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에서 떠올린 '폭염'의 섬 오키나와

[일본 여행기] 일본 소설가들이 사랑한 그곳

등록 2018.02.21 17:56수정 2018.02.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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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서 관람한 일본의 전통 공연. 배우의 분장이 독특하다. ⓒ 조경국 제공


그 어떤 해보다도 '혹한'과 '폭설'이 사람들을 괴롭혔던 2018년이었다. 폭설로 활주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공항들의 비행기 운항은 일시적으로 중단됐고, 비교적 따스한 지역이기에 눈을 보기 힘들었던 한반도 남부에서도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눈이 쏟아진 올 겨울.

사람이란 게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이라 추운 날이 이어지는 계절엔 따뜻한 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폭염이 짜증을 부르는 여름에는 시원함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산다. '사람살이'라는 게 어찌 보면 참으로 유치하고 우습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코트 깃을 세우는 추위는 자연스럽게 '따뜻한 남쪽나라'를 동경하게 만들었다.

추위를 핑계 삼아 외부 일정을 잡지 않고, 난방기가 가동되는 사무실에서 뜨거운 커피와 녹차를 거푸 마시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던 나날. 이때 우연히 기억해낸 낯익고도 반가운 단어 하나가 있으니 바로 '오키나와'다.

그랬다. 몇 해 전 나는 그 섬에 나흘간 머물렀다.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짙푸른 바다와 청옥처럼 푸르고 높은 하늘. 그 따스하고 편안한 풍광을 배경으로 친절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검은 쌀로 빚은 맑은 술 아와모리(泡盛)를 함께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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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고대의 모습을 형상화한 모형. ⓒ 조경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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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슈리성에서 한적한 오후를 즐기는 관광객들. ⓒ 조경국 제공





'작가의 망명지로 어울리는 곳'을 향해

때때로 기억은 향수를 소환한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이처럼 혹한의 날들이 지속될 때면 '따뜻한 그곳' 오키나와가 고향처럼 그리워진다. 거기서 만들고 돌아온 잠시잠깐의 추억이 화인(火印)처럼 더더욱 선명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오키나와는 일본 류큐제도에 자리한 화산섬이다. 북쪽 지역은 산과 밀림으로 이루어졌고, 남쪽은 바위가 많은 구릉지대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남부에 거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섬에 상륙하려는 미군과 이를 막으려는 일본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공군기의 폭격이 여러 차례 있었고 죽거나 다친 사람 중에는 민간인들도 적지 않았다.

이후 미국이 통치하게 된 류큐제도가 일본으로 온전히 반환된 것은 1972년. 미군의 오랜 주둔지이기에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임에도 회보다 스테이크가 더 맛있다"는 우스개가 전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론 전쟁으로 인해 수천수만의 노인과 아이가 죽었던 비극의 공간이기도 하다.

오키니와는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들이 1천여 명 가까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고전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바다를 건너가 만든 '율도국'이 바로 오키나와라는 풍문이 떠돌기도 한다. 오키나와는 내가 일본에서 첫 번째로 여행한 지역이다. 일본에는 오키나와보다 근사한 관광지가 많고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오키나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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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는 오키나와의 모노레일. ⓒ 조경국 제공


여행지를 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일본의 소설가들이다. 여행을 계획하던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을 읽다가 발견한 한 줄의 문장이 그 시작이었다.

"오키나와는 작가들의 망명지로 어울리는 곳이다!"

인종과 나이, 종교와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수많은 작가들이 모여들어 세기를 뛰어넘는 걸작을 집필한 프랑스의 파리, 유럽의 예술가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인도네시아의 고도(古都) 우붓, <노인과 바다>를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매혹한 쿠바의 아바나가 연이어 떠올랐고, 오키나와의 어떤 면이 이 해박하고 명민한 작가에게 위와 같은 강렬한 문장을 쓰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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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망졸망한 매력이 있는 오카나와의 해변. ⓒ 조경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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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가 있는 오키나와 식당에선 회는 물론 스테이크까지 맛볼 수 있다. ⓒ 조경국 제공




무라카미 하루키와 오쿠다 히데오를 매혹한 섬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도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에 불을 붙였다.

소설 속엔 젊은 시절 사회주의 학생운동에 경도됐다가 무정부의자로 변신하는 사내가 등장한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와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그가 최후의 도피처로 선택한 곳이 오키나와 본섬에서 멀지 않은 이리오모테였다. 패배한 좌파 지식인이 이상향으로 꿈꾼 섬. 거기엔 대체 뭐가 있을까? 알고 싶었다.

결정 이후의 실행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일본 소설가들이 던져준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 오키나와로 가는 저렴한 항공권과 싸고 편안한 숙소를 수소문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일본 여행 관련 서적을 뒤지다보니 해결책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세기 할인항공권과 3일치 호텔숙박권을 묶어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은 자유여행 상품을 찾아낸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즉각 그 여행상품을 예약했다. 이제 배낭을 꾸리고 신발 끈을 조이는 일만 남았다.

여행을 며칠 앞둔 날. 스스로는 "취미 수준이죠 뭐~"라고 말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솜씨가 묻어나는 사진을 찍어온 후배 하나가 동행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이 비교적 한적하던 평일 오후였다.

비행기가 드넓은 태평양 위를 날았다. 일상을 탈출해 이제껏 하지 못해 본 색다른 경험을 찾아 낯선 나라로 간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일본의 건축 양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히 중국풍도 아닌 오키나와 슈리성,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국제거리, 바다를 낀 드넓은 평탄 지형이 탄성을 부르는 만좌모(万座毛), 그리고, 오키나와의 맛깔스런 요리와 작고 예쁘장한 해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일본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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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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