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고3 아들, 윤성빈 부럽지 않네

[명랑한 중년] 행복이 허벅지 두께 순이라면

등록 2018.03.09 23:12수정 2018.04.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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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엄마, 나 수능 끝나면 동계올림픽 준비할까 봐요."
"응? 뭔 소리야"
"스켈레톤 윤성빈 선수 말예요. 그 선수 보니 허벅지 크기가 나랑 비슷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운동 시작했대요. 내 체격에 허벅지가 이렇게 두꺼운 사람은 운동선수 빼고 없을 거예요."


고3 아들이 자기 허벅지를 두들기며 말한다. 아들은 허벅지 때문에 맞는 바지가 없다고 투덜거린다. 교복 바지도 허벅지에 맞는 걸 사느라 허리를 2인치 이상 줄였다. 저주받은 허벅지란다.

허벅지가 유난히 발달하긴 했다. 단백질 보충제를 먹어가며 하체 운동을 매일 2시간 이상 해야 가질 수 있는 허벅지라고 헬스 트레이너도 말했다. 트레이너는 부러워 하고 아이는 창피해 한다. 세상 참. 장수의 원천이자 건강의 근원이라고 말해봤자 아이에게는 그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남자 아이돌 같은 얇은 다리를 갖는 게 소원이란다.

'저주' 받은 허벅지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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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레톤 윤성빈 선수가 2월 16일 오전 강원도 평창 올림픽 슬라이딩 센터에서 3차 주행 출발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우리 집안의 허벅지는 그 유래가 깊다. 내 기억에 엄마가 바지를 입은 걸 본 적이 없다. 유일한 엄마의 바지인 내복도 허벅지 부분이 닳아서 자주 누볐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다인 우리 오빠는 대학 입학 후 동아리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역도부에서 뜻하지 않은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누군가 줄자를 들고 뛰어와 허벅지를 재는데 유도부 선배들이 이 광경을 보고 서로 자기네 동아리로 들어오라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본인도 모르는 비결을 자꾸 묻는 선배들에게 자전거를 많이 탔다고 얼버무렸다. 오빠는 법학 전공이었다.


언니도 청순가련형에 순정만화에서나 본 듯한 얼굴인데 허벅지는 장군감이다. 어쩌다 언니 다리를 베고 누우면 목이 심하게 꺾여 담 걸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언니도 항상 치마를 입는다. 바지를 입을 일이 생기면 상의가 길게 내려오는 옷을 입는다. 어떻게든 가리고 싶어서다.

그런데 맨투맨티를 크게 입는 모습을 보면 어쩔 땐 '스폰지 밥'같다. 몸이 네모다. 인터넷에 떠도는 '체형을 커버하는 옷차림'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건 웬만한 사람만 커버된다.

아무래도 두꺼운 허벅지가 우성인자인가 보다. 형부도 남편도 허벅지가 얇은데 언니네 아이들도 우리 아들도 허벅지가 튼실한 거 보면. 운동을 하면 더 두꺼워지는 근육 만땅 허벅지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얇아진다고들 하는데 이런 좋은 법칙은 항상 비켜가기 마련.

75세 우리 엄마는 아직도 두꺼운 중이다. 헌혈처럼 허벅지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 가족이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텐데 말이다.

며칠 전 만난 친구도 윤성빈 선수 경기 할 때 남편이 다급히 불러 설거지하다 말고 뛰어갔더니, '당신하고 허벅지 크기가 비슷하다'며 이제라도 스켈레톤을 준비해보라고 했단다. 어이없어서 웃었다는 친구는 50세 피아노 선생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혹은 '불가능은 없다'면서 도전해보라고 격려를 해야 할까. 피아노만 치기에는 아까운 허벅지긴 하다.

허벅지가 두꺼워 슬픈 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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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돌 같은 얇은 다리를 갖는 게 소원이라는 아들 ⓒ 이정민


이번 동계 올림픽 때 평창에 갔었다. 다른 경기들은 비싸기도 하고 보고 싶은 경기는 매진되어 바이애슬론을 봤다(입석 2만원). 남자계주 결승전이었는데 우리나라 선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현장에서 보니 생동감 있고 재미있었다.

스키를 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총을 쏘는 경기인데 주로 유럽 선수들이다. 유전자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몸이 길어서인지, 운동을 많이 했을 텐데 심지어 허벅지가 가늘어 보인다. 운동의 강도와 허벅지 두께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닌가 보다. 눈에 띄게 두꺼운 사람은 오히려 같이 간 내 친구다. 허벅지 두껍기 대회가 있다면 내 주변에도 실력자들이 상당하다.

요가를 가르치는 내 친구는 반대로 허벅지가 얇은 게 문제란다. 다리에 힘이 없어 하체로 버텨야 하는 동작이 너무 힘들다며, 수강생들에게 멋진 동작을 보여줘야 하는데 벌벌 떨리는 다리가 원망스럽단다. 허벅지는 얇고 종아리는 알이 박혀 울퉁불퉁하다며 전생에 뭔 죄를 지은 거냐고 하소연이다. 두꺼워도 문제, 얇아도 문제. 

허벅지 하나에도 이렇게 사연이 많다. 허벅지가 두꺼워 슬픈 사람, 콤플렉스였던 두꺼운 허벅지 때문에 뜻밖의 환대를 받는 사람, 얇아서 원망스런 사람, 얇아서 부러움을 받는 사람. 허벅지 하나도 이러하니 이목구비, 팔 다리, 오장육부를 다 가진 나를 긍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눈이 작은 게 문제, 코가 낮고, 뱃살이 있고, 둘째 발가락이 지나치게 길거나 손가락이 뭉툭하거나... 찾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두껍다'란 것도 '얇다'란 것도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기준을 얇은 곳에 두면 두꺼워지고 두꺼운 곳에 두면 얇아질 테니 말이다. 기준을 내게 불리하게 두고 스트레스 받느니 기준을 바꾸면 아무 문제가 없다.

얼핏 맞는 말이지만 어쩐지 위로가 되지 못한다. 모든 기준을 내 유리한 것에 두다 보면 속은 편할 수 있으나 자기발전은 없다. 기준은 내가 행복한 쪽에 설정하고 자기발전을 꾀하는 것이 최고의 수이나 이걸 내 생활에 적용하는 건 내공이 필요하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면 살이 빠져'처럼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삶의 경험치가 쌓여야 진정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자기 속도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 말은 쉽지만 아직 그 참뜻은 알지 못하는 아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얘기일 텐데.

아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장점을 개발하라고 할까. 아니면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라고 원론적인 얘기를 해야 할까. 나도 허벅지가 두꺼워서 스트레스 받는 아들을 키워 본 건 처음이라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로를 뛰어넘는 근사한 한마디를 찾고 싶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체대 준비를 해서 동계올림픽을 노려보라고 부추겨볼까. 행복이 허벅지 두께 순이면 좋으련만.

개학을 해서 이침부터 분주하다. 아들은 씻고 있고 나는 아침밥을 준비한다. 허벅지가 두꺼운 채로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아들은 모를 거다. 두껍거나 말거나 내 눈에는 이미 최고의 존재임을.

허벅지만 가늘면 소원이 없겠다는 아들도 '행과 불행이 단순하게 한두 가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뒷모습이 유난히 듬직한 건 허벅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들, 잘 다녀와.
#허벅지 #윤성빈 #스캘레톤 #명랑한 중년 #주간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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