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따라가겠다는 7살 딸 말렸는데, 마을에 폭격이..."

충북 영동군 일대에서 벌어졌던 '제2의 노근리 사건'

등록 2018.01.29 11:21수정 2018.01.2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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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복희 매천리 사건을 증언하는 임복희 ⓒ 박만순


"엄마 나도 갈게" "안 돼. 위험해. 너는 동생 하고 집에 있어" 어린 딸 순자(당시 7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엄마 임복희는 68년이 지난 2018년 현재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나이는 97세로 3년만 있으면 100세이다. 하지만 68년 전 상황이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1950년 9월 3일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에는 북한군이 회의를 소집했다. 북한군의 지시에 따라 마을 일을 보던 사람들이 인근에 있던 금광굴로 모이라고 소리치며 다녔다. 금광굴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개발되었던 곳이다. 현재 영동 군민운동장 맞은편 자리이다. 금광굴에는 여름 난리에 피난 가지 않았던 남성 청·장년들과 젊은 여성들이 모였다. 집에는 노약자만이 남아 있었다.

임복희가 금광굴에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들렸다. 꽝 소리가 나자 그녀는 산비탈로 올라갔다. 현재 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뒤에 있는 활터 근처 산비탈이었다. B29 4대가 폭격을 계속하면서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여서, 불은 삽시간에 마을을 뒤덮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마을을 감쌌다. 폭격 소리가 '꽝꽝꽝' 이어지면서, 폭격에 부서진 돌 파편이 임복희가 있던 곳까지 날아왔다. 그녀가 본 당시 상황은 마을이 '불꽃 밭' 같다는 거였다. 폭격이 끝난 후 마을로 돌아왔을 때,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임복희 집에는 시어머니와 딸 순자, 세 살 아들이 시체로 나뒹굴었다.

영동읍 매천리 경로당에서 만남 장순섭(84세. 영동읍 매천리)씨도 당시에 가족 2명이 폭격에 죽었다고 한다. 큰어머니와 사촌 누님이 죽은 것이다. 장씨는 "앞집에 차씨 할머니가 불에 타 죽었어, 차씨 할아버지는 폭격에 집이 폭삭 무너질 때 뛰쳐나와서 다행히 살아났어. 그 할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죽네~"하고 대성통곡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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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섭 매천리 사건을 증언하는 장순섭 ⓒ 박만순


"지붕에 똥물을 뿌렸어"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장애순(당시 15세)은 머리가 터지고, 몸 전체에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애순을 업고 피난을 다녔지만, 며칠 후에 사망했다. 장복순(당시 17세)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었는데, 폭격 당시 '봉사놀이'를 하다가 죽었다. 장복순의 시신은 '개 그슬린' 거처럼 까맣게 타버렸다. 민달식 윗집 할머니는 불을 끄기 위해 초가지붕에 똥물을 뿌렸다.

집에 남아있던 노약자들이 불에 타 죽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 당시에 죽은 사람이 매천리 본동과 밴득골 합쳐 약 70명이나 되었다.

미군에 의한 폭격 피해는 사망자로 끝나지 않았다. 임복희의 증언이다. "옥순이 언니(당시 10대)가 동생 옥순이를 업고 있다가 폭격을 당했어. 옥순이 언니는 즉사했어. 등에 업혀 있던 옥순이가 땅에 떨어져 부상을 입어 피범벅이 되었어. 옥순이 어머니 이복례는 폭격에 맞아 가슴과 팔이 거의 잘려나갈 정도의 부상을 입었어. 인공시절 수술을 했지만, 평생 병을 달고 살았어" 매천리에 가해진 폭격이 산자나 죽은 자에게 지옥의 고통을 안겨 준 것이다.


마을 대부분의 집은 타버렸고, 가재도구 역시 불에 타, 건질 것이 없었다. 임복희는 산골짝에 타지 않은 집 방 한 칸을 빌려 살았다. 이불도 없어, 추운 겨울에도 겉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다. 옷도 달랑 한 벌. 시아버지 옷을 빨 때는 "방 안에 옷을 홀딱 벗겨 놓고 빨래를 했어" 라는 기막힌 상황을 전한다. 난리가 나고 몇 년 후에야 새로 집을 지었다. 불탄 흙벽돌과 서까래를 주워 다가 흙집을 대충 지은 것이다. 하지만 새로 지은 집은 집이 아니었다. 지붕과 벽 사이로 구멍이 숭숭 나, 낮에는 햇빛, 밤에는 별빛이 보였다.

영동군에서만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178명이 죽어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있었던 노근리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정부가 조사한 공식통계에 의하면 150명이 사망하고 13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즉 163명이 피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영동군 임계리와 주곡리 주민들의 피해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다. 경기도나 북부지방에서 피난 온 주민들은 신원파악이 불가능해, 피해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당시 노근리 쌍굴에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쌍굴에서 약 300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2의 노근리 사건은 전국에 걸쳐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충북 단양의 곡계굴 사건(사망자 360명: 유족 주장)과 경북 예천군 산성동 사건(사망자 51명: 진실화해위원회), 전북 이리역 폭파사건(사망자 400명: 진실화해위원회)이 있다. 만화가 박건웅은 <만화 노근리>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제2의 노근리 사건이 전국에 170건이 있었다고 한다.

충북 영동군에서는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죽은 이가 178명이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영동군 보고서>, 2008) 즉 충북 영동군에서는 미군에 의한 피해가 노근리와 매천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장애인을 근접 사살해...

영동군 매곡면 장척리에 미군들이 들이닥쳤다. 며칠 전 미군은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피난 가라는 소개(疏開)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으로 주민들 대다수는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장애인은 마을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을에 들이닥친 미군들은 집에 있던 주민들을 향해 총질을 해댔다. 1950년 7월 29일 아침이었다.

이진상의 아들(당시 20세)은 어려서부터 장애인이었다. 걷지도 못해, 무릎으로 기어 다녔는데, 미군의 총격으로 죽었다. 이근기의 딸(당시 14세)도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는데, 피해를 당했다. 이날 미 지상군의 근접사격으로 총 10명이 학살되었다. 위의 2명을 제외하고는 40~60대의 여성과 노인이었다. 또한 양강면 구강리에서는 1950년 7월 27일 미군 폭격으로 19명이 사망했다.

미군사건, 미제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그때 따라오겠다는 순자를 말리지만 않았으면 억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딸 순자가 죽은 것이 엄마 임복희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적과 아를 구별해, 적을 격퇴하는 것이 전쟁과 전투의 기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미군은 그렇지 않았다. 미군의 소개명령에 불응하거나, 북한군에 협조했을 것 같다는 지레짐작으로 주민들에게 무차별 폭격과 총격을 가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충북 단양 곡계굴 사건과 경북 예천 사건 등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위원장이 뉴라이트 계열로 바뀌었다. 이영조 위원장은 미군 사건 대부분을 '진실규명 불능' 결정 처리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죽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화해위원회'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이런 사유로 인해, 미군 사건 대다수는 진실규명 불능 처리 되었다.

충북 영동군의 미군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가 제대로 밝혀지는 날은 언제일까? 50년, 100년이 지나도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밝히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제2의 노근리 #매천리 #구강리 #장척리 #불꽃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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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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