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부마항쟁 당시 국무회의 의결 전에 계엄령 통보"

총리실 산하 부마항쟁심의위 <보고서> ... "사제총, 화염병 사용 흔적 없어"

등록 2018.02.19 11:57수정 2018.02.1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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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도 전에 계엄령이 통보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마산지역에 위수령에 의거한 절차에 따른 병력출동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특전여단 투입을 지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은 "배후에 조직적 불순세력이 개입된 징후가 농후하"고 시민들이 '사제총'과 '화염병'을 사용했다고 발표했고 언론보도까지 있었지만, 조사 결과 사제총과 화염병 사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 당시 사망자 발생은 확인되지 않았다.

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아래 부마항쟁심의위)가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부마항쟁심의위는 2013년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구성되어 조사를 벌여왔고, 오는 23일 부산시의회에서 보고회를 연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 창원 등 경남 일원에서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 종말을 가져오게 했다.

이번 조사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마산 지역에 위수령에 의거한 절차에 따른 병력출동 명령에 의거하지 않고 특전여단 투입을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부마항쟁심의위는 결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 계엄사령관 박찬긍에게 '마산지역 소요사태를 파악하여 재량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하고, 공수특전여단 1개 대대를 마산으로 이동시켜 39사단장을 지원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했다.

"이에 박찬긍 계엄사령관은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 공수특전사 1개 여단을 위수령에 의거한 경남도지사의 병력출동 요청이 없었음에도 19일에 마산으로 급파하였다"고 부마항쟁심의위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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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실 산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는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 결과 보고회>를 냈다. ⓒ 윤성효


비상계엄, 위수령은 적법 절차 거치지 않아

비상계엄과 위수령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부마항쟁심의위는 "부산지역의 비상계엄과 마산지역에서의 위수령에 의한 병력출동 명령은 헌법과 법령이 정한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발동되었다"고 했다.

또 부마항쟁심의위는 "부산지역에서는 비상계엄이 선포되기도 이전에 그리고 마산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 위수령에 의거한 병력출동 명령이 발해지기 전에 군이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시위대를 체포하였다"고 했다.

이들은 "비상계엄이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도 전에 차지철 경호실장을 통해 부산시장, 군수사령관 등에게 비상계엄이 통보되었으며, 비상계엄 선포 이전 17일 23시경 군이 이미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하였다"고 했다.

"위수령에 의한 병력출동도 경남도지사가 군의 출동을 요청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위수사령관이 육군 참모총장에게 승인을 얻지도 않고 병력출동 명령을 내리는 등 법적 절차를 무시하였다"고 이들은 밝혔다.

부마항쟁심의위는 "위수령 제17조에 의하면 출동한 병력이 시위참여 민간인을 체포할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군이 시위대를 체포·연행하였다"며 "이와 같이 위법한 비상계엄과 위수령에 의한 병력 출동은 유신체제를 유지 존속하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정권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했다.

합동수사단은 비상계엄 선포되기도 전부터 조사

"배후 세력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동수사단'은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인 10월 19일 개최된 1차 회의에서 '부산대 데모 주모자 이진걸 사건', '동아대 데모 주동자 이동관 사건', '신민당 한의명 사건', '통일당 권삼쾌 사건', '남민전 사건', '불순 종교인 사건', '양서협동조합 사건' 등을 중요사건으로 선정했다.

이에 대해, 부마항쟁심의위는 "합동수사단은 북한, 신민당, 통일당, 부산지역 재야단체 인사, 양서협동조합 관련자들이 부산민주항쟁 배후라는 내용으로 수사를 진행하였다"며 "이러한 수사 과정에서 허위 진술을 자백받기 위한 고문, 폭행 등 가혹행위가 이루어졌고, 마산의 사제총기 사건도 이러한 배후 세력을 만들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했다.

부마항쟁 당시 검거된 사람들은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부마항쟁심의위는 "군법회의법이나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했으나 연행자들은 대부분 구금된 후 3~15일이 지나 구속영장을 발부받았기 때문에 7~15일의 기간 동안 불법 구금 되어 있었다"고 했다.

"즉결심판자의 경우에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석방하고 특정 날짜를 지정하여 즉결심판소로 출석하도록 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최소 2일에서 최대 10일이 지나 즉결심판을 받았다"고 부마항쟁심의위는 밝혔다.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검거된 시위 인원은 총 1564명 이상 확인되었다. 부마항쟁심의위는 "당시 부산 지역 경찰과 계엄군은 총 1058명이 검거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공식 통계 확정 후 연행된 사람까지 포함하면 연행자 수는 당국에서 발표한 1058명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마산 지역 경찰은 총 505명이 검거(구속 59명, 즉결심판 125명, 훈방 321명)되었다고 발표하였으나 군법회의 공소장, 형사사건부 등 관련 자료를 확인한 결과 실제 마산 지역 구속자는 60명으로 총 506명이 검거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부마항쟁심의위는 밝혔다.

가혹한 조사가 있었다. 부마항쟁심의위는 "경찰과 계엄군은 조사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으로 원하는 진술을 얻고자 하였으며, 심지어 시위 중 발생한 방화사건에 대해서도 범인을 조작하였다"고 했다.

재판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부마항쟁심의위는 "재판과정에서 피의자들이 조사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인해 허위진술을 하거나 강요된 진술을 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재판부에서는 이에 대해서 철저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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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망자 확인 안돼 ... 사제총, 화염병 사용 흔적 없어

사망자 확인은 되지 않았다. 그동안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마산) 등에서는 부마항쟁 당시 '유치준'씨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부마항쟁심의위는 "경찰과 군의 폭행으로 인해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확인하였으나 사망자 발생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유족들은 그동안 "10월 18일 유치준은 퇴근 후 시위로 인해 버스를 탈 수 없자 걸어서 귀가하던 중 경찰에 시위대로 오인받아 폭행을 당하고 후두부 함몰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부마항쟁심의위는 "유족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 후두부함몰이 사인이라고 얘기한 부검의를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2011년에 관련 단체 대표가 부검의와 인터뷰를 했을 때 부검의는 유치준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였다"고 했다.

또 "유족은 사망 장소 인근에서 근무하던 이발사가 당시 유치준이 쓰러져 있었고 일어서려고 애쓰는 장면을 목격하였다고 하여, 이발사를 찾아 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이발사는 유치준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였다"고 덧붙였다.

'사제총'과 '화염병'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10월 18일 치안본부는 부산 지역의 시위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며 불순세력이 개입되었다고 발표하였고, 10월 20일 마산경찰서장도 기자회견을 통해 마산 지역 시위에 대해 "배후에 조직적 불순세력이 개입된 징후가 농후하다"고 발표하였고 그 근거로 사제총기와 화염병의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부마항쟁심의위는 "당시 실제로 사제총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사제총에 대한 조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마산경찰서 수사과에서는 10월 20일 이전에 사제총과 관련하여 수사를 한 사실이 없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또 "시위대가 화염병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보고서·실황보고서·검증조서 어디에서도 화염병이 시위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며 "아무런 조사와 근거 없이 시위대가 사제총과 화염병을 사용했다고 주장한 경찰의 언론 발표는 사실무근의 내용을 과장하여 발표한 것으로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볼 수 있다"고 부마항쟁심의위는 밝혔다.

부마항쟁심의위는 "부마민주항쟁은 발발 이후 대통령 사망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시위자들이 훈방된 특수한 상황이 있었기에, 구금 10일 이상에 대해 생활지원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하였으나 통과되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 보고서는 부마항쟁보상법의 목적에 따라 진상규명과 관련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다. 본 보고서를 토대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계엄령 #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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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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