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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하차 이어 조기 종영... EBS의 부끄러운 입장문

[取중眞담] 조기 종영 택한 <까칠남녀>... 출연자들 "나쁜 선례 안 되길" 비판

18.02.06 20:33최종업데이트18.04.1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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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2월 6일 오후 11시 18분]

결국 EBS <까칠남녀>는 '인권' 대신 '혐오'를 선택한 걸까. EBS는 6일 입장문을 내고 당초 19일 종영 예정이었던 <까칠남녀>를 2월 5일로 2주 앞당겨 종영했다고 발표했다. 출연진과 제작진은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1년 넘게 함께 한 <까칠남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EBS는 해당 입장문에서 "남은 방송의 정상화를 위해 출연진을 설득하고 다양한 대안을 검토했지만 최종적으로 합의된 의견을 도출해 내지 못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결정은 일선 제작 피디와 작가들의 의견과도 배치된다.

은하선 강제 하차 이후 녹화 '보이콧'까지 이어져

EBS 토크쇼 <까칠남녀>에 출연 중인 칼럼니스트 은하선씨. ⓒ EBS


칼럼니스트 은하선씨는 지난 1월 13일 <까칠남녀> 마지막 2주분 녹화를 앞두고 EBS 측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하차 통보를 받았다. EBS <까칠남녀> 책임피디에 따르면 은하선씨의 하차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은하선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섹스토이 이미지 중 하나가 십자가 모양이라는 것과 은하선씨가 개인 SNS 계정에 퀴어문화축제 후원 계좌를 <까칠남녀> 담당 피디의 전화번호인 양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담당 책임피디는 이러한 점을 들어 "은하선씨가 방송 출연자로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은하선씨의 생각은 달랐다. 은하선씨는 자신이 하차 통보를 받은 시점이 <까칠남녀>가 2주에 걸쳐 '성소수자 특집'을 방송하고 난 다음이라고 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운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이후 일부 보수 학부모 단체는 EBS 일산 신사옥을 점거하고 "<까칠남녀>를 폐지하라"면서 매일 같이 농성을 벌였다. 은하선씨는 해당 방송에서 '바이섹슈얼'로 소개됐다. <까칠남녀> 시청자 게시판은 "교육방송에서 동성애가 웬 말이냐"는 항의성 도배글로 가득 찼다.

은하선씨는 '성소수자 특집 방송'에 나왔던 자기 자신을 강제 하차시킨 것이 '성소수자 탄압'이라 해석했고 학부모 단체의 요구에 EBS가 굴복을 한 것이라고 보았다. <까칠남녀>의 출연진 중 손아람·손희정·이현재씨가 은하선씨의 "성소수자 탄압"이란 주장에 동의하며 동시에 출연을 보이콧했고 <까칠남녀> 녹화가 전면 취소됐다.

이후 제작진은 남은 출연진만으로 녹화를 강행하기 어렵게 됐다. 특히 다른 출연진 중에서도 '보이콧'까지는 아니지만 방송이 정상화되기 전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까칠남녀> 2주분 녹화는 '무기한 연기'됐고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EBS <까칠남녀> 조기 종영 사실이 알려지자 패널 은하선씨는 개인 SNS에 "EBS는 출연자와 합의에 실패한 게 아니라 호모포바이와의 선긋기에 실패했다"면서 "이 모든 일들이 성소수자 특집 방송 전후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덮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보이콧 의사를 밝힌 패널 중 한 명인 평론가 손희정씨는 6일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은하선 하차 결정 당사자인) 책임피디로부터 전화를 받긴 했으나 그것이 '설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오히려 패널들이 책임피디를 설득하려고 했으니 저희가 설득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손희정씨는 "EBS가 공영방송으로서 이번 일에 어떻게 제대로 된 책임을 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길 바란다"며 "<까칠남녀>가 나쁜 선례로 남지 않길 바란다"고 EBS의 조기 종영 결정을 비판했다.

'성소수자' 빠진 EBS의 사회적 약자

EBS <까칠남녀> 성소수자 특집 중 한 장면. JTBC 예능 <아는 형님>을 패러디해 '모르는 형님'이라는 컨셉으로 진행됐다. ⓒ EBS


손희정 평론가는 <까칠남녀>가 "나쁜 선례로 남지 않길 바란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EBS는 은하선씨의 강제 하차 결정에 이어 조기 종영이라는, '성소수자 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2015년 JTBC <선암여고 탐정단>의 동성 간 키스신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결정을 받아 논란이 인 바 있다. <까칠남녀>의 조기 종영 역시 성소수자 가시화의 '흑역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성소수자가 단지 유머의 소재가 아닌 진지한 접근으로 예능에 출연했던 건 <까칠남녀>가 처음이었기에 이번 조기 종영의 파장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EBS는 <까칠남녀>의 조기 종영을 알리는 입장문에서 "상대적 소수자와 이익 실현이 힘든 계층의 이익이 반영되도록 살피는 것은 공영방송의 중요한 책무"라면서 그 '사회적 약자'로 어린이와 장애인, 노인, 다문화가정을 들었다. "성소수자 탄압"이라고 불린 <까칠남녀> 은하선 하차에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듯 EBS의 '사회적 약자'의 정의 안에 성소수자는 없었다.

또 해당 입장문에서 EBS는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다"면서 "<까칠남녀>가 그러한 범주 안에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했다. 물론 <까칠남녀>는  방송하는 동안 사회에 내재한 여러 여성혐오 이슈에서 목소리를 냈고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EBS는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고 사실상 보수 학부모 단체의 "<까칠남녀> 폐지" 입장에 손을 들어준 꼴이 됐다. 과연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선뜻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까.

까칠남녀 교육방송 공영방송 은하선 조기 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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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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