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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동원'을 살린 한국 독립투사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골든 슬럼버> 상황과 유사하게 펼쳐진 이봉창 의거

18.02.21 10:36최종업데이트18.02.2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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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사 집


같은 제목의 일본 원작소설을 한국 상황에 맞춰 구성한 <골든 슬럼버>는 사극은 아니지만 사극이 될 수도 있었을 영화다. 영화와 유사한 상황이 일본에서 나타날 뻔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 

한국 영화 <골든 슬럼버>에서는 택배직원 건우(강동원 분)가 서울 광화문광장 쪽 도로에서 발생한 대통령 후보 폭사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 건우는 범인이 아니다. 고교 친구 무열(윤계상 분)의 전화를 받고 광화문역 쪽에 나갔다가, 때마침 발생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폭발물의 출처가 현장에 있었던 건우로 추정된 것이다.

건우는 아이돌 스타 수아(김유정 분)를 치한으로부터 구해 모범시민상을 받고 전국적으로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랬던 건우는 폭사 사건을 계기로 '더 뜨지 못해 안달이 난 무서운 인간'으로 매도된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붙잡히면 변명할 겨를도 없이 진범으로 확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일단 달아난다. 

원작 <골든 슬럼버>의 설정

원작 소설 <골든 슬럼버>에서는 일본 동북부인 미야기현 센다이시가 무대로 등장한다. 카퍼레이드를 하던 젊은 야당 출신 총리 가네다가 무선조종 헬기폭탄의 폭발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폭탄은 도로변의 교과서 창고 빌딩 근처에서 날아간 것으로 추정됐다. 사건 직후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경찰 당국은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원작 소설의 한 대목이다.

"어제 폭파 사건 직후 교과서 창고 빌딩 주변에서 경찰이 거동이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불심검문을 시도했으나 그대로 달아났고, 곧장 출동한 경찰과 함께 추적했으나 또다시 도주했습니다."

용의자는 아오야기 마사하루라는 택배직원이다. 그 역시 2년 전, 아이돌 가수 린카를 강도한테서 구한 일로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다. 이제 아오야기는 그런 미담의 주인공이 아니라 정치적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전국적 조명을 받게 된다. 더 뜨고 싶어 총리 살해까지 시도한 '미친 놈'이 되어 버렸다.

원작 소설 작가인 이사카 고타로는 1963년 11월 22일의 케네디 암살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범인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는 미국 남부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카퍼레이드 중이던 케네디 대통령을 향해 4발의 총탄이 발사되던 그 시각에 현장 근처에 있었다.

사건 발생 몇 분 뒤, '교과서 창고 빌딩 6층 창문에서 소총을 발사하는 남자를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나왔고, 현장으로부터 약 5km 떨어진 주택가에서 남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오스왈드가 경찰에 발견됐다. 경찰을 죽이고 극장에 숨어든 오스왈드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검거됐다.  

<골든 슬럼버> 주인공처럼 오스왈드 역시 사건 전에 주목을 받았다. 해병대 제대 뒤인 1959년 20세 나이로 "사회주의를 동경해왔다"며 소련에 망명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결혼하고 살다가 1962년 아내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싫어하는 피델 카스트로를 추앙한다며 쿠바 망명을 시도했다가 멕시코시티 주재 쿠바영사관의 거부로 실패했다. 그런 뒤에도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정부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카스트로에 대한 애정을 지켰다. 이런 전력이 있는 상태에서 1963년에 케네디 암살범으로 지목됐으니, 범행 동기가 있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체포 직후에 범인으로 몰린 오스왈드는 이틀 뒤 구치소로 이감되던 중에 경찰 정보원 출신의 나이트클럽 사장 잭 루비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오스왈드는 살해됐지만, <골든 슬럼버> 작가는 주인공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도주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변형했다. 주인공이 붙잡히느냐 도주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오스왈드 이야기와 <골든 슬럼버>의 공통점은 우연히 현장 주변에 있던 시민이 명확한 근거 없이 범인으로 몰렸다는 점이다. 

그런데 <골든 슬럼버> 주인공처럼 우연히 사건 현장을 지나다가 범인으로 몰린 실제 일본인이 있었다. <골든 슬럼버> 주인공이 총리 살해범으로 몰린 데 비해, 이 사람은 일왕(이른바 천황) 살해범으로 몰렸다. 파장이 훨씬 더 큰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지금 일왕의 아버지인 히로히토 일왕 때였다. 히로히토가 마차를 타고 도쿄 시내에서 가두 행차를 했다. 마차 행렬이 경시청을 지나 사거리에서 우회하기 직전이었다. 행렬 속의 두 번째 마차 앞에 수류탄이 떨어지고, 귀청을 째는 폭발음이 현장을 진동시켰다. 히로히토는 첫 번째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가 두 번째 마차에 있을 거라는 추측이 두 번째 마차에 대한 폭탄 투척으로 연결된 것이다.

34세 때인 1935년의 히로히토 일왕.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폭발음이 멎자마자 경찰들은 폭탄을 투척한 사람을 수색했다. <골든 슬럼버>에서처럼 이 사건의 용의자도 금세 지목됐다. 두 번째 마차와 약 20m 거리에 있었던 50세 가량의 남자였다. <골든 슬럼버> 주인공이 택배직원 차림이었던 데 비해, 그 남자는 작업복 비슷한 무명옷 차림이었다. 경찰은 그를 즉각 체포했다.

무명옷의 남자는 "나는 아니야! 저 사람이야!"라며 다른 사람을 지목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인지 경찰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남자는 꼼짝없이 대역죄인으로 끌려갈 상황에 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4개월 보름 뒤인 1946년 1월 1일, 일왕은 이른바 '인간 선언'을 했다. 그때까지 일왕은 신으로 추앙받았다. 이 선언을 통해 일왕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했다. 이 선언이 있기 전에 일왕은 신과 동격이었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그런 일왕한테 수류탄을 던졌다는 혐의를 받고 붙들렸으니, 체포되는 순간에 무명옷 남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국민 피디들'에 의해 11명의 아이돌 그룹에 선발된 사람도 아니면서 "나야 나!"를 외친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아니야! 나야!"라고 외쳤다. 무명옷 남자 근처에 있었지만, 외모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외모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행색이 초라했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너무 화려했다. 멋을 부리는 사람이었다. 머리는 올백 머리였다. 점잖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려고 할 수도 있는 외모였다. 그래서 경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 생각에는, 무명옷 남자가 범인에 가까웠던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경찰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올백 머리 남자가 "아니야! 나야!"를 외치지 않았다면, 무명옷 남자는 그대로 끌려가 범인으로 확정됐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사건 전에 무명옷 남자가 했던 모든 행동이 일왕 암살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재해석됐을 수도 있다.

무명옷 남자가 <골든 슬럼버> 주인공처럼 사회적 주목을 끈 일이 있다면, 좀더 뜨기 위해 일왕까지 암살하려 했다는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됐다면, <골든 슬럼버> 주인공처럼 애매하고 억울한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올백 남자가 나타나 "아니야! 나야!"를 외친 덕분에, 상황 전개가 거기서 딱 멈춘 것이다.

이봉창의 일왕 폭탄 투척, 그 대신 체포된 일본인

1919년 3·1운동으로 활기를 띠던 독립운동은 얼마 안 있어 약해졌다. 통합도 잘 되지 않고 자금도 잘 모이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핵심 기지인 중국에서조차 한국인들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식민지 한국은 일본 편이라는 중국인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승승장구했다. 1918년 제1차 대전 승자가 되고 1920년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된 일본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과 더불어 세계적 강국 반열에 올랐다. 거기다가 1931년에는 만주사변까지 감행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한반도-일본열도가 일본의 지배권으로 통합된 것이다.

독립운동은 침체하고 일본은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있었다. 30세까지 독립운동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이였다. 주로 지식인들로 구성된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점원이나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밤이면 양복을 매끈하게 차려 입고 유흥업소를 출입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931년 1월 임시정부 청사에 나타나 자기도 독립운동에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봉창이다.

툭하면 일본식 나막신을 끌고 술과 안주 봉지를 든 채 원어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본어 발음을 과시하며 임시정부 청사에 나타나는 그를 임시정부 직원들은 배척했다. 하지만 백범 김구는 근 1년간 지켜보다가 1932년 1월 8일의 히로히토 암살작전에 그를 투입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제까지는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았지만 앞으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살겠다'는 이봉창의 말이 김구의 가슴을 울렸다고 한다.

그 누구도 이봉창이 독립운동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이봉창은 수류탄을 바짓가랑이에 넣고 일본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1932년 1월 7일, 생애 마지막으로 유곽에서 밤을 보낸 그는 1월 8일 오전 히로히토 행렬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현장의 경찰도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그런 일을 벌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엉뚱한 무명옷 남자를 범인으로 체포했던 것이다.

거사 직전의 이봉창 의사.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이봉창의 의거는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3개월 뒤 김구의 지휘 하에 벌어진 윤봉길 의거와 더불어 이 의거는 독립운동 진영의 정신을 번쩍 뜨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거두고 물심양면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응원하도록 만드는 결과도 가져왔다. 또 선비 스타일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행동가 스타일인 김구가 국제적 명성을 얻고 독립운동 진영의 핵심 지도자로 부각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이봉창은 자기 한 몸 희생해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도로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데 엉뚱한 무명옷 남자가 체포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명옷 남자가 범인으로 확정되면 사건의 성격은 독립운동과 무관한 엉뚱한 쪽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들인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또 무관한 남한테 고통을 전가하는 것도 죄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니야! 나야!"라며 외쳤던 것이다. 이 상황이 홍인근의 <이봉창 평전>에 이렇게 묘사돼 있다.

"폭음소리의 소용돌이가 멎은 뒤 이봉창 의사는 자기 뒤에서 '나는 아니야. 저 사람이야'라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뒤돌아봤다. 그 소리는 정복 순사 혼다 쓰네요시에게 체포된 50세 가량의 작업복 비슷한 무명옷을 입은 남자가 자신이 범인이 아님을 주장하는 항변이었다. ······ 이봉창 의사는 '내가 한 일로 남에게 죄를 씌우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어 '아니야, 나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거사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혼다에게 체포에 응할 자세를 보였다."

자칫하면 1932년판 <골든 슬럼버>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봉창의 민족사랑과 책임감 그리고 선량함 때문에 상황 전개는 거기서 정지됐다. <골든 슬럼버> 주인공처럼 될 수도 있었던 무명옷 남자는 덕분에 애매한 혐의를 받지 않아도 됐다.

수류탄을 던지는 이봉창 의사.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의 효창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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