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선덕여왕, 그 결정적 차이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②] 경주 선덕여왕릉

등록 2018.03.16 11:28수정 2018.04.2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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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은 낭산 남쪽 중턱에 원형 봉토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 홍윤호


선덕여왕릉을 찾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금요일 오전 11시 20분경, 헌법재판소 8인 재판관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여 역사적 결정이 내려졌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당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년.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비폭력 수단인 촛불로 부당한 권력을 몰아내고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다수 국민들은 제자리에서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가까운 과거의 사건이었지만,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필자는 1년 전 이 시기에 진도 팽목항과 경주 선덕여왕릉을 찾았고, 근래에 다시 선덕여왕릉을 찾았다.

선덕여왕과 박근혜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여성 권력자였다. 한쪽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왕'이고, 한쪽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린다. 물론 박근혜에 대한 평가는 아직 당대의 평가이고, 역사적 평가를 받은 건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미 판단은 끝났다.

이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낳은 두 여성 권력자를 비교하며 현장에서 생각해 보기에 좋은 곳이 선덕여왕릉이라 요즘 몇 년간 자주 발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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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주변 소나무숲 안개 일교차가 크면 소나무숲에 짙은 안개가 끼는데, 꽤 운치가 있다. ⓒ 홍윤호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가지 남쪽의 야트막한 산, 낭산에 있다. 시내에서 불국사로 향하는 7번 국도 좌측에 사천왕사 터가 있고, 이 사천왕사 터를 지나 운치 있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산 중턱으로 오르면 조용한 그녀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신라 왕들의 무덤 중에서도 진입로가 운치 있는 곳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분위기가 좋다.

특히, 일교차가 심한 2~3월과 10~11월에는 운이 좋으면 아침 안개를 만날 수 있다. 삼릉숲의 아침 안개가 좋다 하지만 이 선덕여왕릉 입구와 왕릉 주변의 소나무숲 아침 안개도 유명하지만 않을 뿐, 그에 못지않게 환상적이다. 필자에게는 지난해 2월에 이 안개의 바다를 만나서 그저 행복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진입로뿐만 아니라 왕릉에 올라서도 주변에는 온통 아름드리 소나무들이다. 경주에 수많은 왕릉과 소나무숲이 있지만, 숲 하나만으로도 손꼽힐 만하다. 이 낭산 왕릉 주변에는 민가가 없어 아침에 찾아가면 더욱 조용하다. 본래 사람이 거의 찾지 않아 한적했던 무덤이 한때 드라마 <선덕여왕>의 영향으로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줄어서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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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왕릉 앞에서 여자아이가 절을 하고 있다. 한때 드라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요즘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 홍윤호


왕릉 자체는 둘레가 72m의 원형 봉토분(흙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이며, 자연석을 이용해 봉분 아래에 2단의 보호석을 쌓았다.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무덤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어느 무덤에나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라 통일 이전의 일반적인 왕릉들과 구조상에서 별 차이는 없다.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 이 무덤이 선덕여왕릉이라는 명확한 물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선덕여왕릉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사료에 나타나는 다음의 기록 때문이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내가 언제 어느 날 죽을 것인데, 죽으면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라고 하였다. 난데없는 예언에 당황하면서도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 신하들이 다시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그녀를 장사 지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뒤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가 지어지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이 다스리는 도리천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 위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천왕사 위가 도리천에 해당되고, 이곳에 무덤을 썼으니, 선덕여왕은 사천왕사가 지어지기 30여 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현재 사천왕사 터 위쪽 낭산 남쪽에 왕의 무덤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으니, 위 기록에 따라 이 무덤이 선덕여왕릉이 되는 셈이다. 이야기 자체는 허구에 가깝다 해도 허구적인 내용을 제외한 '팩트'만 놓고 보면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물적 증거가 없고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어도 이 무덤은 선덕여왕릉이 거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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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가는 길 선덕여왕릉 올라가는 길은 빽빽한 소나무숲을 즐기며 가는 평화로운 길이다. ⓒ 홍윤호


선덕여왕은 어떤 왕이었는가

신라 진평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에서 모란꽃과 꽃씨를 신라에 보내왔다. 진평왕이 신기한 듯 화려한 모란꽃 그림을 들여다보자 그 옆에 있던 딸 덕만이 말하였다.

"아버님, 이 꽃은 비록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진평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하니,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와 벌이 없는 까닭에 그걸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꽃을 심으니 과연 말한 것처럼 향기가 없었다. 왕이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조의 첫 내용이다. <삼국사기> 전체에서 왕에 대한 기록 첫머리에 왕의 신비한 능력을 강조하는 이런 일화가 나오는 경우는 선덕여왕이 유일하다.

굳이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능력이 정말 뛰어났다기보다는 전례와 달리 여성이 왕이 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반발이나 비판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선덕여왕의 비상한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이었지만 왕이 될 만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른바 지기삼사(知幾三事), 즉 세 가지의 선견지명이 그것이다. 

모란꽃 이야기가 지기삼사의 첫 번째이고, 두 번째 선견지명은 왕위에 있을 때 여근곡에 백제군이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며, 세 번째는 위에 언급한, 자신이 죽는 날을 알아맞힌 것이다. 이 중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는 허구적인 스토리를 첨가하여 여왕의 신성성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오히려 신성성을 강조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보여줘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인 상황이 어려웠음을 보여준다.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왕이 된 이유는,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성골 남자가 끊어졌기 때문이며, 진평왕이 죽은 뒤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는 여자가 왕이라 이웃 나라가 업신여긴다고 조롱하거나, 여왕 재위 말기에 비담과 염종이 '여왕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왕 당시에 끊임없는 도전과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당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너희 나라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에 해마다 편안할 날이 없으니 내가 왕족 중 한 사람을 군대와 같이 딸려 보내 왕으로 삼아 통치하게 하고,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면 어떻겠냐"라고까지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이게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면 당시 분위기가 어떤지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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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가는 길 선덕여왕릉 올라가는 길에 나무데크가 놓여 조금은 편안해졌다. 안개가 낀 날이면 더욱 분위기가 좋다. ⓒ 홍윤호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해도 선덕여왕은 신라 발전기의 왕으로서 신라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된다. 선덕여왕 때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명한 첨성대가 건립되고, 분황사가 창건되었으며, 당대 최고 높이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황룡사 9층탑도 건립되었다. 건설 산업의 호황기라 할 정도로 불교 건축 사업이 많았던 것은 불교를 후원함으로써 불교 세력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여러 번 위기를 맞았지만, 휘하의 장수들을 잘 다루어 적절하게 막아 내었다. 대개 수세적 입장이었지만, 결정적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버티기에 성공했다고 할까.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던 까닭

선덕여왕의 진정한 능력은 정치력이다. 아무리 성골의 혈통이라고 해도 힘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하거나 강력한 힘을 보여줄 수 없는 상황에서 여왕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치력뿐이다.

정치력은 세력과 세력의 조정 능력에 있다. 당시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보수적인 진골귀족들은 여왕을 견제하고 틈을 엿보는 개혁의 대상이지만, 그대로 등용하면서 소극적인 자기편으로 만드는 반면, 권력 지향성과 의지가 강한 김춘추와 가야계의 신귀족(김유신 중심)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여동생(문희)의 결혼에까지 적극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덕여왕은 나라 안팎의 위기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새로운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워 구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구세력을 숙청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이러한 조정 능력으로 극복하였으며, 이것이 비교적 성공했기에 역사 기록에는 '예지력(선견지명)'이 있는 왕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본다. 사료에 보이는 그녀의 신비한 능력은 이러한 적절한 세력 균형 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성골 남자가 없어서 왕이 됐다고 하지만, 이는 단순한 명분일 뿐 화백회의에서 어떻게 논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화백회의의 구성원들이 '성골이지만, 여자라서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즉, 힘이 있는 누군가가 이 명분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신라의 왕위 계승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조선 시대처럼 명분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왕이 된 것은 그녀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화백회의의 논의를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왕이 되기 전부터 정치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일부 사람이나 학자들, 혹은 어르신들이 여전히 가진 그녀에 대한 환상, 즉 '부드럽고 온화한 여성 왕'의 이미지는 허구에 가깝다. (경주 남산 동쪽의 감실석불좌상이 온화한 미소를 띤 여성의 모습이고 7세기경 작품이라 하여 이를 선덕여왕의 형상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오히려 똑똑하고 눈치 빠르며 욕심과 야망이 강한, 당시의 어느 남성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배포와 능력을 갖추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목소리도 크고 지위에 걸맞은 쇼맨십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여성이 왕이 되기 힘든 상황에서 여왕이 탄생했다는 것은 그녀의 의지와 욕망이 없으면 불가능한 시대였다. 뭔가 업적을 남긴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이웃 나라 일본, 중국의 여성 왕들의 사례를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다만 의외로 일본, 중국, 그리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례에서도 보는, 주기적인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정치 투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적어도 사료상으로는 그렇다), 그만큼 대외적인 위기가 커서 단결이 필요했다는 얘기도 되지만, 그만큼 선덕여왕의 정치력이 꽤 탁월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여왕 말기에는 힘의 균형이 김춘추와 김유신 중심의 신귀족 세력으로 급격히 기울어진 듯하다. 보수 귀족을 대표하는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와중에 여왕이 사망하였다. 이를 진압한 것이 김유신이었음을 보면, 결국 이후의 역사 전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신귀족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 여왕인 진덕여왕의 즉위는 그녀의 적극적인 의지의 발현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김춘추의 왕위 등극으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이 강하다.

결과적으로 선덕여왕은 신라 발전기에 불교를 지원하여 힘을 키워주고 이 불교를 중심으로 문화적 발전을 주도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는 과도기의 세력 교체 상황에서 혼란을 최소화하고 신라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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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터 선덕여왕릉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사찰. 터만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홍윤호


선덕여왕과 진성여왕, 그리고 박근혜

위에서 보듯 선덕여왕은 자기 시대 정치의 주체였다. 애초에 관심과 욕망이 강했던 만큼 왕이 된 이후에도 자기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이끌어 갔다.

그런데 과거 박근혜가 대통령 재직 시에 일각에서 그녀를 선덕여왕에 비유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마 박근혜 주변에서 희망 사항으로 흘러나온 이야기인 듯싶다.  

처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좋든 싫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여성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능력 있는 여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제 최고 권력까지도 얻게 된,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저 '최초'라는데 의미가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오히려 여성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을 남기게 되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과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므로 굳이 "여성"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대통령 변호인이나 측근들이 '여성'임을 굳이 강조하면서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만을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니 박근혜를 선덕여왕에 견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치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러면 또 다른 여왕,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어떨까.

실제 역사적 사실이야 어떻든 일반적인 인식 상 선덕여왕은 성공한 여왕이고, 진성여왕은 실패한 여왕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진성여왕의 무덤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진성여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인정된 것이 없다. 그 정도로 외면되어 온 것이다. 이렇듯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상황이 달랐기에 섣불리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인식에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 선덕여왕은 새로운 세력을 키워 주면서도 기존 보수 세력을 적절히 포용하는 나름의 리더십을 내세워 정치력을 발휘, 당시의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통일 신라의 길을 열게 된다. 결과를 봐도 실패한 리더십은 아닌 셈이다.

그에 비해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실패한 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내부적인 권력 쟁탈전과 장기간 대외적 평화에 따른 이완 현상, 사치 풍조, 조세 비리 등으로 서서히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왕이 된 그녀에게 신라 멸망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과거 역사서 저자들은 남성들이라 이런 편견으로 신라 멸망의 대표적인 책임을 덮어씌우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신라가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왕이 된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책임은 있다. 바로 국정 운영 부분에서다. 신라 말 경문왕이 사망한 뒤에 그의 아들, 딸들이 계속 왕위를 계승하는데,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으로 이어진다. 세 왕 모두 경문왕의 자식들이다. 일반적으로 전문 학자들에 의하면, 진성여왕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왕이 되었다기보다 경문왕의 자식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 경문왕의 동생인 숙부 위홍이 그녀의 공식적인 후원자가 된다. 헌강왕 때부터 경문왕계를 대표하며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위홍이다. 3대에 걸쳐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국정을 장악한 인물인 것이다. 경문왕의 동생이었으므로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막후의 실질적인 권력을 더 선호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진성여왕은 이런 상황에서 모든 권력과 국정 운영을 위홍에게 의지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위홍이 여왕의 애인(불륜관계)이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부부였다고 한다. 근친혼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여서 혼인을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국정을 주도했던 위홍이 하필이면 여왕 재위 2년 만에 사망한다. 국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의지 부족으로 국정 운영을 위홍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의 역사 기록을 보자.

그래도 진성여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삼국사기>에는 위홍 사망 후 여왕이 젊은 미남 2, 3명을 남몰래 궁궐에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중요한 벼슬자리를 주어 나라의 정치를 맡기기도 하였는데, 그러자 아첨꾼이 생기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등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공통으로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여왕 때에 위홍 등 3, 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고 한다. 여기에 백성들이 이 같은 정치를 비판하고 길거리에 비판 글을 남기니, "왕거인"이라는 인물의 짓(요즘 말로 하면 왕거인이 근거 없는 글로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이야기)이라고 하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왕거인이 결백을 주장하며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자, 하늘이 옥에 벼락을 내리쳐서 풀려났다고 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할 경우, 하늘이 '민심'을 상징한다고 보면, 결국 이 이야기는 결백한 왕거인에 대한 민원과 정부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자 그를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성여왕의 문제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국정 운영에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던 그녀는 측근이자 애인(혹은 혼인한 남편-혼인했다면 아마 경문왕계 후손을 배출하기 위한 정략결혼인 듯)인 위홍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고, 이것은 극소수 인물들에 의한 국정 농단을 낳았다. 인맥과 뇌물을 통한 관료 등용은 거대한 부패 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는 조세 부정을 낳았다. 부정부패와 자연재해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자 지방에 관리들을 보내 강제로 세금을 거두려고 하였다.

결과는 원종과 애노의 난을 비롯한 전국적인 농민 봉기였다. 이러한 농민 봉기의 와중에 중앙 권력은 약해지고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이 등장, 호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알다시피 이들 호족세력이 기반이 되어 궁예와 견훤 정권이 탄생한다.

봉건시대에 국정 운영의 중심축은 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왕이 어떤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세력과 새로운 세력을 적절히 등용하며, 새로운 세력에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어 힘을 실어준 선덕여왕과, 국정 운영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부족한 데다 극소수의 특정 인물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국정 농단을 허용하여 신라의 몰락을 자초했던 진성여왕. 두 여왕의 국정 운영은 명백하게 결과가 말해준다.

자, 그렇다면 박근혜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진성여왕이 오늘날의 전직 여성 대통령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있었다. 진성여왕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능력 부족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오빠 헌강왕의 아들이 발견되자 기뻐하면서 스스로 왕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효공왕의 즉위이다.

경문왕의 혈통으로 왕위를 잇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시인한 부분이기도 하다. 덕분에 말년은 편안했다. 신라 말기의 그 흔한 정변에 의한 죽음을 피해간 것이다.

때로 역사는 현재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과 풍부한 간접 경험 사례를 준다. 선덕여왕의 무덤을 걸어 내려오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누구 말대로 역사는 그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비슷해 보여도 세부 내용은 모두 다른 수많은 영화나 소설처럼 창조적 모방과 응용이 이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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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야경 선덕여왕은 다양한 건축 사업을 벌였는데, 첨성대도 이 때에 건립되었다. ⓒ 홍윤호


* 참고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라는 호칭은 현대적 호칭이다. 유교 사상에 입각한, 여성 차별적 의식이 강했던 역사서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에서도 이들을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으로 표기하였다. 즉, 성별이 여성이라고 하여 여왕이라고 호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역사서에 나온 왕의 명칭을 그대로 부르지 않고 여왕이라고 하니, 장차 수정해야 할 부분이다. 일본에서도 자기들 '천황(일왕)'을 '여천황'이라 하지는 않는다. 6~7세기를 살았던 '스이코천황'을 '스이코여천황'이라 부르던가.

다만 여기서는 워낙 일반화된 호칭인 데다 선덕왕의 경우 신라 말에도 같은 이름의 선덕왕이 있었기에 헷갈릴 소지가 다분하므로, 굳이 여왕이라고 호칭하였다. 또 전문 학자가 아니니 나 홀로 일탈하는 것은 맞지도 않는 듯하다. 문제 제기 선에서 그친다.
#선덕여왕릉 #진성여왕 #박근혜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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