 '여자'는 사라졌다

얼마 전에 제가 친구를 보러 중국으로 여행 갈 일이 있어서 아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면세점에서 구매하려고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보,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이번에 면세점 갈 일 있으니까 자기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봐!"
"음... 아 맞다. 아기 로션이랑 아기 손수건 필요해. 또, 아기 필요한 거 뭐 있더라.."
"아니! 아기 거 말고 자기 갖고 싶은 거 없냐고?"
"다른 거? 아 맞다. 우리 엄마 생일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미리 사자. 지갑이 많이 낡았더라고."
"자기는 필요한 거 없어?"
"음...그러면 이유식 채소 다지는 '차퍼'라고 있어. 나 그거 진짜 필요해!"

아내는 분명히 자신의 생일에 갖고 싶은 것이 없냐는 저의 질문에 '본인'만 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의 질문 끝에 들은 아내가 원하는 선물 역시 이유식 만들기 도구였습니다. 역시 아기와 관련된 것이지요.

아내의 삶에서 주인공은 자기 자신에서 '가족', 특히 '아기'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요즘 아내 옷 산 것을 보면 전부 '아기 돌보기에 적합한' 쇼핑이었습니다. 크고 편한 원피스, 부드러운 면소재의 집에서 입을 만한 티셔츠, 모유 수유할 때 필요한 수유 티셔츠가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휴직이 끝나고 복직하면 입지 못한다고 옷을 기부하고 아기 책과 장난감을 사와서 정말 놀랐지요.


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고, '딸'이기 전에 '여자'이니까요. 다 제 탓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아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자마자 저를 만나 다른 친구들보다 결혼도 훨씬 이르게 하고 아기도 빨리 낳았기 때문이지요.

한참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예쁘게 꾸미고 함께 사진 찍으면서 추억 남기기에도 부족한 소중한 20대의 시간을 제가 뺏은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기에 대한 아내의 사랑은 위대하다 ⓒ 박현진


힘들게 내린 단유 결정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 정도 되었을 때 아내가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혼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청주인데 울산에서 결혼식이 있었으니 왕복 6시간 이상 걸리는 대장정이었죠.

그때는 아내가 열심히 모유수유를 할 때라 한 번 나갔다 오는 데에도 정말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쉬어서 수동 유축기로 유축을 해야 했고요. 아기가 보고 싶어서 영상통화도 해야 했습니다. 아기 젖 주느라 잠도 부족해서 무거운 눈꺼풀도 관리해야만 했죠. 정말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아내가 그러더군요.

"아, 다시는 멀리 안 갈래. 애기도 보고 싶고, 안 그래도 모유양 적은데 모유 더 줄었을 거야."

아기 태어나고 처음으로 잠시 아이와 떨어져 반나절을 나갔다 왔는데도, 아기를 줄 모유가 줄었을까봐 걱정하는 아내를 보니 존경심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보다 아기를 먼저 생각하는 아내를 보며 안쓰러웠습니다. 꼭 단유를 하면 아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내의 모유량도 줄고 아기가 이유식도 잘 먹고 아픈데도 없이 건강해서 자연스레 단유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보. 우리 아기가 모유 다 먹고 배불러서 엄마 보고 방긋 웃는 거 너무 보고 싶어. 앞으로 못 보는 거잖아. 나 어떡해."

아내는 단유를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을 훔쳤습니다. 아기에게 더 오래 모유를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해주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유를 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드디어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이번 달부터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2~3회씩 한 달에 총 10번 한 번에 2시간씩 수업을 받고 오는데요. 그 시간에는 제가 아기를 혼자 보고, 혹시 제가 급한 일이 있으면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와서 도와주십니다. 두 분이 가까이 사시는 게 참 복이지요. 가족들의 이런 노력 때문인지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아내가 점점 활기가 생기고 있습니다.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한테 어제 본 영화 <코코>에 대해서 길게 영어로 설명했어! 진짜 재밌었어. 요즘은 영어 학원가는 날이 되면 즐거워!"

아직은 훨씬 부족하겠지만 아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앞으로는 보고 싶은 영화 보고 오기,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 가기 등 아내가 하고 싶은 일은 꼭 할 수 있게 육아빠로서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하니 활기가 넘친다 ⓒ 박현진


아내의 삶을 응원합니다

낮잠에서 깨어난 아내에게 'OO야! 생일 축하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름을 불러봤더니 어색하더군요. 앞으로는 그 이름을 자주 불러주려고 합니다. 아내에게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자신이 가장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요..

손목, 발목 관절이 다 약해져서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오고, 두통의 증상이 눈까지 내려가서 안과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제 아내의 이번 주 이야기입니다. 아기 키우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저의 아내. 생일인 오늘만큼은 아기보다 제 아내를 먼저 생각해도 되겠지요?

오늘 함께 할 가족 식사는 '아기 의자가 있고 아기가 놀기 편한' 곳이 아닌 '아내가 가장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곳에 가서 생일축하를 해줘야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이 '엄마'의 삶 뿐만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도 함께 찾아나가길 응원합니다.

아내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였다 ⓒ 박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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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주간애미 #육아빠 #엄마 #모유수유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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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이 가득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교육이야기를 전하고자합니다. 또, 가정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사람사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바둑과 야구팀 NC다이노스를 좋아해서 스포츠 기사도 도전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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