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남학생을 울린 선생님의 도시락

[교실 속 작은 희망의 이야기②] 힘든 학창 시절을 지켜준 따뜻한 선생님

등록 2018.02.13 14:56수정 2018.02.1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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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학교와 관련된 안타까운 사건들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학생에게 인격모독을 하는 교사, 교사에게 폭언을 하는 학생, 교사와 학생의 부적절한 관계 등 사건의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이로 인해 교육의 주인공인 학생과 학부모가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고, 학교와 교사는 여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훈훈하고 반가운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따뜻한 선생님들과 선생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꿈을 키워나가는 제자들이 만들어 가는 교실 속 희망의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학창시절과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한 따뜻한 교실 속 작은 희망의 이야기들을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 말 -


"여러분, 현대 문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지요?"
"있지요? 있지요? 하하하."

2000년 12월 중학교 3학년 교실. 졸업을 앞둔 시점이라 그랬을까? 수업 자체가 힘들 정도로 소란스러운 국어시간이었다. 유난히 끝부분을 강조해서 높여 말하는 선생님의 말끝을 장난스럽게 따라하는 것. 그때는 그것이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수업시간 45분 동안 쉼 없이 열정적으로 현대 문학을 가르치던 김미은(가명) 국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나는 끊임없이 선생님의 말투를 따라하고 웃으면서 수업을 방해했다. 철없는 사춘기 남학생의 장난을 애써 인내하며 수업에 최선을 다하던 선생님이 그날만큼은 참을 수 없으셨나 보다.

"야, 박현진! 너 그만 안 해!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
"네, 가면 되잖아요!"

반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대답은 했지만, 선생님의 무서운 눈빛과 날카로운 음성에 나의 속마음은 긴장되고 무서웠다. 그 순간부터 남은 수업의 약 10분 정도는 교실이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나는 그 수업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어김없이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교무실로 향하셨다.


나를 울린 한마디 "현진아, 요즘 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교무실 맨 끝 쪽에 있는 선생님의 자리로 가는 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멀리서 보이는 선생님의 표정은 역시나 무서웠고,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앉아 봐. 현진아, 담임 선생님한테 말해두었으니까 오늘은 선생님이랑 얘기 좀 길게 해 보자."        

내 우려와는 달리 선생님의 말투와 표정은 따뜻했다. 마치 심한 장난을 친 아들에게 혼을 내고 미안해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갑자기 울컥해졌다.

"현진아, 요즘 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요즘 수업 시간에 아예 안 올 때도 많고, 공부는커녕 일부러 선생님 힘들게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야?"

혼이 날 줄만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나를 걱정해주시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집에서, 교실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힘들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사실, 중학교 3학년, 2000년 한 해는 나에게는 정말 큰 풍파가 몰아친 한 해였다. 시작은 좋았다. 3월 초에는 학급의 반장이 되었고, 3월 말에는 전교부회장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나는 학급에서 친구들에게 인기 좋은 유머 있는 반장이었고 선생님들의 칭찬을 먹고 사는 밝고 명랑한 제자였다. 하지만, 찬란하고 즐겁던 학창생활은 길게 가지 못했다.

그해 5월, 나의 행복은 갑자기 산산조각 흩어져 버렸다. 우리 집의 가장이자 든든한 내 편이었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1997년 시작된 'IMF 경제위기'로 작은 건설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채무와 노동,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어깨의 짐과 함께 사투를 벌이다가 과로와 충격으로 지쳐 돌아가시게 된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사춘기에 접어든 나에게 이 사건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가족인 어머니와 한 살 터울인 누나 역시 그 충격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겨 놓은 짐을 한꺼번에 다 떠맡게 되면서 점점 지쳐 갔다. 우리 세 가족은 누구도 집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를 슬프게 한 학교 점심 시간

결국, 그나마 나에게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곳은 학교 밖에 없었다. 그곳엔 내 상황을 잘 모르고 편견 없이 대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를 믿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했다.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요즘 학교를 생각해 보면 대부분이 점심시간에 급식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가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나의 점심시간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따뜻한 보온 도시락에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 반찬, 김치찌개까지. 남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의 점심시간은 고통이었다.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줄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만 싸들고 학교에 갔다. 처음 며칠은 배가 아파서 안 싸왔다고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 후 며칠은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안 싸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에 지쳐 다음 며칠은 친구들의 도시락을 조금씩 나눠 먹었다(어떤 친구 입장에선 뺏어먹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이 상황이 계속 되자 나는 친구들에게 더 이상 온갖 거짓말을 대거나 눈치를 보며 밥을 나눠먹기 싫어졌고, 학교 자체가 가기 싫어졌다. 그래서 집에서 나와 학교를 안 가고 어디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느지막이 학교에 갔다.

김미은 선생님을 만나는 국어시간은 일주일에 5번 들어서 매일 같이 수업이 있었는데, 오전 수업엔 내가 보이지 않고, 오후 수업에는 내가 보여서 선생님 입장에선 의아하게 생각한 게 당연했다.

나는 김미은 선생님께 나의 힘든 상황과 현재 감정을 가감없이 다 이야기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세 가족 모두 힘들게 지내고 있다는 것. 누나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며칠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것. 도시락을 싸올 수 없어서 친구들을 보기 힘들어졌고, 그러다 보니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학교생활도 싫어져서 선생님을 화나게 하고, 자꾸 비뚤어져서 학교에도 자주 안 나왔다는 것 등등.

나의 말을 듣는 선생님은 잠깐의 한눈도 팔지 않고 시종일관 경청해서 들어주셨다. 내가 선생과 상담한 대략 30분의 시간은 나의 눈물 반. 콧물 반. 선생님의 눈물 약간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렇게 길게 선생님과 이야기해 본 건 처음이었다. 느낌이 묘하면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상담이 끝나고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현진아, 내일은 학교 몇 시에 올 거야?"
"오늘 저녁에 알바 가서 너무 피곤해요. 내일은 1시쯤에 올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내일 조금만 일찍 와. 혹시 8시쯤 학교에 와서 선생님한테 잠깐 왔다 가지 않을래?"
"내일 일어날 수 있으면 올게요."

나는 어린 마음에 선생님이 '나를 감시하려는 하는구나' 하고, 대답을 얼버무리며 교무실에서 나와 교실로 갔다. 학교를 마치고 저녁에 쇼핑타워에 있는 음식점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오후 12시까지 한 후에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는 데 선생님이 한 말이 자꾸 떠올라서 잠을 설쳤다.

'내일은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신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딱 하루만 일찍 가보자!'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선생님의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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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다음 날 아침, 나는 8시 정각에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됐죠? 교실 갈게요."
"현진아! 잠깐만!"

가려던 나를 선생님이 붙잡았다. 선생님은 책상 아래에서 정성스럽게 싸여 있는 도시락을 나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도시락을 받아들고 아래쪽을 자세히 보니 이름 쓰는 란에는 '박현진'이라는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고 흥분해서 감사인사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열어 보았다. 햄이 송송 들어가 있는 계란말이와 돼지고기 볶음! 1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아름다운 반찬들과 윤기나는 흰 쌀밥이었다.

"선생님이 집에서 가족 꺼 싸면서 같이 준비한 거야. 이거 맛있게 먹고, 집에 가기 전에 선생님한테 다 먹고 가지고 와. 대신 절대 남기면 안 돼!"

나는 나도 모르게 또 울컥 해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대답도 하지 않고, 도시락을 품에 안고 교무실을 급히 뛰쳐 나왔다. 그 날은 수업을 듣는 내내 기분이 좋았고, 정말 오랜만에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나는 그날 친구들과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으며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잊지못할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보름 정도의 기간 동안 나를 위해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주셨다. 나는 매일 아침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이 싸 주신 도시락을 받아서 쌀 한 톨,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운 다음 집에 가기 전에 선생님께 다시 드리며 감사 인사를 하고 집에 갔다.

나는 선생님 덕분에 남은 중학교 학창시철을 즐겁게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고,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선생님의 따뜻한 진심과 도시락을 생각하며 교사의 꿈을 키우며 공부를 하였다.

2005년 대학 초등교육과에 입학해서 2008년 임용고사 시험을 치러 당당히 합격해서 초등 교사가 되었다. 나는 이 소식을 김미은 선생님에게 꼭 알리고 싶었다. 교육청의 '스승찾기'를 통해 겨우 겨우 연락이 닿아 직접 김미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선생님은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셨다.

중학교 때 김미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짓궂게 장난치고 버릇없이 구는 학생에게 손을 내밀어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침 일찍 제자를 생각해서 정성스레 도시락을 싸 주신 김미은 선생님. 유난히 추운 올 겨울, 따뜻했던 선생님과 함께한 학창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하며 교사가 되기를 결심했고, 교사가 되었습니다. 저도 도움이 필요한 제자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진 선생님이 될게요.'
덧붙이는 글 한국교육신문 중복송고
#선생님 #중학생 #도시락 #교실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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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사랑이 가득한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교육이야기를 전하고자합니다. 또, 가정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사람사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바둑과 야구팀 NC다이노스를 좋아해서 스포츠 기사도 도전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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