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위원장님, 저는 인권위에서 밥 굶어봤습니다

[편지] '비정규직 식대 미지급은 차별이 아니'라는 국가인권위에 고함

등록 2018.03.07 11:36수정 2018.03.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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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한 모습. ⓒ 남소연


이성호 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작년 조사국 아동청소년인권과에서 모니터링 코디네이터로 근무한 오승재라고 합니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스무 살 청년 직원이었다고 설명 드리면 얼추 기억이 나지 않으실까요.

느닷없이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닌,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를 앞두고 한 말씀 올리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호 위원장님.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위 안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 수는 없을까. 그것을 위해 지금 인권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은 길었지만 정작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왔습니다. 반차별에 대한 인권적 감각과 의식.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은 바로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위원장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생각에 공감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저는 인권위 내부에 비정규직 차별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년 동안, 인권위는 1년 미만의 근로계약을 체결한 계약직 노동자에게는 식대와 명절 상여금조차 지급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터였으니 말입니다.

그에 얽힌 인권위의 속사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인권위는 기획재정부가 각 정부기관에 일괄적으로 하달하는 예산편성지침을 준수하여 예산을 편성하고, 이를 근거로 배정된 예산을 집행하는 것뿐이지요.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인권위에게 비정규직 차별의 모든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인권위가 예산의 편성과 지침에 있어 따르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예산편성지침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1년 미만 근로계약을 체결한 계약직에게는 기관 내 대부분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식대와 명절 상여금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차별적이고 반인권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비단 인권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제게 남아 있습니다. 차별시정이라는 기관의 중대한 가치를 좇아 마땅히 기획재정부의 예산지침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해야 할 인권위가 어찌하여 이를 수용하며 따르고 있는지, 저는 의아했습니다. 

제가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국가인권위원회를 비정규직 차별 혐의로 제소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에 능통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우실 위원장님께 법을 매개로 인권위 안에 차별이 있고, 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리자는 결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성호 위원장님.

위원장님께서는 법률에 능통하고 탁월하신 사법 관료 출신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법과 판례에 입각한 원칙적 조직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셨습니다. 기라성 같은 법조인 출신 위원님들 또한 위원장님과 함께 인권위의 법률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법률에 대하여 일천한 지식조차 없는 저로서는 인권위가 '비정규직 차별이 아니라 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여전히 의문입니다.

행정법무담당관이 제출한 답변서 내용을 보면, "정규직 근로자에 비하여 기본급, 식대, 직무수당, 직급보조비를 지급하지 아니한 것은 공무원과 공무원이 아닌 자 사이의 차이이지 차별이 아니"라는 내용과 함께 "정규직 근로자에 비하여 차등 지급한 기본급, 식대, 상여금, 직무수당, 직급보조비의 차액을 지급하고자 하더라도, 이는 국가 예산 집행 관련 제 규정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이를 확보하는 것은 피신청인 기관에서 정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판례는 공무원은 인사와 복무, 보수 등에서 국가공무원법 및 공무원보수규정 등 관련 법령의 적용을 받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에 해당하여 국가기관에 대하여도 기간제법에 명시된 차별금지조항이 적용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예산의 제약은 법에 명시된 예외사유가 아니므로 차별적 처우의 합리적인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권위 명의로 제출된 답변서에 적힌 내용은 판례에 명시된 내용과 차이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인권위도 식대 미지급 등을 '차별'로 인정하고, 판례의 기조를 따라야 한다고 해석한 제가 잘못일까요.

판례와 법리를 떠나 인간된 도리로서 이러한 인권위의 답변서는 제게 절망적이으로만 다가옵니다. 공무원이 아닌 사람은 밥값을 주지 않아도 마땅하다는 이야기, 돈이 없으니 차별이어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인권위의 입으로 듣게 되다니 말입니다.

기간에 따라 '밥값 줘야하는 사람'을 구분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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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권위에서 밥을 굶은 적이 있습니다. ⓒ pixabay


이성호 위원장님.

위원장님께서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밥을 굶어본 일이 있으십니까. 애석하게도 저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일하며 그러한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최저임금을 겨우 상회하는 급여에서 4대 보험과 각종 세금을 공제하고, 휴대전화 요금까지 낸 다음, 왕복 네 시간에 달하는 출퇴근과 각종 모니터링에 소요된 교통비와 실비를 뺀 후, 양친께 생활비를 드리고 나면, 서울 물가에 식대를 부담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같은 과에 근무하셨던 동료 직원들과 다른 조사관들이 자주 제 밥값을 대신 내주곤 하셨고, 덕분에 돈이 없어 밥을 굶은 날은 손에 꼽게 되었습니다만, 언제까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배려 내지는 시혜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는 명확한 답을 내놓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보입니다.

억울하실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성호 위원장님께 차별의 책임이 전적으로 있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위원장님께서 비정규직에게 밥값조차 줄 필요 없다고 말씀하실 만큼 비인간적인 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원장님께서는 사용자이시기 전에 국가인권기구이며 차별시정기구인 인권위의 대표자이십니다. 정부가 인권과 평등, 존엄의 원칙에 반하는 정책을 펴고 그러한 규정을 둔다면, 그것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시정을 권고하고 끝내 시정시켜야만 하는 책임을 갖고 계시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로계약 기간에 정함이 있느냐 없느냐, 그 기간이 1년 이상이냐 아니냐를 기준 삼아 예산비목을 구분하여 '밥값을 줘야 하는 사람'과 '밥값을 안 줘도 무방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규칙이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부합하는 것입니까. 정녕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성호 위원장님.

차별을 시정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기관인 인권위마저도 예산을 이유로 비정규직에게 식대를 지급하지 아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의 예산 통제 하에 있어 어쩔 수 없다는 인권위의 주장은 솔직히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인권에 반하는 법률과 제도에 권고, 의견 표명으로 경종을 울리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인권위의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부정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성호 위원장님.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기업의 무분별한 이익 추구로 인하여, 일터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유린당하는 사람들이 찾아갈 곳은 어디입니까. 국가인권위원회입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저도 당연히 인권위로 가야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권위에 몸담았던 저조차도 인권위가 아닌 노동위원회를 찾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극입니다. 차별시정기구가 차별을 혐의로 정부 행정관청에 제소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셔야 합니다. 지난 세월 지속된 문제제기에 눈감고, 예산부처와 국회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비극에 이른 것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일신하셔야만 합니다.

이성호 위원장님.

법률은 제한의 규범이지만, 인권은 포괄의 가치를 지닌 규범입니다. 그렇다면 인권위는 어디에 서야 하고, 어떤 길로 향해야 하겠습니까. 위원장님. 이제라도 차별적 주장으로 얼룩진 답변서 제출을 멈추도록 하시고, 차별적 처우를 인정하여 시정에 나서주십시오. 공공부문 계약직 노동자에 대한 반인권적 차별 행위에 단호하게 맞서주십시오.

부탁이 아닙니다. 인권위의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수용하셔야만 하는 경고입니다. 인권위의 용단과 행동에 많은 인권활동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두려워마시고, 행동에 나서주십시오.

날이 풀리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올해도 봄이 오면 예년처럼 남산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겠지요. 문득 재직 당시에 참여했던 직원 소통 행사가 기억납니다. 남산 돈까스 집에서 막걸리 한 잔 부딪히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 털어놓던 그 심정으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노여워만 마시고, 본뜻을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를 앞두고,

오승재 올림 
#인권위 #비정규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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