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건축가

유현준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등록 2018.02.28 14:40수정 2018.02.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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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보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네 명의 잡학박사들이 나와 여행지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즌 1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한 시즌 2에서는 기존 멤버 2명이 빠지고 새로운 인물이 투입되었다. '유현준'이라는 건축가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자리를 대체한 것만 같아 괜히 미운 마음이 들었지만, 매 회 거듭할수록 건축가의 눈으로 도시를 바라본다는 것이 신선했다.

원시 시대의 모닥불이 현대에 거실의 TV와 부엌의 가스 불로 나누어졌다든지 냉장고라는 발명품이 사람의 주거지를 어떻게 확장시켰는지 등 그동안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었다. 그가 제시한 거실과 방 사이에 창문이 있는 가정의 모습은 혁신적이었다. 좋은 소파보다 좋은 식탁을 사야 한다는 그의 조언을 듣고 식탁을 구입했다면 할 말 다 한 셈이리라.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쉬운 마음은 그의 저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찾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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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을유문화사


그는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이 훌륭했다. 도시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라본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전성기를 지낸 후, 쇠퇴하고, 죽는 것처럼 도시의 여러 부분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나중에는 죽는다고 설명한다. 건축물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결국 도시설계자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방식에 의해서 진화하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건축과 도시를 15개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현대 도시들은 왜 아름답지 않은가, 강남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사무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뜨는 거리의 법칙 등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공간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이유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전문가의 입장에서 알려준다. 그의 설명을 읽으며 건축에 대한 나의 무지함을 알았고, 이는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매력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간단히 밝힌다는 것이다. 동양은 상대적이고, 서양은 절대적인 기틀 위에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개미와 벌을 통해 설명한다.

"개미는 동양처럼 관계 중심의 건축, 벌은 서양처럼 기하학 중심의 건축이다. 여왕 개체를 중심으로 사는 사회적 모습은 비슷하나 건축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중략) 건축을 땅에서 시작하는 개미는 땅과의 연결로 인해서 관계 중심의 집을, 배경이 전무한 공중에서 시작하는 벌은 기하학적인 집을 지었다."(p.331)


이를 토대로 자연환경이 서양의 건축과 동양의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이야기한다. 비가 적게 내리는 유럽은 땅이 딱딱하여 돌로 건축을 하고 집중호우가 있는 동아시아는 땅이 물러 나무 기둥을 쓴다는 것이다. 단, 나무가 썩지 않도록 나무 아래 주춧돌을 사용한다. 모든 일에 원인이 있듯이 오랜 시간 만들어진 건축물은 더욱 그러하다. 건축물이 그 나라와 장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남대문은 재료가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에 문화재가 아니라 그 건축물을 만든 생각이 문화재인 것이고, 그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결과물은 남대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따라서 오리지널 남대문이 불타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래된 나무가 불에 탔다가 통곡하면서 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p.116)


가장 무릎을 쳤던 부분이다. 남대문이 불탄 것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것도 아쉬웠는데 글을 읽으니 무엇이 아쉬워야 하는지 명확하였다. 고건축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며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제주편을 읽었다. 미술사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제주는 아름다운 곳이기 이전에 역사가 깃든 곳이었다. 그 역사의 흔적인 유적과 자연 경관을 중심으로 제주를 소개한 작가는 책 전반에 걸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무지 혹은 무관심으로 문화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유지·관리되는 곳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보존인지 몰라 그저 나라에서 하는 일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나가는 나에게 전문가의 지적은 일침이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바라봐주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커졌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유홍준 작가가 떠올랐다. 시간의 축으로 보자면 유홍준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사람이고 유현준 작가는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유홍준 작가가 역사의 흔적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간직될 수 있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유현준 작가는 현재를 토대로 앞으로의 건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이다.

"안전의 사각지대인 초등학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운동장 주변으로 단층 상가를 배치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감시자의 눈이 있다는 점은 공공 공간에서 사생활에 침해를 받는다는 단점도 있지만, 장소를 안전하게 만드는 장점도 있다. 소매점들을 교정 주변으로 계획한다면 학교의 안전은 훨씬 보장된다."(p.85)

"한강으로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은 아파트 단지를 때려 부수고 고층 건물을 만드는 것보다 아파트 단지를 관통하는 공공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p.233)

"광화문 광장이 시위의 장소가 되는 데는 광화문 광장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중략) 광화문 광장이 더욱 사랑받는 장소가 되려면 세종문화회관 앞 미대사관 앞길에 1층에 앉아서 정주하면서 광장을 여유롭게 바라 볼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가 생겨야 한다."(p.284)


뉴스에서 도시 사업으로 몇 억씩 투자했으나 결국 무용지물이라는 기사를 종종 본다. 가끔은 왜 저런 일을 벌이는 걸까 싶기도 하고, 가끔은 잘 될 것도 같았는데 왜 안 되었을까 궁금증도 생긴다. 이러한 전문가의 제안을 반영한다면 위험 부담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유현준 작가는 맺음말을 통해 건축가인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는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도구인 글을 통해서 건축 전공자 밖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건축은 건축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뜻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건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한다고.

공간의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그저 먹고 자고 싸는 곳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미래의 건축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을 깨우는 공간을 지향할 것이다. 건축에 관심이 생기고 더욱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 가길 권한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2015


#유현준 #건축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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