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념치 말라, 미안하다"? 가해자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의 해시태그] #성폭력_정당화하는_뒤틀린_욕망

등록 2018.03.06 17:33수정 2018.03.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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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부터 #WithYou까지, 간명한 해시태그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나도 말한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뜨거운 주목을 받는 것이 새로울 뿐, 낯선 풍경은 아닙니다. 여성들은 이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해시태그를 앞세우고 사회 곳곳에 숨겨져있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에 대해 말해온 바 있습니다.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파편화됐던 여성의 목소리는 작은 태그 아래 모여 힘을 얻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3.8 여성의 날을 맞아 <우리의 해시태그>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그간 터져나온 여성들의 소중한 선언을 조명하고, 앞으로 전하고 싶은 목소리를 한 문장의 해시태그로 정리합니다. 해시태그는 프로그래밍 도구에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명령어' 앞에 사용하던 기호입니다. 우선,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시작'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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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 pixabay


발칙한 상상을 해보았다. 미투 운동(#MeToo)의 외침에 고개 숙인 이들 중에 왜 여성은 없을까? 왜 사건의 피해자는 늘 여성인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여성은 '가해자'조차 되지 못하는가?

성폭력 가해자 중에 여성이 있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만약 '왕' 같은 권력이 여성에게 있었다면 고개 숙인 남자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까? 똑같은 행위를 했더라도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처럼 행동했을까?

나의 상상력의 한계인지 몰라도 답은 '아니오'다.

얼마 전 친구들과 미투 운동(#MeToo)을 이야기하며, 각자의 기억을 떠올렸다. 꽁꽁 싸맨 기억이 언어가 되는 것이 불편하고 아팠지만, 우리는 뜨겁게 공감하고 함께 분노했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머리나 등을 쓰다듬곤 했어. 느끼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내릴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거 같았어."

"초등학교 때 남자애들이 개들이 교미하는 걸 보고 여자애들 앞에서 똑같이 흉내 내곤 했어. 자기들끼리는 희희낙락거리는 모습이 미친놈들 같았어."

"어릴 때 엄마는 일하러 다니고 나는 늘 혼자였어. 동네 오빠들이 내 치마 밑에 손을 넣고 만지곤 했어. 난 무서워서 꼼짝도 못했지. 만지면서 그랬어. 엄마한테 말하면 죽여 버린다고. 지금까지 엄마한테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직장 상사였는데, 회식이 끝나고 나를 집에 태워주겠다는 거야. 차 안에서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었다며 내 몸을 만졌어.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어. 막상 내가 당하니까 그 어떤 저항도 못하겠더라."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그들은 알기나 할까. 가해자들은 '과거완료'가 되었을지 몰라도, 피해자들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가해자를 보았는가. 그들의 연출된 변명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술에 취해서, 위로하고 싶어서, 외로워서'라는 핑계는 피해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5일 JTBC를 통해 공개된 안희정씨와 성폭력 피해자의 메신저 대화 내용은 어떤가. 피해자에 따르면, 그는 총 네 차례 성폭행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피해자에게 "괘념치 말라"거나 "미안하다", "잊어라"는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심지어 피해자는 미투 운동이 활발해졌을 당시, 안씨가 '내가 미투를 보면서, 그게 네게 상처가 되는 줄 알았다.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그날도 성폭행을 했다고 증언했다. 논란이 커지자, 결국 안씨는 6일 새벽 자신의 SNS에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모두 제 잘못"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차라리 가해자들이 '나의 권력과 명예를 이용했다' '나는 강자였고, 여성이 약자라서 그랬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더러운 생각에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성들은 언제까지 성폭력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낮이든 밤이든 안전한 곳이 없다. 남자들은 억울하겠지만, 지나가는 남자들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봐야 하는 것도 괴롭다. 여성은 평생을 사회적 약자로 살았기 때문에, 가해자조차 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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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정무비서인 김지은씨는 5일 jtbc <뉴스룸>에 나와 안 지사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 jtbc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어렸기도 했지만, 나 역시 사회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혜경의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를 읽으며 선녀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목욕을 하고 난 후 날개옷이 사라진 선녀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나무꾼의 행위는 명백한 범죄이다. 사건을 연출하고 지켜봤던 사슴도 똑같은 가해자다.

나무꾼이 아무리 좋은 사람인들 무엇 하랴. 선녀와의 만남은 단순한 호기심일지 모르나, 선녀와의 결합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합의' 없는 결혼과 섹스 그리고 출산을 견딘 선녀는 나무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선녀는 지상에 내려왔던 순간을 얼마나 후회했을까. '내가 목욕을 안 했더라면…' '왜 눈에 띄는 곳에 날개옷을 벗어놨을까' '왜 하필 내 옷만 없어졌을까' 하며 자신을 탓했을 거다.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들이 골방에서 죄 없는 자신을 탓한 것처럼 말이다.

상상해보자. 나무꾼끼리 목욕을 하고 있다면, 나무꾼의 옷을 숨길 선녀가 있을까? 옷을 숨기다가 들킨다면? 혹시 당할 수도 있는 폭력이 두렵지 않은 선녀는 없을 것이다. 나무꾼의 알몸을 몰래 보는 선녀는 있을지 몰라도, 그 옷을 숨길 선녀는 없다.

모든 괴로움을 견딘 선녀의 욕망은 오로지 하나였다. 자신이 잉태한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그들의 관계가 폭력이 아니라, 합의로 시작되었다면 선녀는 나무꾼을 떠났을까.

나무꾼은 자신의 범죄를 알기나 할까. 아마 나무꾼을 법정에 세운다면 "모두 다 사슴이 시켜서 그랬어요. 선녀가 너무 예뻐서 곁에 두고 싶었어요. 결혼을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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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욕망의 시대는 끝났다 ⓒ pixabay


생각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시대는 끝났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최후진술과 같다. 그는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신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이다"라고 했다.

그의 죄는 나무꾼을 비롯한 모든 가해자의 죄목과 같다.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죄'이다. 가해자들은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 한 번도 피해자의 입장에 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가정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였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이웃이었다. 다만 히틀러의 지시를 성실하게 행한 것뿐이라며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최후진술로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했다.

'사유'하지 않는 가해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권력을 통해 표출해도 되는가. '내가 저 여자를 내 멋대로 할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여성은 위장된 평화를 위해 '강요된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으로 평화를 얻는 건 남성들뿐이었다.

더 이상 남성들의 거짓 평화를 두고 보지 못하는 여성들은 '폭로'를 통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 발칙한 상상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 어떤 상황이든 합의되지 않는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 뿐이다.

여성들의 침묵과 희생 아래 비열한 남성들이 누리던 안전지대도 미투 운동(#MeToo)의 외침으로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투 운동 #성폭력 #성추행 #선녀와나무꾼 #한나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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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쓸 때는 은둔자가 되고 싶으나,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인. 곧 마흔, 불타는 유혹의 글쓰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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