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태움' 행위, 나는 이렇게 복수했다

[책 뒤안길] 정인희의 <간호사를 부탁해>가 말하는 ‘살아남는 법’

등록 2018.02.19 15:22수정 2018.02.1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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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 쫌 하는 보통의 간호사로 살아가기'

부제부터가 '톡' 하고 튀지 않습니까. '그냥 일 쫌 하는'데 '보통 간호사'라고? '보통'이라고 하니까 전에 등장했던 '보통 사람들의 시대', 어떤 전 대통령 생각이 나네요. 전혀 보통 사람하고는 거리를 두었던 그분 말입니다. 저자 정인희 간호사 역시 그냥 보통 간호사는 아닙니다. 톡 튀는 간호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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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를 부탁해> (정인희 지음 | 원더박스 펴냄 | 2017. 11 | 311쪽 | 1만5000원) ⓒ 원더박스


'보통 간호사'라고 강조하는 정인희의 <간호사를 부탁해>는 발랄하고, 발칙하고, 신랄하고, 솔직하고, 거칠 것이 없는 한 간호사의 일상사입니다. 그걸 매무새 있는 언어로 승화시키기에 독자가 쉽게 매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몸으로 부딪히며 가르쳐줍니다.

책을 읽으며 간호사 세계나 다른 직업의 세계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저 같이 목사로 거의 40년을 살고 있는 사람도 공감할 정도니까, 다른 직업의 세계는 더더욱 같은 상황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당돌합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좋은 간호사 되는 방법 같은 건 말할 생각이 없다. 애초에 나도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어떤 간호사도 '좋은 간호사가 되는 방법은 이거예요!'라고 정답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9쪽

간호사의 사명감? 없어도 된다?

저자의 의도가 이렇고 보면, 이 책을 간호사가 되려는 이들의 길잡이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참고할 만한 이야기는 너무 많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명감 없이는 못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의사나 간호사란 직업도 그런 건 아니라고 저자는 가르쳐줍니다.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가고, 취업 때문에 학과를 선택하고, 졸업을 하고, 국가고시를 통과하면 어느 날 '갑자기' 간호사가 된다. 간호학과를 갔으니 언젠가는 간호사가 되겠거니 알고는 있지만 사회적으로 '당신은 이제부터 간호사예요'라고 역할을 부여받는 것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다." - 8,9쪽

'사명감 운운'하는 자체를 거부하며 뛰어든 간호사에의 길, 그의 좌충우돌이 프롤로그를 읽으면서부터 상상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참 기묘한 생각과 상상, 그리고 기막히게 현장에 적응하는 저자의 모습을 읽으며 '캬, 그렇구나!'를 연발하게 됩니다.


저도 조카가 현직 간호사라서 대강 들어 압니다. 간호사들이 얼마나 고된 일에 시달리는 지를. 잠도 부족하고 의사와 환자 사이에 끼어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하지만 저자는 재미와 웃음으로 자신의 고된 일을 승화시킬 줄 아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저자는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환자에게 이것저것 묻다가 웃음이 나왔다고 술회합니다. "수술 받으시고 가스는 나왔어요? 화장실엔 다녀오셨어요? 변이 어땠어요? 단단했나요? 묽었나요? 물은 얼마나 드셨어요? 소변량 체크 좀 할게요." 간호사들의 일상 언어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대체 남이 밥 먹고 방귀 뀌고 똥 싸는 데 이렇게 관심이 많은 직업이 또 있을까?"라며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기초 정보이고 중요한 내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웃겼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일상을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재주가 있습니다.

간호사 일도 결국은 인간관계다

"종종 병동 간호사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진상 환자와 진상 외과의사 중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라고 묻곤 한다. 이 질문은 "똥과 피, 둘 중 하나 골라. 병원 일은 똥 아니면 피지. 병동에서 똥 볼래, 아님 수술실에서 피 볼래?"라는 질문과 함께 키득거리며 농담 삼아 자주 하는 질문이었다." - 32쪽

'똥과 피'? 책을 읽으며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결국 병원에선 '똥과 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죠. 이 둘은. 그런데 저자는 그게 바로 진상 환자와 진상 의사라고 해학적으로 표현하는군요. 둘 다 택하기 쉽지 않지만 가까이 할 수밖에 없으니 간호사의 애로가 읽힙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는 인간관계입니다. 간호사의 삶의 현장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내게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말입니다. 나는 나를 고칠 수 있지만 나는 남을 고칠 수 없죠.

이번 설연휴에도 서울의 한 대형병원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의 남자친구는 언론에 "여자친구는 태움이라 불리는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에도 그러한 대목이 나옵니다.

"내게도 나만 집중적으로 태우는('재가 될 때까지 활활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혼나는 것을 말한다) 선배가 있었다.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날로 깊어졌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매일매일 나를 뜯어고쳐 보겠다며 빈정거림과 질책을 쏟아냈다." - 43쪽

그 선배는 이 후배 간호사를 고칠 수 있었을까요? 어림도 없죠. '선배가 틀린 거라고요'라고 말합니다.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초보 때는 태우면 탔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태우는 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하는 대처법이 생겼다며 소개합니다.

"내 다이어리엔 혈관외과 로테이션 내내 닥터 P를 향한 욕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새 다이어리에 사이코 의사의 이름을 들먹이며 'XX 의사 X새끼'라고 적으며 개운해한다."

바로 그거였습니다. 상대에게 대들지 않아도 되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 다른 삶의 현장에서도 적용될 만한 것 아닌가요. 십여 년 전 볼링을 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선배가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볼링공이 무엇처럼 보이느냐는 질문, 멍 하고 서 있는 내게, '말썽 부리는 XX 머리지. 뭘 그리 곰곰이 생각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배는 영국에서 시작된 볼링의 기원을 장장 설명했었던 것 같습니다. 볼링은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원수를 무찌르는 통쾌한 운동이라고. 저자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특한 방법으로 무찌르는군요. 볼링장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언제 어디서나 다이어리 하나 꺼내 들면 되니까요.

저자는 힘든 일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라지만 결국 사명감 충만으로 글을 마칩니다. 간호사가 겪어야 하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감이 넘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자가 에필로그에 적은 글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은 또렷해진다. 나는 그 느낌이 좋다. 나를 믿고 수술을 진행하는 나의 팀이 좋고, 내가 믿어도 되는 팀이 있다는 것이 좋다. (중략) 누가 뭐라고 하건 간호사인 당신은, 나는, 우리는 이미 훌륭하고 특별하다." - 309, 311쪽
덧붙이는 글 <간호사를 부탁해> (정인희 지음 | 원더박스 펴냄 | 2017. 11 | 311쪽 | 1만5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간호사를 부탁해 - 그냥 일 쫌 하는 보통의 간호사로 살아가기

정인희 지음, 고고핑크 그림,
원더박스, 2017


#간호사를 부탁해 #정인희 #병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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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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