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에게 "저도 저희집에선 귀한 딸이에요" 했다가

뒤늦게 읽은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 남자들이 더 읽어야

등록 2018.03.11 20:48수정 2018.03.12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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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인기 있는 책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뭐랄까, 대충의 내용이 짐작되기도 해서 손에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하루이틀 이야기도 아니고 82년생이면 거의 삶의 궤적이 비슷할테니,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해 보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곤조곤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수없이 겪었지만 괜히 이상한 여자가 될까 봐 '그럴 수도 있지' 또는 '이정도는 별일 아니지' 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그런 일들 말이다. 


소설에서 김지영씨는 차별의 장면에서 종종 눈을 감아버리거나, 입을 다물어버리거나, 대답을 속으로 삼키거나,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 되기 쉽고 자칫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 씨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94쪽)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100~101쪽)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 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116쪽)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었다. 김지영 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가족 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133~134쪽)

책 <82년생 김지영>은 일상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잘 드러나있다. 남자들은 너무 쉽게 여자들의 외모를 품평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면서도, 표현의 자유라며 그게 뭐가 문제냐고들 한다. 성희롱 발언인데도 칭찬이라며 칭찬까지 꼬아 듣는다며 핀잔을 준다.


한번은 친구의 남자친구가 나와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이후, 나를 만난 소감으로 예쁘다는 말을 친구에게 전했다. 엥? 당황스러웠다. 서너시간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사라졌고 외모만 남았다. 평범한 얼굴의 가진 나에게 그의 말은 그저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와의 만남에 대한 소감과 평가가 외모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래서 '외모품평 사절'이라는 말을 전했다가, 칭찬한 건데 그렇게까지 받아들일 일이냐는 타박을 들었다. 설명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흔히 '여자들이 남자들을 유혹한다' 혹은 '흘린'다는 말을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기를 유혹해놓고 막상 들이대면 딴소리를 한다고 한다. 미투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남자들이 성관계는 사실이지만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다고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남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에 감정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여자들의 거절과 싫다는 의사표현은 무시되기 십상이다. 과장일지 모르지만 남성들에게 여성의 존재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그런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남성들이 읽었으면 하는 소설이다.

남자들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하는 여학생을 괴롭히는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다. 오히려 남자들의 괴롭힘은 좋아하는 감정으로 긍정적으로 포장된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41쪽)"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남자애들에게는 좋아하는 감정을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감정 표현은 거칠수록 남성다운 것이 되고, 성인이 된 남성들은 성폭력까지도 남성다움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41쪽)

성차별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 유별난 여자가 된다. 나도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이던가, '부반장 선거에 나가라'는 선생님에게 '왜 여자는 항상 부반장이냐고 싫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 말은 반장선거에 나가겠다는 말이었는데, 결국 나는 반장과 부반장 선거 둘 다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애가 반장이 되었다.

결혼 후에는 시아버지에게 "저도 저희집에선 귀한 딸이에요"라고 말했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욕을 먹었다. 그뿐인가, 부부가 함께 출산에 대한 비(非)계획을 세웠는데, 언제나 욕 먹는 것은 내 몫이다. 자라면서 나는 점점 '드센 여자'가 되었다.

드세다. 여성에게만 붙는 수식어다. 여성이라는 존재는 고분고분하고 순응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붙이는 말이다. 그러니까, 남성에게는 드세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깝게 지내는 진보적인 한 남성으로부터 "여성인권을 존중하지만 드센 여자들은 불편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에 의하면, 여성의 인권은 남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남성이 부여한 지위 내에서, 그 한계 안에서만 여성의 인권은 허용된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이 인권인지 되묻고 싶다.

또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기 일쑤이다. 정당한 권리의 요구가 어린 아이의 징징거리는 소리로 치부된다. 어지간한 수준으로 말해서는 못 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므로 남성의 의견에 반대하는 의사를 전달하려면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걸크러시, 센언니가 인기이지만 메갈리안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센언니에 대한 환호는 센언니들의 '센'이 남성 집단을 향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센'이 남성을 향하는 순간, '센'은 무식하고 교양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시선은 어느새 권력이 되어 여성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하지만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어떤 목소리들은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온다.

틈을 비집고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들이 모여서 바위를 깨뜨리는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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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인터파크 리커버 특별판)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페미니즘 #82년생김지영 #미투운동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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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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