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세요? 철 지난 달력으로 교과서 싸던 날

종이 한 장도 귀하게 썼던 그 시절... 아버지와 만든 추억 한가득

등록 2018.02.22 09:20수정 2018.02.2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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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자료사진) ⓒ pixabay


해마다 가을이면 문을 새로 바릅니다. 우리 집은 5칸 겹집이어서 방문은 모두 한지로 발라야 하고 그 앞에 마루 문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답니다. 남들이 말하는 으리으리한 집이었지요.


문을 새로 바르는 날은 볕이 좋은 날로 정해야 합니다. 방문을 모두 떼어내 마당으로 가져다 놓고 그냥 종이를 찢는 것이 아니라 그 문에다 물을 뿌립니다. 지금이야 분무기가 있으니 분무기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이불 홑청 다릴 때처럼 입안 가득 물을 물고는 '푸' 하고 뱉어야 했지요. 우리 아버지 주특기가 그겁니다, 제가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되지 않던.

아무튼, 물을 촉촉이 먹은 한지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살살 때면 찢지 않고도 다 떼어낼 수 있답니다. 이렇게 떼어낸 한지는 잘 말립니다. 나름대로 또 쓰일 곳이 있거든요. 한지를 떼어낸 문을 솔로 살살 닦은 다음 마른걸레로 마무리합니다. 그다음에 흰죽처럼 맑고 깨끗한 풀을 먹은 한지를 문에다 바르고 적당히 마르면 손잡이 부분에는 특별 장식이 더해지지요.

국화꽃 잎이나 나뭇잎을 떼어다가 문손잡이 부분에 바르고 다시 동그랗게 그 위에 한지를 덧바른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문을 여닫다가 실수로 한지에 구멍을 낼 수 있기에 손잡이가 있는 부분을 더 두껍게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 안에 꽃잎을 넣는 것은 나중에 마르고 나면 보기가 아주 좋답니다.

풀 먹은 한지가 마르고 나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아세요?? "탱" 그 소리 정말 좋답니다. 그리고 문에서 때어내어 말린 한지는 다시 붙일 곳이 있답니다. 우리 집은 화장실 환기구에도 겨울이면 옷을 입히는 데 이 재활용 한지로 사용합니다. 빛이 바래서 색깔이 조금 누렇기는 하지만 바람을 막아주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까요.

화장실에서 종이 쓰던 시절


당시는 화장실에 화장지를 두는 집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일일이 다 확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화장지라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대부분이 아이들 교과서나 공책(그때는 노트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을 썼고 때로는 신문지로 쓰기도 하고요.

신문지를 쓰는 집은 그나마 잘 사는 집이었지요. 우리 집은 아주 보드라운 습자지를 썼습니다. 아버지가 공직에 계셔서 지나간 서류나 문서들을 가지고 오셨는데 모두가 습자지였습니다. 그 종이에 엽전을 넣어 제기를 만들기도 했죠.

또 하나는 일력입니다. 매일 한 장씩 넘기는 달력 아시지요? 저희 아버지는 매년 그 일력을 구해 오셨는데 그 일력의 최종 목적지가 화장실이었습니다.

우리 집 화장실에 습자지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부터 아이들은 우리 집에만 오면 화장실에 갔습니다. 주머니에 그 부드러운 습자지를 찢어 넣어 갔답니다. 제기를 만들려고요. 그 덕분에 아이들이 제 가방을 많이 들어다 주었지요. 숨바꼭질할 때면 일부러 우리 집 화장실에 숨기도 했고요.

우리 아버지는 손재주의 달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손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반듯하고 매끈하고 그랬으니까요. 신학기에 새 책을 받아오면 그 표지는 달력이지요. 하얀 달력으로 표지를 싸는 아이는 드물었고 신문지나 누런 비료 포대로 싸 오는 아이도 많았습니다.

"국어 / 2-1 / 윤강"

이렇게 표지에 까만 붓으로 써주셨지요. 그러니 달력 한 장도 함부로 버리면 안 되지요. 일 년 내내 모아 두었다가 신학기에 책 표지로 써야 하니까요.

종이. 아버지. 갑자기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종이 한 장도 귀하고 아껴 썼던 시대가 있었지요. 세월이 좋아져 두루마리 화장지가 나왔을 때도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화장실 갈 때는 '두 칸', 방바닥에 무엇을 흘렸을 때는 '한 칸'. 세 칸 이상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지금 이렇게 잘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이야 두루마리가 아니라 고급티슈도 펑펑 쓰잖아요. 요즘 아이들이 이 글을 읽으면 촌스럽다 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립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늘에서도 손재주가 여전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연을 만들어 주시면 진짜로 잘 날았는데 말입니다.
#종이 #신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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