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끼친 문장 "아저씨가 내 몸을 만졌어"

[다다와 함께 읽은 책] 허은미 글, 박현주 그림 <비밀>

등록 2018.02.01 15:49수정 2018.03.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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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검사가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섰다. 지난 2010년 서울 북부지검에서 경험했던, 시간이 8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굉장히 떠올리기 힘든' 그 일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법무부 장관님이 앉아 계셨고 바로 그 옆자리에 안 모 검사가 앉아 있었고, 주위에 검사들도 많았고...(중략) 옆자리에 앉아서 허리를 감싸 안고 엉덩이를 쓰다듬는 행위를 상당 시간 동안 하였습니다."
"그 앞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말리지도 않았고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검찰 내 성폭력을 지적하는) 그런 여검사들에게 '남자 검사들 발목 잡는 꽃뱀이다'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굳이 8년이나 지난 이야기를 지금 꺼내놓은 이유에 대해 서지현 검사는 말했다.


"주위에서 피해자가 직접 나가서 이야기를 해야만 너의 진실성에 무게를 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서요. 그 이야기에 용기를 얻어서...(중략) 범죄 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서지현 검사는 가해자에게 지금까지 사과받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를 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한다.

서 검사의 말처럼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지난 8년 무시로 찾아오는 그 기억이 얼마나 불쾌하고 불편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서 검사 뉴스가 나간 뒤 여자들의 #미투(me too)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자신의 페북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여덟 살. 미술학원 운전기사는 '비밀'이라며 '성'에 대한 개념이 없던 내 몸을 만졌다. 어린 나는 어른이 말한 '비밀'을 지켜야만 해야 하는 줄 알고 3년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열 살. 학원 원장과 태권도 도장 관장은 수시로 여자아이들 뒤에서 껴안았다. 나도 그중에 한 명이 됐다. 불쾌했지만 여자아이들 누구도 '기분 나쁘다'며 그들의 행동을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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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비밀> ⓒ 최은경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그이가 여덟 살, 열 살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는 건 좋은 기억력 때문은 아닐 거다. 오히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일 거다. 여기 어른이 말한 그 비밀 때문에 '쿵당쿵당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한 아이가 또 있다. 그림책 <비밀>에 등장하는 아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비밀이 있어. 두근두근 설레는 비밀, 딩가딩가 즐거운 비밀, 가슴 뿌듯 고마운 비밀. 이런 비밀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자꾸 웃음이 나와."

하지만 생각하면 좋지 않은 비밀도 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따끔따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비밀,  '감추면 감출수록 안절부절, 자꾸 거짓말을 하게 하는' 비밀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편해질까?' 싶다가도, 아저씨가 "비밀"이라며 "착한 아이는 비밀을 꼭 지켜야 한다"라고 한 말을 떠올리는 아이. 그런데도 아이는 '그 일이 자꾸 생각나서 쿵당쿵당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난 아저씨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껴안는 게 싫어. 아저씨 턱은 까칠까칠하고 몸에서 냄새도 나는 걸. 하지만 내가 싫다고 하면 아저씨가 속상할까 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만히 있곤 해. 있잖아,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 저번에는 아저씨가 내 몸도 만졌어."

반드시 털어놓아야 하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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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저씨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껴안는 게 싫어" 책장을 넘기다가 소름이 끼쳤던 장면 ⓒ 최은경


소름 끼치는 문장과 그림이 담긴 책장을 넘기고 나면,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용기를 내 엄마에게 아저씨와 한 비밀에 대해 털어놓는다. 엄마는 "괜찮아, 괜찮아, 우리 딸. 엄마에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안아주고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세상에는 꽁꽁 지켜서 좋은 비밀도 있지만, 반드시 털어놓아야 하는 비밀도 있다는 걸. 그런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는 걸.'

아이들에게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따끔따끔한'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다. 자신은 싫고 불편한 일인데도, '어른들이 속상할까 봐' 말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걸 이 그림책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10년 넘게 두 아이를 키웠는데도 아이들 마음 읽는 건 여전히 어렵다.

성폭력을 용기있게 세상에 말하는 건 힘든 일이다. 서 검사는 8년이 걸렸고, 누군가는 몇 십년이 걸렸고, 누군가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말하지 않는 동안은 '그 일이 자꾸 생각나서 쿵당쿵당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히는' 날도 있을 거다. 검찰 내 성추행 폭로한 서 검사는 당부했다.

"저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피해를 법적 절차에 따라 구제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구제 요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문제가 김지영만의 문제가 아니듯 말입니다. 조직 내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는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합니다.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깨기, 성폭력 범죄에 대한 편견깨기부터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비밀>은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성폭력 범죄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작은 단초가 되어줄 그림책이다. 이 책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어야 할 이유다.

이 책에 실린 한국성폭력 상담소의 추천사에는 (성폭력은) '꼭 털어놓아야 하는 비밀'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평소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라도 꺼내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고.

'일상적으로 아이들과 좋은 일, 나쁜 일, 슬픈 일, 재미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라'라고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모든 일을 공유할 수 있는, 안전한 상대가 곁에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면서.

'어린이 성폭력 피해 예방과 대처를 위해 어른이 해야 할 일'도 나와 있으니 꼭 한번 읽어보자. 아이들의 말에 항시 귀 기울이면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 실린 글을 일부 보강했습니다.

비밀 -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

허은미 글, 박현주 그림,
문학동네어린이, 2012


#성폭력 #그림책 #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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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이 기사는 연재 #미투 나도 고발한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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